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05화
엘리자베스의 반발 같은 것은 케이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같은 저택에서 지내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제 정말 2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난 어차피 박람회 준비 때문에 앞으로 3일 동안은 밤을 새다시피 해야 해.”
“사람은 3일 내내 밤을 새곤 못 살아. 적어도 1시간은 자겠지. 밥이라도 먹으러 오든지. 내가 왔다 갔다 할 때 데리러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케이는 망설임 없이 말하며 메리가 가져다 준 프란시스의 짐을 마차에 실었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케이를 보았다.
켄드릭 같은 자가 칼을 들고 몇 번을 찾아온다고 해도 엘리자베스는 죽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힘은 일반 남성의 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날 감시하겠다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엘리자베스를 노려본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널 감시하겠다는 거야. 넌 늘 돌발행동이나 하고 내 뒤통수를 못 때려 안달이니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죽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케빈의 말대로 괴물이 된 이후에는 치료제가 듣지 않는다고 해도 혹시…… 혹시 모르는 게 아닌가.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감히 그녀 자신을 포기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게 그녀 스스로라고 해도 절대로 엘리자베스를 버리게 만들 순 없었다. 그는 이를 소리가 나게 갈며 물었다.
“그 새끼…… 그 새낀 기억을 좀 찾은 것 같나?”
케이는 엘우드 밀이 빈민구제원을 떠올렸던 것을 생각하며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는.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 나랑 케빈은 그분한테 너무 부담 주지 않기로 했어.”
“왜?”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냐니. 낙상 사고가 있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선생님이 많이 불안해하시니까. 닦달한다고 돌아올 기억도 아니고 오히려 자꾸만 자극을 주지 않는 게 나아.”
기억을 해낸다고 해도 과연 그 기억 속에 치료제가 온전히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삼켰다. 엘우드 밀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다. 특히나 엘우드 밀이 잭이 하얀 괴물에 대해 알고 있다는 얘기를 했을 때부턴 더더욱 그랬다.
“쥐어 패서라도 기억을 돌아오게 해야지. 가두고 때리든지, 거꾸로 매달아놔야지.”
케이가 당장이라도 엘우드 밀을 거꾸로 매달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분노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웠다.
진짜로 엘우드 밀 선생을 거꾸로 매달고 싶은 게 누군데.
“……거꾸로 매단다고 돌아올 기억이 아니래도. 좀 조용히 해.”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며 마차 반대쪽에 있던 프란시스를 힐끔 보았다. 프란시스는 작은 짐을 마차 안에 싣고 케이와 엘리자베스 쪽으로 오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다 들었어. 엘우드 밀 씨한테 문제가 생겼나 보구나? 너랑 잘 아는 사이니, 엘리자베스?”
프란시스의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시스는 케이의 손을 잡고 마차에 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손을 잡고 마차에 탔다. 마차 안에 케이와 엘리자베스, 프란시스가 타자 콜린이 와서 문을 잡고 말했다.
“저희는 다른 마차로 갈 겁니다. 먼저 가 계세요.”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시스는 그런 케이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말이 맞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한테 닦달한다고 뭔가 해결되는 건 절대 아니야.”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가 프란시스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기분으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엘리자베스에 대한 기억까지 잃었다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왜?”
프란시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번갈아보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그 남자, 엘리자베스의 남자에요.”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다가 프란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것까진 아니지만, 저와 관계가 깊은 분은 맞아요. 프란시스.”
“그럼…… 그럼…….”
프란시스는 흐려진 눈으로 케이 쪽을 힐끔거렸다.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같은 신세가 된 거나 다름없죠. 버림받았으니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집요하게 창밖만 바라보는 케이의 옆얼굴을 보며 기분이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버림받았다니. 그런 말은 케이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자신이면 몰라도.
* * *
엘리자베스는 레트니 애비뉴에 도착하자마자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마차가 레트니 애비뉴에 도착하자마자 앰버와 에드워드가 세 사람을 맞이했다. 에드워드는 케이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지만 앰버는 큰 동요 없이 엘리자베스를 도와 프란시스가 묵을 방을 정리했다.
프란시스는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앰버와 엘리자베스가 방을 거의 다 정리했을 즈음에 입을 열었다.
“엘우드 밀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케이가 한 말이 진짜니?”
프란시스의 물음에 엘리자베스는 커튼을 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
앰버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정리를 계속했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나는 너랑 케이가 이제는 진짜로 함께 할 줄 알았어. 저 아가씨한텐 미안하지만.”
프란시스의 말에 앰버가 흠칫 뒤를 돌았다.
“아뇨. 아니에요.”
프란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 세상일이라는 게 전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순 없는 거지. 내 아들이 내 오빠와 로버트처럼 결국 도박꾼이 된 것처럼 말이야.”
프란시스는 침대에 누워서 신발을 벗었다. 프란시스는 지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에게 걸어갔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뭐든지 어떻게든 돼. 그래. 어쩌면 케이는 너무……. 너무 어려운 길인지도 모르지. 네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만인 거야.”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앰버가 슬그머니 문을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프란시스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왠지 엄마 꿈을 꾸지 않을 것 같아. 그럴 것만 같아.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케이 하커와 헤어지는 것. 이런 따뜻한 품을 떠나게 되는 것. 혼자 남겨지는 것.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를 도닥였다.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야 했다.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을 두려워하면 남은 시간이 너무 괴로울 것이다.
* * *
여름이었다.
레본의 여름은 크게 덥지 않았지만 리오든은 번화한 도시였다. 여름이 되면 공중 화장실에서는 냄새가 났고 아무도 치우지 않아 길거리에 널린 말똥에는 파리가 들끓었다. 음식은 쉽게 상했고 상한 음식을 먹고 죽는 부랑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더럽고 냄새나는 죽음이 널린 한편으로 레본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사교계 진출을 위해 친척의 타운하우스를 빌려 올라왔던 귀족들 대다수가 아직 내려가지 않고 리오든에 머물렀다. 크리스털 궁전에서 있을 박람회를 보기 위함이었다. 귀족들은 자본가들과 과학자들의 파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리에 입고 갈 의상과 보석을 고르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죽음과 축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혼란 그 자체의 세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3일 밤낮을 새고 공장과 학술원을 오갔다. 케이는 짬을 내서라도 레트니 애비뉴에서 잠을 자라고 했지만 정말이지 짬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케이는 거의 매일 학술원 앞을 지키다시피 했다. 엘리자베스는 별관을 나올 때마다 마주치는 케이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과 동행하는 일이 많아 엘우드 밀과 친밀한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엘우드 밀과 함께 했다. 엘우드 밀은 그가 우유 저장법에 관련된 발표를 하는 데에 동의했다.
엘리자베스가 그에게 올바른 발표 자세를 가르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과 함께 다니다가 케이를 마주칠 것 같으면 별 수 없이 엘우드 밀의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았는데, 그럴 때마다 엘우드 밀은 경멸의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꼭 이래야겠냐?”
“네.”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엘우드 밀의 손을 잡았다. 케이는 엘우드 밀과 손을 잡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얼굴을 굳히면서도 절대로 엘리자베스가 옴니버스를 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케이는 두 사람을 태우고 어디든 돌아다녔다.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과 식사를 하러 코앞에 가는 거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았다.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과 호텔로 간다고 해도 태워줄 것 같은 기세였다.
“대체 뭐야…… 날 이렇게 감시하는 이유가?”
엘리자베스는 박람회를 하루 남긴 날 마차 안에서 서류를 보던 고개를 들고 케이에게 물었다.
도무지 케이의 이 집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까지는 두 사람이 재결합하는 듯 보이는 것에 대해 엄청난 거부 반응을 일으키던 자가 이제 와서는 매일 같이 엘리자베스를 따라 다녔다.
“말했잖아. 너를 지키고 네가 허튼 짓을 못하게 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허튼짓이 뭐가 있어! 이것들 좀 봐! 내가 지금 이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고!”
엘리자베스는 들고 있는 서류 뭉치를 케이의 눈앞에서 흔들며 소리쳤다.
케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넌 뭐든지 할 수 있지. 원래 그렇잖아, 너는. 너는 나를 맘대로 가질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고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가 또 어느 날은 나를 살렸다가…… 또 너는…….”
케이의 눈빛이 흐려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편이었다. 이를 테면 살아남는 거라든지. 또는 케이 하커를 갖는 거라든지.
마차가 덜컹거리며 공장 앞에 섰을 때였다. 케이가 입을 열었다.
“너는 너를 죽일 수도 있잖아. 감히.”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갑자기 케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케이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좀 더 추궁하려고 할 때였다. 마차가 멈추고 케이가 문을 열었다.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리엄이 곤란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토닉워터 생산에 차질이 생겼어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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