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08화
엘리자베스가 일어났을 때는 케이는 이미 침대에서 사라진 뒤였다.
엘리자베스는 침구를 정리하고 사무실에 있는 자료들을 챙겨 나와 철제 계단을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온 그녀가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케빈이었다.
케빈은 평소보다도 더 밝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굴었다.
“어제 개고생 했다면서요? 나도 어제 일이 너무 많아서 도와주러 못 왔어요.”
“괜찮아. 어찌어찌 해결됐어. 케이가 많이 도와줬고.”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목소리가 너무 밝아서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아 다행이다. 하하, 걱정 진짜 많이 했어요, 엘리즈. 많이 피곤해요? 물 줄까요?”
“아, 아니…….”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다정함이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쪽에서 병을 세고 있는 엘우드 밀이 보였다. 엘우드는 다 센 토닉워터 병을 옮기려다가 휘청거렸다.
“선생님은 어젯밤에 왜 오신 거야?”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걱정돼서 온 거죠. 뭐. 교수님이 가보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것보다 박람회에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물량은 천천히 옮겨야 될 것 같아요. 9시 개장이긴 해도 10시, 11시쯤부터 사람들이 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크리스털 궁전 앞은 길이 완전히 막혔대요. 앞에 보낸 짐마차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나 봐요. 우린 걸어서 지금 출발해야 될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람회가 성공적인 모양이네.”
“뭐 그렇다기보다는……. 조지 왕자가 박람회 축사를 하니까 거기에 마지막으로 얼굴 도장을 찍고 다시 내려가려는 귀족들이 많은 모양인데……. 귀족들이 우리 계약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퀴닌 개발 자체를 썩 탐탁지 않게 보는 인간들인데.”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래에서 토닉워터는 펍에서 팔리는 음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귀족 부인과 아가씨들이 잠자리에서 꼭 섭취하는 음료이기도 했다. ‘퀴닌이 들어가 말라리아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대체 어느 새인지 몰라도 ‘토닉워터가 전반적인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말로 바뀌면서 절대적으로 운동량이 부족한 귀족 아가씨들이나 부인들이 건강 증진 음료쯤으로 여기고 매일 한 잔씩 섭취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무렵의 토닉워터는 귀족, 평민 가리지 않는 말 그대로 ‘대중적’인 음료였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고객은 고객이야, 케빈.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시음은 할 수 있게 해야지. 빼두기로 한 물량도 어떻게든 빨리 가지고 오라고해.”
“네. 네.”
케빈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그때 상자를 들고 사무실 쪽으로 다가오던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와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어젯밤 엘우드 밀을 자신이 강물로 떠밀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심지어 엘우드 밀은 실제로 어젯밤에 강물에 빠졌다가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빛이 안 좋았다. 엘리자베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표정이 별로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엘우드 밀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케빈과 눈을 마주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안 좋은 일도 없고 오히려 좋은 일만…….”
“좋은 일이요?”
엘리자베스가 의아하게 묻자 갑자기 케빈이 끼어들었다. 케빈은 엘우드 밀의 상자를 넘겨받으며 밝게 말했다.
“아, 삼촌, 삼촌. 우리 빨리 짐 싣고 같이 크리스털 궁전으로 가야죠?”
케빈은 턱짓으로 공장 밖을 가리켰다. 엘우드 밀은 끙 소리를 내며 마지못해 케빈을 따라갔다. 엘리자베스도 그 뒤를 따랐다. 엘우드 밀은 케빈에게 붙들리다시피 짐마차까지 걸어갔다. 케빈이 짐을 싣는 것을 바라보며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넌 여기서 잤냐?”
엘우드 밀이 사무실을 가리키며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러고 보니 케이는 어디에 갔을까?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찾는 것 같자 엘우드 밀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그 양반도 여기서 잔 것 같더라. 케이 하커 씨는 먼저 박람회장으로 갔어. 박람회장에 인파가 장난이 아니던데…….”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박람회장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먼저 가버렸다니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요 며칠간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옆에 딱 붙어 있었기 때문일까? 당연히 박람회장에서도 그럴 줄 알았는데 먼저 가버린 것을 알게 되니 헛헛한 기분이 몰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제 입술에 닿았던 거칠거칠한 케이의 입술을, 헝클어졌던 머리카락의 감촉을, 짙은 눈썹이 닿을 때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을 떠올렸다.
“보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듣고 엘우드 밀이 그녀를 보았다.
“누가.”
엘우드 밀이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을 보며 쓰게 웃었다.
“누구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엘우드 밀의 눈이 흐려졌다. 엘우드 밀이 입을 열었다.
“이봐…….”
그때였다. 공장 출입문 앞에 서서 엘우드 밀이 말하는 것을 힐끔힐끔 주시하던 케빈이 재빠르게 말했다.
“가죠.”
엘우드 밀은 케빈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공장 입구로 갔다. 케빈은 엘우드 밀의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뭔가를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의 친밀해 보이는 모습을 약간 의아하게 여기며 뒤를 따랐다.
공장 밖으로 나오자 강렬한 빛이 엘리자베스에게 쏟아졌다. 엘리자베스는 공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노동자들이 퀭해진 얼굴로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미리엄이 후다닥 엘리자베스 쪽으로 뛰어왔다. 미리엄은 엘우드 밀을 보며 말했다.
“어제 봤던 그분…….”
“아 예.”
엘우드 밀은 고개를 숙이곤 케빈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미리엄이 엘리자베스에게 품 안에서 말라비틀어진 빵을 하나 내밀었다.
“이거요. 아침에 배식으로 나온 건데 사무실에서 둘이 너무 곤히 자고 있길래 못 줬어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미리엄을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빵을 받아들어 조금 떼서 입안에 넣었다. 퍽퍽하기 그지없는 빵이라 금방 목이 말랐다.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말했다.
“맛이 없어요, 미리엄.”
엘리자베스의 말에 미리엄이 킥킥 웃었다.
“우리도 맛없는 거 알아요. 그냥 먹는 거죠. 그래도 가끔 스튜에 적셔 먹거나 베이크드빈즈를 발라먹으면 먹을 만도 해요.”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에 같이 킥킥거렸다. 엘리자베스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내가 꼭 잘 팔고 올게요. 토닉워터도, 퀴닌도, 우유도.”
엘리자베스의 말에 미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슈. 모두들 기대가 많아요. 다음 달부터는 우리 공장도 돈 좀 만지는 거냐구요. 지금도 프란시스 부인이 임금을 충분히 주시지만……. 부인은 막상 얼마 못 가져가시잖아요. 다들 그걸 불안해한다구요.”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토닉워터로 돈을 좀 만지면 앞으로도 계속 같이 갈 수 있을 거예요.”
미리엄은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아니고…… 우리가 잘릴 까 봐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신의 가루를 만드는 공장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하는 거요. 학질 치료제를 만드는 곳은 우리 공장밖에 없잖아요. 이런 적자를 감당하고 운영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아직 퀴닌은 부족한데, 이마저도 없어지면 결국 또 제자리 아닙니까…….”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미리엄의 뒤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미리엄이 말을 이었다.
“나는 직접 앓기도 했지만 학질에 걸려 친구나 가족을 잃은 놈들이 많아요. 특히나 수도원이나 수녀원, 선교사의 집에서 빵을 빌어먹고 나왔다가 죽은 놈들이죠. 우리 중에서도 많이 힘든 놈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이 공장에서 일하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이 임금의 8할만 주더라도 다닐 생각이 있다고 난리요. 뭐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네, 그럼요. 임금이 인하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그녀에게 눈 한번 마주치는 일 없는 공장노동자들이 갑자기 자신의 친구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전부 케이의 친구들일 뿐만 아니라 경찰청 앞에서, 컬로든 궁전 앞에서, 의회 청사 앞에서, 자유를 외쳤던 자들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목에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 탓에 잠시 잊고 있었던 그 당시의 함성소리를 떠올렸다.
자유를 달라. 신의 가루를 인간에게 달라. 여자에게도, 평민에게도 참정권을 달라.
엘리자베스는 그 모든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았다.
‘같이 살자.’
우리 같이 살아보자.
엘리자베스는 땀을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숨소리에서 그 말을 환청처럼 들었다. 이제 정말이지 엘리자베스에게 남은 시간은 2개월뿐이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죽음 앞에서 오히려 강렬한 삶의 의지를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자꾸 벅차오는 마음으로 미리엄에게 말했다.
“내가 2,000병 전부 팔아먹고 올게요. 꼭이요, 미리엄. 꼭.”
미리엄은 그 말을 듣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꼭 그러슈. 아 진짜 우리도 이제 적자 걱정 좀 그만 합시다!”
미리엄은 그렇게 말하더니 등 뒤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그들이 전부 엘리자베스 쪽을 보았다.
“어이, 다들 여기 좀 봐. 작은 공장장님 가신다. 인사해!”
그 말에 상의를 탈의하거나 내의만 입거나 그것도 아니면 작업복을 허리춤에 묶은 노동자들이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갔다 와요!”
“많이 팔아먹고 오라고!”
“일감 좀 가져와요!”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미리엄을 보았다.
“작은 공장장님이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미리엄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끼리 그냥 부르는 호칭이에요. 프란시스 부인은 큰 공장장님, 엘리자베스는 작은 공장장님. 딱 떨어지잖아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미리엄의 어깨를 한 번 때려주고 미리엄에게 인사한 뒤 공장 대문을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일자로 쭉 뻗은 로킨트 스트리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케이 하커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내려다보았던 바로 그곳.
나의 요란하고 대단한 구원자가 걸어오길 바랐던 바로 그곳.
엘리자베스는 그곳을 뛰듯이 걸어 금방 케빈과 엘우드 밀이 앞장서서 걷는 곳으로 접근해갔다.
이제부터는 엘리자베스의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엘리자베스, 오직 자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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