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10화
“자, 자, 싸다 싸! 단돈 30페니면 남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약이 당신의 손에!”
“제가……. 돌아가신 할머니와 바로 이 기계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살아생전에 참으로 손주를 아끼시던 분이었는데요. 지금은 천국에 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말씀하신 천국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천국이 있는지, 아직도 헷갈리십니까? 그러시다면 단돈 25페니에 상담부터 시작하시죠.”
“아직 결혼 못한 노처녀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가슴과 엉덩이 크기를…….”
“우린 30페니가 아니라 25페니입니다! 죽은 사람과 대화해보고 싶지 않으…….”
엘리자베스는 짐을 정리하며 두 부스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유사과학에 질린 표정으로 케빈을 보았다. 케빈이라고 들려오는 말을 안 들을 재주는 없는 듯 헛기침을 하며 짐을 정리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경쟁이 붙은 듯 목소리를 높여 가는 두 부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슬그머니 케빈의 옆으로 다가갔다.
“심령과학회, 부인약학회, 둘 다 정말 있는 학회야?”
“뭐…… 있다면 있는 거겠죠? 왕립학술원 소속 학회는 아니지만 사립학술원들이 왕왕 있잖아요. 그런데 소속이겠죠. 그런 데는 돈만 있으면…….”
케빈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듯 째려보는 부인약학회 부스 안 신사의 눈빛을 받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다 되니까. 둘 다 돈은 잔뜩 벌게 생겼는데요? 루이 교수님도 괜히 뻗대다가 저온살균에 관한 고찰이니 뭐니 하는 제목으로 부스 제목 써 붙였으면 사람 하나도 못 끌었어요. 그나마 신선하고 맛있게 우유를 보관하는 법이 제일 낫다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웃음을 참고 부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2층 난간에 기대어 3층이 보이는지 올려다봤다. 잘 보이지 않았다. 보였다면 루이 교수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유 시음대 앞에 서 있는 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1층을 바라보았다. 1층 중앙에는 네모난 무대가 있었다. 무대 사방을 몇 십 명 정도의 보비와 군인이 지키고 서 있었다. 무대에서 입구 쪽으로는 의자가 나열되어 있고 그 옆으로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다. 빨간 카펫 옆에는 귀족들이 부채를 부치며, 톱햇을 만지작거리고 서 있었다.
조지 왕자가 축사를 할 장소인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평민과 자본가들은 2층, 3층 난간에 붙어서, 귀족들은 저 의자에 앉아서 축사를 듣는 구조였다. 엘리자베스는 투명한 유리로 된 외벽에 둘러싸인 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축사를 할 조지 왕자가 위태롭다고 여겼다.
그건 꼭 저격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너무 투명한 것들은 때로 사람들의 불편을 일으켰다. 적당한 거짓말이 감춰주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고 듣는 사람 내부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순간, 투명함은 분노를 일으켰다.
엘리자베스는 햇살이 여기저기 모여서 쨍한 무지갯빛을 발사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1층을 보았다. 수많은 인파와 짐들이 밀려들어왔지만 그 무엇도 들어오고 나서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 1층에서 시선을 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려 2층에 설치된 부스에 적힌 이름들을 살펴보았다.
켜켜이 쌓이기만 하는 수많은 가짜들. 조지 왕자의 투명함을 감싸고 있는 것은 이것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심령과학회나 부인약학회 같은 제목은 우습지도 않을 학회의 간판들을 바라보았다.
루이 교수님의 말이 생각났다. 과학을 팔아먹는 것, 그것이 과학자가 앞으로 살아갈 길이라는 것. 하지만 그렇게 계속 과학을 팔아먹다보면 어느 날엔가 엘우드 밀에게 벌어진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미 벌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엘우드 밀과 디트리히 폰의 비극을 먼 세계의 일인 양 치부했던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지금 엘리자베스는 몰록에게 물려 이지를 상실해가는 과정 중에 있었다. 이 엄청난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린다니.
크나큰 진실은 때로 인생이라는 바쁜 축제에 밀려 뒷전이 되곤 한다.
마치 지금 이 위태로운 행사처럼.
엘리자베스는 이 모든 사람들이 거대한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보였다.
특히나 조지 왕자.
엘리자베스는 무대 아래쪽으로 귀족들 몇에게 둘러싸여 걸어들어 오기 시작한 조지 왕자를 내려다보았다. 조지 왕자는 여유로운 미소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멀리서 봐도 조지 왕자에게 질척거리는 귀족들이 똑똑히 보였다. 니콜슨 공작과 조지 왕자의 힘이 팽팽해 보였던 때, 니콜슨 공작의 편을 들었던 귀족들은 조지 왕자의 승기가 확실해진 지금 그의 눈에 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조지는 끊임없이 말을 거는 귀족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무대 앞 의자 1열에 앉아 있는 외교관들에게로 걸어갔다. 조지는 그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누며 지나갔는데 맨 끄트머리에는 멜니아의 모건이 앉아 있었다. 모건은 엘리자베스에게도 익숙한 한 여자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챙이 얇은 빨간 벨벳 라운드 햇을 쓰고 머리를 멜니아식으로 올려붙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살짝 주변을 살피다가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붉은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앰버.”
엘리자베스는 오늘 이 자리에 앰버가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그것도 귀족들의 자리에.
앰버는 단연 눈에 띌 것이다. 조지 왕자는 케이와 엘리자베스가 재결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요구를 해왔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후원을 받아 이 자리에 있었다. 벌써부터 귀족들이 무슨 말을 떠들어 댈지 그려졌다.
케이 하커가 복권을 앞둔 공녀를 다시 되찾기 위해 앰버 모건을 버렸다.
그 뒤에 앰버 모건이 켄터베리 홀의 가수로 일했던 것에 대한 군소리가 덧붙여지고 엘리자베스가 지금 왕립학술원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것에 대한 헛소리도 더해질 것이다.
여자는 가수로 일해도, 과학을 연구해도, 남자에게 선택을 받아도, 선택을 받지 못해도, 모욕이 되는 세상.
엘리자베스는 그 세상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는 앰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뒤에서 케빈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시 부스로 돌아갔다.
“엘리즈! 나 짐마차를 받으러 가봐야겠어요! 이제 짐이 올 시간이 다 됐어요!”
* * *
“천국의 존재를 알고 싶으십니까? 여기에 천국에 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가슴이 탱탱해져요! 남편의 정부보다 큰 가슴을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심령과학회와 부인약학회의 목청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사람들은 철가루가 자석에 이끌리는 모양새로 죽은 부인의 목소리를 듣거나 가슴이 커지는 약을 사기 위해 양 옆의 부스로 사라졌고 엘리자베스와 케빈이 지키고 있는 토닉워터 부스로는 오지 않았다.
“건강음료입니다! 이 안에 정말로 약이 들어 있어요!”
“천구우우우욱!”
“가스으으으으음!”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질러봤지만 심령과학회와 부인약학회 과학자들은 이제 천국, 가슴 이런 단어만 외치는데도 그들의 목소리가 더 컸다. 사람들은 그 간단한 단어에도 홀린 듯 그쪽으로 향해갔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도무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것인지 사람들이 건강음료 따위엔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무도 엘리자베스와 케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부스를 방문해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기자들은 있었지만.
“건강음료 드셔보시겠어요?”
어쩌다 부스에 다가오는 신사가 있어 눈이 초롱초롱해진 엘리자베스가 토닉워터를 내밀면 백중 백 이런 질문이 돌아왔다.
“이번에 정말 복권되시는 겁니까? 조지 왕자님과 식사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국왕 폐하와 왕자 전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항간의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
“……병 돌려주세요.”
“네?”
“돌려달라고요!”
이 짓을 몇 번 하자 이제는 기자마저도 부스에 찾아오질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처음에는 어떻게든 두 부스의 목소리를 이겨보려고 했지만 한 시간쯤 버틴 후 포기하고 의자에 앉았다.
엘리자베스가 의자에 막 앉자 입구에서 짐을 받아가지고 온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좌절한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엥? 뭐 해요?”
“천구우우욱!”
“가스으으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 부스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케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케빈은 심령과학회와 부인약학회 부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선 심령과학회 부스의 절반은 검은 천으로 가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밖에 줄을 서 있었다. 검은 천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얼굴이 눈물로 온통 젖은 채 밖으로 나왔다. 특히 한 남자는 자신이 정말로 죽은 부인과 대화를 했다며 사람들에게 증언을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지폐를 내밀며 자신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아우성쳤다.
부인약학회 부스의 벽면은 내용물을 알 수 없는 갈색 병이 온통 채우고 있었다. 부스 중앙에는 간이 무대가 있었는데, 가슴이 커다란 한 여자가 서서 거기 서서 지나다니는 구경꾼들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귀부인들은 그 앞에서 부채를 마구 부치면서 여자를 노려보다가 하얀 가운을 입은 가 은밀하게 다가가면 갈색 병을 열 병, 스무 병씩 챙겼다.
“……젠장. 우린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아.”
엘리자베스가 욕설을 내뱉자 케빈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유령하고 대화를 하긴 하는 거예요? 가슴이 커지긴 하는 거고?”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케빈을 노려보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뭐가 중요한데요? 아니 과학자한테는 일단 성과가 중요한 거 아니에요?”
“성과는 과학적 성취에서 오는 게 아니야. 돈에서 오는 거지. 돈은 사람들에게서 오고.”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때마침 짐을 들고 오던 미리엄과 눈을 마주쳤다. 미리엄은 엘리자베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뒤로 흠칫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에게 손짓했다.
“이리와요.”
미리엄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 저요?”
“네.”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미리엄은 헛기침을 하며 책상에 토닉워터 상자를 내려놓고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왔다.
엘리자베스가 미리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옷 벗어요.”
“……?”
* * *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재킷과 스카프, 그리고 모자를 벗겨내 입었다. 그렇게 얼굴을 반쯤은 가리고 박람회장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문제점을 파악하려면 일단 자료조사부터 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우선 방문한 곳은 4층이었다. 식품, 의약, 약학 등이 즐비한 2, 3층과 4층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4층엔 웬 기계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작은 공장이 모여 있는 것처럼 증기를 뿜어대는 기계들이 한쪽 벽면에 즐비해 있었고 부유해 보이는 사업가들이 그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혁신적인, 생산성을 높이는,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수많은 부스들 사이에서 엘리자베스는 어지러워졌다.
2, 3층에서 보았던 과학과 4층에서 보여주는 기술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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