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09화
크리스털 궁전에 도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마차들이 정박한 배들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길을 뚫고 구경꾼들과 그 구경꾼들에게 장사를 하거나 구걸하러 모인 부랑자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와 도무지 지나가지지 않을 것 같은 골목에서는 우회해서 돌았다.
작은 뒷골목에는 집시들이 많았다. 집시들은 자기들끼리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그들은 춤을 추며 엘리자베스와 케빈, 엘우드 밀의 바지춤과 허리로 손을 왔다 갔다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럴 때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케빈의 약병만 꽉 쥐었다. 뭐, 그것 외에는 딱히 지키고 싶은 게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크리스털 궁전을 처음 보았다.
천장은 물론이고 외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었다. 크리스털 궁전의 둘레를 이오페아 대륙 17개국의 국기가 그려진 깃발이 쭉 둘러 서 있었다. 거대한 깃발은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냄새가 엘리자베스의 코를 찔렀다. 구경꾼들이 수없이 모인 광경을 찍으려고 기자가 삼발이를 놓고 사진 플래시를 터트렸다. 어린 소년들은 저마다 신문을 팔거나 구두를 닦으려고 혈안이 되어 어른들 틈을 파고들었다. 그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태양이 작열했다.
“신문 하나 살까요?”
케빈이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은 어린 소년을 불러 신문 한 부를 달라고 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케빈의 표정이 이상했다. 케빈은 황당한 표정으로 온 길을 돌아보았다.
“내 돈!”
그걸 본 엘우드 밀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너 아까 털렸어.”
“봤으면서 왜 말 안 했어요?”
케빈이 엘우드 밀을 째려보자 엘우드 밀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안 털렸으니까? 옛다. 신문 한 부 줘라.”
엘우드 밀은 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신문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신문 1면을 장식한 조지 왕자와 각국 외교관들의 단체 사진을 보았다. 그들은 크리스털 궁전 앞에서 무척이나 근엄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조지 왕자는 배를 덮는 신사용 바지에 목 끝까지 단정하게 잠근 단추, 그 위에 짧은 재킷을 입었는데 그 위에 화려한 견장을 더하거나 배지를 다는 대신에 그저 높은 톱햇만을 착용했다. 그 탓에 조지 왕자는 외교관들은 물론이요, 레본에 들어와 있는 모건이라는 멜니아의 대통령 후보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새로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조지 왕자의 의복은 눈에 띄었다. 외교 행사마다 화려한 옷에 화려한 장신구를 더해 스스로의 위치를 강조하던 레트니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주변의 구경꾼들 역시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는 신문의 것과 똑같은 사진이 박힌 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들 조지 왕자가 평민들의 왕이라고 인지하기 시작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이 곧 엘리자베스에게 돌아오는 데에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신문의 1면을 넘겨 2, 3면을 펼쳤을 때였다. 그녀는 거기에 대서특필된 퀴닌에 관련한 기사를 보았다. 퀴닌에 관련된 기사였지만 이번에는 생뚱맞게도 레본의 서부 항구 사진이 실려 있었다.
[퀴닌, 무역시대의 새 장을 열다?]
세 사람은 인파를 뚫고 지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신문을 훑듯이 읽어내려 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레본의 신시무역주식회사가 성공한 이유가 장기간의 항해와 그 이후의 오랜 체류 동안 이국땅의 풍토병인 열대성 학질을 견디게 해줄 치료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치료제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 레본의 항구는 엄청난 호황을 이룰 거라는 것이었다.
“공녀님……?”
그때, 엘리자베스를 알아보고 말을 거는 신사가 하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는 얼굴인가 하여 고개를 꾸벅였는데 신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퀴닌의 발명가라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씨 맞죠? 저희 신문사랑 인터뷰를 좀…….”
엘리자베스는 신사의 능글맞은 인사가 사실은 취재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엘리자베스에게 신사가 알은척을 하자 주변에 있던 노동자, 협잡꾼, 신문을 파는 소년, 귀부인들 모두 엘리자베스 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제일 먼저 엘리자베스의 바지에 머물렀다.
“어머, 저 여자가 공녀야? 그런데 웬 바지를…….”
“캬악, 퉤! 재수 없게 어딜 여자가 바지를 입고 다녀?”
“봤어요? 어제 신문에 과학을 배운 여자는 몸에 이상이 생기기가 쉽다고…….”
그러곤 곧 그들의 시선은 엘리자베스의 질끈 묶은 금발머리로 가서 닿았다.
“이번에 복권될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아이고 불쌍해라. 저 여린 아가씨가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었다니.”
“그래도…… 사실 클레몬트 공작부부가 반역자인지 아닌지 밝혀지지도 않았으니까…….”
종래에 그들의 시선은 엘리자베스의 목에 걸린 금테 장식을 두른 안경, 단추가 두세 개쯤 풀린 셔츠를 거쳐 엘리자베스의 초롱초롱한 푸른 눈으로 가서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보는 둥 마는 둥 듣는 둥 마는 둥 걸어가다 점점 가까워지는 크리스털 궁을 넋 놓고 바라보며 말했다.
“떠, 떨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가 케빈의 웃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왜?”
엘리자베스가 퉁명스럽게 묻자 케빈이 말했다.
“은근히 남 얘기를 흘려듣는 경향이 있어요.”
“뭔 소리야?”
“그래서 엘리즈가 좋다는 소리예요.”
케빈은 그렇게 말하더니 엘리자베스를 향해 웃었다. 엘리자베스도 케빈을 보며 웃었다.
그녀를 힐끔거리던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이 살짝 휘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아까까지 하던 말을 잠시 잊은 듯 조용해졌다. 그들은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에 들어오는 빛을 막아주는 부드러운 속눈썹의 파들거림, 엘리자베스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도무지 일반인은 알아듣기 힘든 과학 용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즐거운 듯 씰룩거리는 콧잔등을 바라보며 어느새 그녀가 공녀인지, 평민인지, 여자인지, 과학자인지 따위의 토론은 저 뒤로 하고 넋 놓고 엘리자베스를 구경했다.
엘리자베스는 걸어가는 내내 케빈과 엘우드 밀과 함께 오늘 있을 박람회에서 발표할 대본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하늘 위에 떠다니는 열기구와 크리스털 궁전 내부로 들어가는 신비로운 기계들, 그리고 귀로는 자신의 귀에 생소한 선더렌어 따위를 보고 들었다.
로열 박람회는 레트니가 레본의 과학 기술을 온 이오페아 대륙에 자랑하기 위해 만든 행사였다. 몇 년 전 로열 박람회를 개최하기 시작한 후 이오페아 대륙 내에서 레본의 외교적, 경제적 입지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레본의 사업에 돈을 대겠다는 선더렌 사람, 멜니아 사람이 늘어 레본에서 외국인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 많은 외국인들이 레본의 과학기술을 사가기 위해 온 것인지 훔쳐가기 위해 온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외국인들이 어색한 발음으로 레본어를 하거나 선더렌어를 하며 지나갈 때마다 숨을 죽이고 있다가 그들이 지나가자 케빈에게 말했다.
“외국인이 정말 많아.”
“당연하죠. 어떤 부스에서는 아예 선더렌어로 발표 대본을 하나 짜놓기도 하던데. 우리도 그랬어야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케빈이 대답하는 사이에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신문을 건네받은 엘우드 밀은 신문에 코를 박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갸흐통 외교관은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네. 그래서 저 깃발들 중에 갸흐통 깃발만 없대.”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에 크리스털 궁전 주변을 뺑 둘러 있는 깃발의 개수를 세었다. 17개인 줄 알았던 깃발은 16개였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을 보며 그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구요.”
“아니. 나는…… 난 그런 게 아니고…….”
엘우드 밀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케빈이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열기구를 가리키며 짐짓 밝게 말했다.
“와! 저게 무려 3시간을 날아다닐 수 있대요. 3시간!”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3시간 뒤에 어떻게 돼?”
“3시간이 되기 전에 땅으로 내려오게 한다는데요? 그리고 다시 연료를 채우나 봐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하늘 위를 둥둥 떠 있는 무지개 색 열기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결국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구나…… 엘리자베스는 묘한 기분으로 파란 하늘과 대조되는 열기구를 관조했다.
그때 엘우드 밀이 말했다.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엔 창대한 비행기가 나온다고.”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려 엘우드 밀을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어? 내가 뭘. 내가 뭐라고 했어?”
“방금 분명…….”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코앞에 바퀴가 달린 수레가 세 사람을 거의 칠 것 같은 기세로 달려왔다.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 끌며 벌써 그들을 스쳐 지나가버린 수레에 대고 욕을 했다. 하지만 곧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는 것을 깨닫더니 화들짝 놀라 손을 떼며 말했다.
“올라가요. 우리 부스는 2층이에요. 의학, 약학 동에 있을 거예요. 우유 저장법은 3층이고요. 우리 헤어져야 해요.”
케빈의 말에 엘우드 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엉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 듯 3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따로 있었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와 케빈에게 인사를 하고 그 쪽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며 엘우드 밀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비행기라고?
비행선이 아니라?
비행선이란 많은 과학자들이 꿈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배를 말했다. 그걸 실현하기 위해 만든 것 중 하나가 열기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행기라니.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소한 단어는 처음 들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엔 이상한 환영 하나가 떠올랐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비행선. 그건 케이가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떠올렸던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유리로 된 천장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 세계에 전쟁이 오는 걸까? 전쟁이 온다면 대체 왜 오는 걸까. 무슨 이유로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망치지 못해 안달인 걸까?
엘리자베스는 의아했다.
하지만 케빈과 함께 2층에 도착하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그런 궁금증은 싹 날아갔다.
“이…… 이게 뭐야……?”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부스 양 옆을 바라보며 케빈에게 말했다. 그러나 케빈도 적잖이 당황한 눈으로 양옆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의 왼쪽 부스와 오른쪽 부스에는 각각 이렇게 쓰여 있었다.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법: 심령과학회]
[가슴이 커지는 약: 부인약학회]
“씨발…….”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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