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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12화 (21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12화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나름대로 신용은 지키는 사람인 듯 약속대로 엘리자베스를 줄의 가장 앞쪽에 세워주었다. 그러면서 항의하는 이에게는 성호를 그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이 불쌍한 형제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마차 사고로 잃어버리셨다고 합니다. 이 형제님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시는 형제님은…….”

남자는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천국의 목소리를 듣기 힘드실 것 같군요! 돈 돌려드려!”

엘리자베스는 이 과격한 접객방식에 놀라운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하지만 이 과격한 접객방식에 날을 세울 것 같던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남자의 당당한 태도 덕에 이 부스의 신빙성이 더 믿음이 간다는 표정으로 기도문을 줄줄 읊었다.

‘이…… 이런 걸 배워야 하는 건가……?’

엘리자베스는 다소 놀란 얼굴로 남자를 따라 검은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 안에는 상자에 담긴 기계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남자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상자에 담긴 기계와 연결된 전선을 찾으려고 했지만 내부가 온통 검은 탓에 선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 기계는 뭐란 말인가?

그때 남자가 말했다.

“자, 이 기계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기계는 천국과 지상을 연결해주는 장치로서 형제님께서 듣고 싶어 하시는…….”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남자는 저 기계가 일종의 전화이며 엘리자베스는 지금부터 천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셈은 치러야 하기에 남자에게 세어둔 동전을 내밀려고 했다.

그러자 남자가 단호하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어허이! 형제님께서 대화하고 싶은 분과 충분히 대화를 하시면! 그 만족도에 맞춰서 돈을 내시면 됩니다! 맘에 영 안 드시면 20페니도 안 내셔도 돼요!”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말은 20페니보다 더 많이 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에 수긍하는 척하면서 20페니 외의 다른 돈은 속주머니에다가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괜히 남자에게 털릴지도 몰랐다.

남자는 설명을 마치고 엘리자베스 주변을 빙빙 돌면서 말했다.

“당신의 슬픈 사연은 무엇입니까……?”

“슬픈 사연이요……?”

엘리자베스는 슬픈 사연까지는 준비한 바가 없는 터라 곤란한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애초에 천국에 있는 사람 중 누군가를 골라야 하는 거였구나!

남자는 엘리자베스에게 대답을 유도하려고 계속 노력하다가 엘리자베스가 계속 곤란한 얼굴로 눈알만 굴리고 있자 답답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은 분이 여자입니까? 남자? 아니면 나이가 많은 분? 어린 분?”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또 망설이다가 남자의 표정이 험악해 보이는 것을 보며 대충 대답했다.

“나, 남자요.”

“남자요. 아, 알 것 같습니다. 알 것 같아요.”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계 근처에서 이상한 손짓을 해보이며 눈을 감았다. 남자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당신의 형제로군요. 어릴 적에 열병을 앓다 죽은 거예요. 그렇죠?”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대충 대답했다.

“어…… 네! 맞아요.”

“젊은 남자……. 열병으로 죽은…… 갑작스러운 이별이었겠군요. 배신감마저 들었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말에서 ‘배신감’이라는 단어에 잠시 마음이 머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배신한 남자는 한 사람뿐이었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떠올리며 흐린 얼굴을 하고 있자니 남자가 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남자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이제 그 사람이 당신의 곁으로 돌아올 겁니다. 아가씨.”

아가씨? 방금 전까지 아저씨라고 하지 않았나?

엘리자베스가 남자를 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남자는 검은 방에서 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방은 그대로였지만 남자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기계와 자신만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튼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고 싶은 말은 크게 소리 내어 말하면 됩니다.”

하고 싶은 말?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기계를 노려보았다. 그때 딸깍,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기계가 지지직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오싹한 느낌에 어깨를 움츠렸다.

“……어…….”

소리가 흘러나온다.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불안함, 그리고 떨림이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그 감정에 서서히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왜? 케이는 죽은 사람도 아니고 죽었다고 해도…….

천국에 있지도 않을 텐데.

“보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지지직거려 제대로 들리지 않던 기계 속 목소리가 제대로 된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숨을 멈췄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엘리자베스의 귀에 들리는 것은 케이의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굳어진 채로 목소리 중간 중간의 지직거림 사이에서 수많은 감정을 읽었다. 그리움. 슬픔. 절망. 고통.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잠시 잊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빌어먹을 박람회장에 있었는데, 분명 몰지각한 사기꾼들이 대중을 속여먹고, 자본가들은 귀족에게 속아주는 척하면서 귀족을 이용하고, 귀족은 국왕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피를 빨아먹으려고 하는 빌어먹을 지상에 있었는데…….

저 목소리와 함께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천국에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천국에서 지상에 있는 케이와 대화하는 순간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죽었고 케이는 살아 있었다. 남자가 보여주고자 한 환상은 그 반대였겠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냥 그런 상상을 했다. 그것이 엘리자베스의 미래였으니까. 희망적인 미래. 어쩌면 이 환상으로 인해 엘리자베스가 박람회장을 걸어 나가서도 희망에 찰 수도 있었으니까.

아, 죽고 나서 어떤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구나. 그곳도 이곳과 완전히 떨어진 곳은 아니구나. 그렇다면 용기 있게 죽어야겠구나.

그때, 기계에서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내 사랑…… 내 사랑…….”

엘리자베스는 벌떡 일어나서 기계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다…… 당신…….”

엘리자베스는 기계 뒤에 있는 커튼을 잡아당겼다. 커튼 뒤에는 그녀를 이곳으로 끌고 온 남자와 또 다른 한 명이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분노한 얼굴로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그러자 남자가 종이인형처럼 엘리자베스의 손아귀에 끌려왔다. 엘리자베스가 남자에게 침을 튀겨가며 소리를 질렀다.

“감히……! 감히……! 사람들의 간절함을 이용해?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엘리자베스는 두 번째 문장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케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저건 그저 어떤 젊은 남자의 목소리를 굉장히 흐리게 만든 조잡한 술수에 불과했다.

아마도 이 학회의 인간들은 엘리자베스가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면 준비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틀었을 것이고,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면 늙은 남자의 목소리를 틀었을 것이다. 저 기계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천상의 목소리로 둔갑시키는 것은 저 기계의 신비로운 힘이나 믿음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간절함이었다.

보고 싶다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남은 삶 중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는.

이놈들은 감히 그 마음을 이용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를 말리려던 옆에 있던 남자는 엘리자베스가 엄청난 힘으로 남자를 들어올리기 시작하자 바들바들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제 손에 잡힌 남자의 얼굴이 새하얘지는 것을 보며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뒤로 물러난 남자가 엘리자베스에게 싹싹 빌었다. 그녀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에서 힘을 뺐다. 엘리자베스에게 멱살을 잡혔던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켈록켈록 기침을 했다. 싹싹 빌던 남자는 동료가 풀려나자 태도를 바꾸어 그녀에게 삿대질을 했다.

“미, 미친 새끼 뭐, 뭐하는 짓이야! 이, 이건 진짜 천국을 보여주는 기계라고……!”

엘리자베스는 그자를 노려보다가 뒤를 돌았다. 그러자 기침을 하던 남자가 엘리자베스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돈은 내고 가야지!”

엘리자베스는 머플러를 풀어헤쳤다. 남자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드러나자 미간을 찌푸렸다.

“다, 당신은……?”

“내가 돈을 안 냈다고 신고하고 싶으면 맘대로 해. 나는 왕자 전하께 지금 당장 가서 이 부스를 없애달라고 할 거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그 말에 남자들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고, 공녀님……!”

엘리자베스는 물론 조지 왕자에게 가서 이 부스를 없애달라고 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척했다. 다행히 그건 저들에게 통한 것 같았다.

“저희가 속이려고 한 게 아니라요…….”

“저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한 겁니다! 천국이 있다는 희망! 국민들에게 천국의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하는 어떤 취지로…….”

그건 마치 저들이 축음기를 통해 내보낸 혼탁한 목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듣는 사람의 욕망에 따라 가짜도 진짜로 만들어지는 혼탁한 목소리.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국민들? 당신들은 국민들에게 어떤 희망도 줄 수 없어. 희망은 이런 사기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당장 부스를 철수하고 도망이라도 가는 게 나을 걸세. 내가 왕자님께 이 부스에 대해 말씀드리면 로열 박람회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당신들의 목이 시가지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솔튼 빌리스나, 윌리엄 조쉬 같은 귀족도 목이 걸리는 세상이 아닌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들이 바들바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사죄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커튼 밖으로 나왔다. 환한 빛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부스를 나오기가 무섭게 제 눈에 띈 한 거구의 사내를 보았다.

그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남자가 아까와 같은 환각이 아닌가 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남자에게 걸어갔다. 그때 남자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케이는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가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어.”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마치 조금 전 엘리자베스가 축음기를 통해 들었던 것처럼 갈라진 케이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다급함, 조급함, 슬픔, 고통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품 안에 안았다. 마치 엘리자베스가 곧 사라질 환각처럼 느껴진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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