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06화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방금 케이가 했던 말을 곱씹을 수 없어졌다. 다급하게 마차에서 내린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뭐가 문제예요? 어제까지는 분명 그 형편없는 수율로도 퀴닌 물량을 맞출 수 있다고…….”
엘리자베스는 케이 역시 마차에서 내리는 소리를 듣고 뒤로 돌았다. 미리엄이 말했다.
“맞아요. 그건 그런데 문제는 퀴닌이 아니고 병이에요. 갑자기 유리 공장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병이 부족해졌어요. 어찌어찌 용기를 구한다고 해도 탄산이 밀폐되는 뚜껑은 또 만들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하네요.”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눈을 마주쳤다.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미리엄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케이가 먼저 말했다.
“그럼 코르크를 쓰는 건?”
“……코르크라……. 이미 시중에 있는 코르크 마개 병을 활용하면 뭐 가능은 하겠네. 근데 물량 맞추려면 그것도 또 코르크 공장에 알아보고 발주 넣고 그 다음에 가지고 와서…….”
미리엄은 아찔한 표정으로 공장 안을 바라보았다.
“다 병에 맞춰서 박고, 라벨을 새로 달아야죠.”
“몇 병이죠?”
“박람회에서 쓸 건 시음용, 증정용 모두 합치면 500병이에요, 아가씨. 근데 원래는 그 자리에서 구매도 할 수 있게 했으니까…… 대충 2,500…… 아니…… 기존에 있던 병으로 대체되는 물량을 빼면 2,000병이죠……? 라벨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돼요.”
엘리자베스는 이마를 손으로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젠장할.
뭐 하나 이렇게 쉽게 되는 일이 없다니.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해? 2,000병이라잖아.”
“그래. 2,000병. 지난 3일 동안 준비했는데도 마련하지 못한 물량이야.”
이제 망했어.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무슨 헛소리야. 겨우 2,000병이야. 오늘 밤을 새면 불가능하지도 않은 물량이라고. 일어나.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업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케이가 말했다.
“업히는 건 죽기보다 싫나 보지.”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2,000병을 어떻게 하루 만에 만들어? 네가 혹시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지금은 오후 2시고 박람회는 내일 오전 9시부터 시작이야.”
“알아.”
케이는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겉옷을 벗어 제 어깨에 걸쳤다. 케이가 미리엄을 보았다.
“코르크 마개 공장에 연락 넣어. 내가 값을 치러줄 테니 물량 있는 거 다 토해내라고 해. 코르크가 괜찮으면 좀 더 팔아줄 수도 있다고. 유리 공장에도 다시 말해봐. 거기 사장이 토니지? 토니한테는 으름장을 놔야 돼. 덩치 큰 놈들 몇이랑 말 잘하는 놈 몇을 데리고 가서 공장 좀 보고 와.”
케이의 말에 미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토니 놈이 그냥 배짱부리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해. 유리 공장에 사고가 좀 있었다나 봐. 남은 물량이 전혀 없다고 난리야. 다른 거래처도 그런 것 같더라고. 하…… 나도 용기 같은 건 잘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케이는 죽는 소리를 하는 미리엄의 등을 토닥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능숙하게 사업을 조정하는 것을 보며 살짝 놀랐다. 엘리자베스가 처음 보는 케이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케이는 사교계 모임에서나 집 안에서나 모든 일에 살짝 뒤로 빠진 채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장에서의 케이는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공장 안으로 들어선 케이가 노동자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하며 상황을 살피는 동안 건물 앞에 서서 케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제는 전과 달리 노동자들의 말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고 이 공장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를 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케이처럼은 말할 수 없었다. 케이처럼 이 상황을 완전히 장악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침착함을 보이기가 힘들었다. 공장에서의 일은 엘리자베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한참이나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케이는 문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다시 걸어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모습에서 전생의 한 순간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만나러 공장에 갔을 때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도 오늘처럼 이렇게 쭈뼛거리며 공장 문 앞에 서 있었다. 케이는 노동자들과 낄낄거리며 담배를 나눠피우다가 누군가가 케이의 뒤통수를 때리며 엘리자베스 쪽을 가리키면 그때서야 엘리자베스 쪽을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높낮이 차이가 심한 문장들이 케이에게 날아들었다. 어떤 남자들은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그러면 케이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런 데에 오지 마.’
“들어와.”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지난 생과 반대되는 케이의 말에 잠시 벙찐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당장 들어와. 물건 확인 정도는 네가 해야지. 내일 9시가 박람회라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크게 뜨고 케이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한동안 자신이 서 있는 햇빛이 드는 공장 밖과 케이가 서 있는 그늘진 공장 안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가야지. 그러자.”
그리고 햇빛에서 그림자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낮에 시작된 공정은 새벽 2시가 되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선 용기와 마개의 물량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케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던 미리엄이 곤란한 얼굴로 다시 나타나면 불려 나가서 함께 다른 공장에 갔다 오는 것을 반복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진땀을 빼는 사이에 노동자들과 함께 라벨을 만들었다.
수작업으로 라벨 2,000장을 만드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작업자들 대부분은 퀴닌의 상태를 살피고 우유 살균 작업을 하느라 라벨에 할애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역시 그랬다. 그녀가 라벨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전 1시나 되어서였다.
그리고 케이가 완전히 공장으로 돌아온 것은 1시 반이었다.
케이가 코르크와 용기를 실은 커다란 마차를 타고 들어왔을 때, 모든 노동자들이 박수를 쳤다. 엘리자베스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거무죽죽한 눈 밑 그늘을 달고서 케이에게 달려가 울먹거렸다. 케이는 킥킥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뺨을 톡톡 쳤다.
엘리자베스는 울먹거림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작업을 시작했다. 케이가 그런 엘리자베스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서 자. 내가 할 거니까.”
“아니야…… 내가 할 거야……. 내가 오늘 한 게 뭐가 있다고……. 이거라도 해야지…….”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자 케이가 혀를 찼다. 그러더니 단숨에 엘리자베스를 들어올렸다. 그의 어깨에 둘러메진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철제 계단 아래에 있는 노동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든 노동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를 때리며 말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아랑곳 않고 걸어 나간 케이는 사무실 뒤편에 있는 침대와 소파의 중간쯤 되는 가구에 엘리자베스를 내려놓고 말했다.
“네 얼굴을 봐.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두 다 알 거야.”
“내, 내 얼굴이 어떤데?”
“조금 있으면 눈 그늘 때문에 어둠 속에선 식별이 안 될 수준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빨갛게 달구며 제 뺨을 가렸다. 엘리자베스가 뺨을 가리자 케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그래?”
“차, 창피해서……. 다들 내가 너구리같다고 생각할 거야.”
“하.”
케이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뺨을 가린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엘리자베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엘리자베스의 옆에 앉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처럼 생긴 너구리가 초원을 돌아다니면…….”
“돌아다니면?”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왠지 모르게 씁쓸한 빛을 띠고 엘리자베스 쪽으로 얼굴을 숙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뒤로 넘겨주었다.
“나는 당장 붙잡을 거야. 창살 있는 상자를 준비해서 말이지.”
“…….”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가락이 제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할 때마다 묘하게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했던 그 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탐했던 밤. 그러고는 곧바로 움찔하며 케이의 손가락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케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까 했던 말 말이야.”
케이가 사무실 유리 밖으로 노동자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대답했다.
“무슨 말.”
“내가 날 죽일 수 있단 말.”
케이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뒤에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말 그대로야. 너는 널 죽일 수 있잖아.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아.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고 나서 막상 죽은 동료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 때문에 죽는 사람들 말이야.”
케이가 뒤를 돌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에 담긴 짙은 절망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혹시 케이는 자기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걸까? 케이가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엘리자베스는 두려워서 목소리가 떨렸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얼마나…….”
얼마나 살고 싶은데.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넌 몰라. 내가 얼마나 살고 싶은지. 내가 얼마나 이 생을 저주했는데, 살아 있음으로 인해 얼마나 괴로웠는데…… 그런데도 내가 살고 싶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그 말들 중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가만히 있다가…….
‘……같이 살자.’
케이가 의회 청사 안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말했다.
“……같이 살자.”
불쑥 튀어나온 말에 케이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케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라고?”
“아니…… 내 말은…… 어,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는 걸 알고 당황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케이가 사무실 유리에서 보이지 않는 각도에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걸어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말해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놀라서 가만히 있었다. 케이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엘리자베스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같이…… 같이 살자고. 같이 살자고 했잖아, 네가. 그 말대로 하자고. 같이 살자. 나도 살고 너도…….”
‘어?’
엘리자베스는 제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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