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07화
왜 눈물이 나는 거야.
그냥 한 말이었는데. 진심이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거짓말이었는데.
여느 때처럼 그저…… 널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올라서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같이…… 같이 살 수 없잖아.
나는 죽을 거고, 너는 살 거니까.
내가 없는 세상에서 너는 살아갈 거니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었다. 엘리자베스의 눈물이 케이의 입술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엘리자베스의 시야가 맑아지면서 케이의 얼굴이 보였다. 케이의 눈이 새빨갰다. 케이가 말했다.
“약속 지켜. 같이 살자는 말. 꼭 지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잠시 멍하니 케이를 바라보았다.
같이 살자는 말을 지키라고?
케이에게 다시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철제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 말을 멈추었다. 케이는 문이 열리기 전에 일어나서 제가 먼저 문을 열었다. 거기엔 미리엄이 서 있었다.
“케이. 엘우드 밀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벌떡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미리엄은 조금 당황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가 얼른 말했다.
“내가 나가볼게. 아마 우유 확인하러 왔을 거야.”
“아니. 그런 거면 내가 갈게. 잠깐 있어. 그런 눈으로 나갔다간 다들 놀랄 거야. 눈이라도 잠깐 붙여.”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괜찮다고 하려다가 유리창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고 관뒀다. 케이의 말대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유리창에 비치는 거무죽죽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저 멀리 서 있는 엘우드 밀을 보았다. 엘우드 밀은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거리다가 철제 계단으로 내려오는 케이를 보더니 다급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도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여기며 담요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잠이 부족한데다가 울기까지 했더니 금방 탈력감이 몰려왔다. 엘리자베스는 담요 안에서 눈을 감았다.
잠이 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꿈.
또 꿈이다.
아닌가…… 꿈이 맞나?
엘리자베스는 꿈속에서 엘우드 밀을 보고 있었다. 엘우드 밀의 엘프처럼 신비로운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고통, 슬픔, 회환, 절망, 그리고…….
그리움.
엘리자베스는, 아니, 몰록은 그 감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옆에서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을 가진 조가 소리쳤다.
“선생님! 쏴요! 쏴요!”
조는 울부짖었다. 몰록은 엘우드 밀이 총을 자신에게 겨누는 것을 보았다. 몰록은 엘우드 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납작 엎드렸다. 몰록이 말했다.
‘우린 형제야. 형…….’
엘리자베스의 귓가에는 몰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간사하고 사악한 목소리. 하지만 엘우드 밀에게는 몰록의 목소리가 그저 짐승의 신음소리 정도로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엘우드 밀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몰록은 계속해서 낑낑거리며 엘우드 밀의 발밑을 설설 기었다. 조가 흐느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쏘시라구요…….”
엘우드 밀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방아쇠에 댄 손가락에 힘을 주려고 할 때였다. 찰나의 망설임. 잠깐의 호흡. 몰록에게 필요한 것은 그뿐이었다. 몰록은 엘우드 밀의 몸을 황소처럼 치받았다.
“선생니이이이임!”
조가 소리쳤다. 조는 아픈 손가락을 감싸쥐고 엘우드 밀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몰록은 엘우드 밀의 몸을 순식간에 하일 강변까지 끌고 갔다. 강가에 멈춰선 몰록은 조를 바라보았다.
조의 주머니 속에서 뭔가가 찰랑거렸다. 조가 뛰는 통에 주머니가 흔들려 주머니 안에 있던 것이 바깥으로 드러나 몰록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건 초록색 주사기였다.
엘리자베스는 깨달았다.
마지막 남은 치료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엘우드 밀이 아니었다.
조였다.
조에게 마지막 남은 치료제가 두 개 다 있었던 것이다.
엘우드 밀을 하일 강으로 밀어버린 몰록은 검게 찰랑거리는 하일 강을 바라보며 우뚝 멈춰 섰다. 몰록은 제 발 아래에서 자신의 발을 적실 듯이 찰랑거리는 물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움직여 하일 강 유역에 난 오래된 하수도 입구로 향했다. 그 하수도는 하일 강이 범람하여 유량이 최대치에 이르렀을 때에만 쓰는 것인 듯 안이 비쩍 말라 있었다.
몰록은 커다란 몸을 구부려 하수도 안으로 매끈하게 들어갔다. 몰록의 울음소리가 하수도 터널 안을 윙윙 울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울음소리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배가 고파.’
소름이 끼쳤다.
저것이 엘리자베스의 미래였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 사람을 강으로 밀어버린 다음에도 배가 고파 울부짖는 것.
몰록은 허기에 중독된 생명체였다.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몰록의 울음소리가 계속 쟁쟁거렸다. 엘리자베스의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하수도 깊숙이 들어가면서 불빛이 사라진 탓이었다.
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케이가 있었다. 케이의 갈색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는 피에 전 채로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바라보며 겁에 질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자신이 꿈속에서는 몰록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잠시였다. 꿈속이지만 엘리자베스는 몰록의 허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배가 고팠다.
‘배가 고파.’
엘리자베스는 아까 하수도에서 몰록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며 이를 드러냈다.
“크르르르…….”
무시무시한 소리가 엘리자베스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단검이 두렵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너를 먹고 싶다.
팅!
단검은 당연하게도 몰록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를 물었다. 달콤한 피가 엘리자베스의 입안에 퍼져나갔다. 황홀했다. 입안 가득 케이의 냄새가 퍼져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맛보고 있었다. 맛보고 또 맛보고 있었다.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이성이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턱에서 힘을 풀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케이의 몸이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해진 채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탕!
총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떴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을 뜨자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또다시 케이의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엘리자베스가 벌떡 일어나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케이가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달랬다.
“왜 그래? 나야. 나라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소리에도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치료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조.
몰록은 물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 다음 꿈은…….
대체 그 꿈은 뭘까? 왜 자꾸 부서진 의회청사를 배경으로 이상한 꿈을 꾸는 걸까?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케이를 보았다.
“아, 알아. 그냥 악몽을 꿔서……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자 케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악몽?”
케이는 굳은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침대 맡에 앉았다. 케이의 무게 때문에 침대가 케이 쪽으로 기울었다. 엘리자베스는 무릎을 모으고 무릎 사이에 제 얼굴을 묻었다.
“하…….”
엘우드 밀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엘우드 밀의 기억만 되찾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조를 찾아야 한다니.
엘리자베스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손가락 사이로 뭔가 따뜻한 것이 덮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은 채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 와.”
엘리자베스가 망설이자 케이는 오만하게 웃었다.
“악몽을 꾼 여자가 잠시 안긴 것 가지고 오해하는 짓은 하지 않아. 그냥 이리 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물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케이의 목덜미 안에 파고들었다.
케이의 냄새가 났다. 파닥파닥 뛰던 심장이 조금 안정이 되어갔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케이의 냄새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맛있게 마셨던 케이의 피 냄새도 함께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달콤한 너의 냄새. 맛있었던 너의 냄새.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 안에 파고들어서 케이의 걷어진 소매 끝을 바라보았다. 길게 나 있어야 할 케이의 상처가 없었다. 다 나았다고 했었나.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에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케이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몇 시야…….”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꽉 안고 말했다.
“6시. 한 시간만 더 자. 다 끝났어. 지금 밖에서 마지막으로 수량을 체크하고 있어. 엘 선생이랑 케빈이.”
엘 선생…….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엘우드 밀을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게 어색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안은 채로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두 사람은 좁은 침대 안에서 서로의 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엘리자베스는 눈은 감았지만 잠에 들지는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한참 있다가 눈을 뜨고 눈을 감은 케이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손가락으로 케이의 휘어진 코와 짙은 눈썹을 매만졌다.
불행이 휘몰아 닥칠 것 같은 느낌. 밖에서는 내가 알던 세상이 함락 당하고 있는데 깊은 잠에 빠진 너를 깨울 수는 없는 아침.
엘리자베스는 종래에는 케이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입술 사이로 짙은 체향을 묻힌 숨이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거친 입술 끝에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한번 케이의 입술을 훔치고도 부족해 다시 그의 입술을 맛보았다. 제 입술로 케이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케이의 입술에 제 타액이 묻어 번들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곤히 잠에 든 이 사내로 인해 수많은 불행이 휘몰아 닥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수많은 불행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슬픈 눈으로 케이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케이가 깰까 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같이 살자.
2개월 뒤에 내가 죽는다고 해도—
오늘은 그냥 이렇게 같이 살자.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오랫동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케이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도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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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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