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03화
엘리자베스가 원하는 건 그저 케이와의 단란한 식사,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문장 몇 개, 그리고 가끔씩 서로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이라는 걸 케이는 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콜린한테 공장 소식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토비한테 케이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다는 것도.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자신이 읽은 소설책 이야기를 했다가 케이가 지나가는 말로 ‘그래서? 그 뒤엔 어떻게 되는데?’ 하고 물으면 억지로 밤을 새서라도 소설책을 다 읽고 결말을 이야기해주고 싶어 하기도 했고 할 말을 조리 있게 연습하기도 했다.
케이에 대해 알아가고, 엘리자베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려주는 것.
그게 엘리자베스가 원하는 전부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공장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척을 하면 케이는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거나 비꼬기 마련이었고, 엘리자베스가 자신이 읽은 책과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 불편한 얼굴을 했다.
왜였을까.
케이는 꿈속에서 엘리자베스와 똑같이 고민했지만 사실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무리 다른 세상 속의 자신이라고 해도 케이는 케이였으니까. 케이는 그 답답한 녀석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꿈속의 그 녀석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하는 말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읽었다는 책들, 사교 모임에서 했다는 이야기들— 케이는 소설을 읽고 문화에 대해 토론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세계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다. 케이가 아는 세계란 그저 마구간이 전부였다.
자전거를 타고 온 아버지는 케이가 허영심에 가득 찬 귀족을 꾀길 원하면서도 케이에게 귀족들의 교양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케이는 하커 저택의 벼룩과도 같은 존재였다. 엘리자베스가 이야기하는 소설은 읽으면 그만이었고 교양이야 쌓으면 그만이었지만, 케이에게 단란한 가족이란 신문에서도 책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케이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엘리자베스를 노려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제 밑바닥이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애새끼처럼. 물리기 전에 물라고 배운 개새끼처럼. 돈이 없을 땐 판을 엎고 튀라고 배운 사기꾼처럼.
그래. 나는 너에게 사기를 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본 케이는 뻔히 보이는 술수에 이를 악물었다.
엘리자베스가 공장에 대해 묻거나 케이를 걱정하는 말을 할 때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도 같은 술수나 다름없었다. 저 멍청한 개새끼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두려움에 떨었다. 사실 제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엘리자베스가 알고 달아날까 봐.
그는 도무지 엘리자베스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내 코가 삐뚤어진 건 공장장에게 맞아서고 내 손바닥이 거친 건 염료에 손이 녹아내린 탓이고 내가 네 말을 두 번씩 물어보는 건……. 네가 하는 말은 어렵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네 눈은 너무 파랗고 예뻐서야.
케이는 자신이 해야 했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분명히 꿈속에서 케이를 볼 때도 그랬을 것 같은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지 마.”
케이는 자신의 거친 손을 잡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왜냐니. 프란시스가 실망하잖아.”
너는?
너는 실망하지 않아? 왜 실망하지 않는데?
이제 나한테는 어떤 기대도 없으니까? 실망이란 건 기대와 등을 대고 붙어 있는 동전의 양면 같은 거니까?
“……프란시스 몸이 별로 안 좋아. 내가 볼 땐 활력을 불어넣어줘야 해. 가끔씩 네가 와서 식사도 같이 하고 그래. 어려운 거 아니잖아.”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손을 놓았다. 케이는 휑해진 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오면 되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살짝 당황한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나? 나는…… 나는 어…….”
엘리자베스가 망설이자 케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케이는 케빈의 말을 떠올렸다.
몰록에게 감염된 자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이지를 잃어버린다는 말.
치료제는 하나뿐이고, 그 치료제의 위치를 아는 엘우드 밀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말.
그 말들을 떠올리는 순간, 케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나 안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까지 엘우드 밀의 기억이 돌아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치료제를 되찾으면 엘리자베스가 쓰고 자신은 죽어버리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어떤 인간인가.
엘리자베스는 바보 멍청이였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 남자의 목 아래에 꽃다발을 놓고 싶어 하는 여자였고, 그녀에게 말 한 번 곱게 하는 법이 없는 케이 하커를 남편감으로 점찍는 여자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이지를 잃어버리기 전에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아마도 길어봐야 2개월.
그걸 깨닫는 순간 케이는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중얼거렸다.
“씨발.”
“뭐? 너 방금…….”
엘리자베스가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으려는 순간 케이가 뒤로 돌았다. 그는 다이닝룸과 현관이 이어지는 통로 문틀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문틀에 달려 있던 장식이 케이의 손에서 바스러졌다.
“케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비명 같은 부름을 들으며 제 손에서 바스러진 장식을 보았다. 이상하리만큼 힘이 세졌다. 케이는 이 압도적인 힘이 두려웠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다가왔다. 엘리자베스가 가까워지면 그녀의 체향을 짙게 느낄 수 있었다. 그 향은 달콤하고 위험했다. 케이는 이 압도적인 힘으로 엘리자베스를 짓누르고 그녀를 가두고 다시는 제 품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너를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싶어.
케이는 자신 안에 일어나는 욕망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늘 그렇듯 케이의 거부 의사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케이의 손을 잡았다.
“문틀이 뜯어졌나 봐. 괜찮아? 파편 같은 거 박히지 않았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제 작은 손으로 케이의 손을 샅샅이 만졌다. 그 작은 손짓이 케이에게 어떤 욕망의 파문을 일으키는 줄 모르고.
“나무 파편이 박히는 게 제일 곤란해. 가늘어서 잘못하면 혈관 안으로 빨려 들어간단 말이야.”
케이의 온몸이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이 순진한 얼굴의 여자를 제 손 안에 넣고 싶다. 너에게서 나오는 모든 체액을 마시고 마지막으로 피도 마시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부드러운 살을 씹어보고 싶다.
너를 먹고 싶다.
너를 가지고 싶다.
아니, 너를 먹고 싶고 너를 가지고 싶다.
케이는 기괴한 욕망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서 있는 듯 바짝 마른 입술을 열어 엘리자베스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러!”
“……고 싶냐!”
정확한 말소리로 들리지 않는 그 말들 사이로 한순간 공기를 가르는 총소리가 났다.
탕!
케이와 엘리자베스가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뭐야?”
“산탄총 소리야.”
‘토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뿌리치고 막 부엌에서 올라오던 프란시스와 눈이 마주쳤다. 프란시스가 가까이 오려고 하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프란시스랑 함께 있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현관문을 열었다. 바람이 케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여놓았다. 케이는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정원에 벌어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메리가 내려오며 소리쳤다.
“제가 2층에서 봤어요! 켄드릭 도련님이 분명히 먼저……!”
케이는 메리를 힐끔 보곤 현관문을 닫았다. 피투성이가 된 토비가 산탄총을 허술하게 들고 서 있었고 켄드릭은 주저앉은 채로 놀란 얼굴로 토비를 가리키고 있었다.
“씨, 씨, 씨발. 저 새끼 뭐야. 뭐냐고! 씨발…… 어디서 감히…… 너 미쳤냐? 엉? 야, 씨발……. 넌 네 형님이 이렇게 처맞았는데 뭘 보고 있어? 씨, 씨, 씨발……. 너…….”
켄드릭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토비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는 돼지를 잡을 때나 쓰는 표면이 톱니 같이 생긴 칼이 들려져 있었다. 토비는 벌벌 떨면서 말했다.
“저, 저, 저를 때, 때리시는 건 상관없지만…… 그, 그, 칼을 들고는 못 들어가세요. 퉤!”
토비는 그렇게 말하곤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케이는 그걸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저 어린 새끼한테 총을 들려줬다니.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를 지켜달라고 했다니.
애를 마구간에서 재우지만 않을 뿐이지 너도 아버지와 똑같아, 케이 하커.
꿈속에서 보았던 멍청한 케이가 제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비웃었던 스스로의 망령. 그 멍청한 새끼가 케이를 저주했다.
너도 결국 누군가의 간절함을 이용하고, 그러면서 그걸 애정이나 우정 따위로 포장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알잖아?
너도 아버지처럼 되겠지.
케이는 성큼성큼 토비에게로 걸어가 총을 빼앗았다. 켄드릭의 얼굴에 기쁜 빛이 서렸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케이는 켄드릭의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댔다.
“너……. 너, 너너너 뭐 하는 거야. 돌았냐?”
“돌았다가 방금 제정신으로 돌아왔어.”
케이가 말했다.
케이는 어느새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한 켄드릭을 보며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이런 새끼를 살려두기로 했었다니. 어차피 6개월 뒤면 죽을 목숨인데 그런 멍청한 결정을 했었다니. 뭘 지키고 싶었나?
살인자가 되어서 레본을 떠난다고 해도 아쉬울 것 없었어야 했다.
레본에서 더러운 하커 가문을 지키고 하커의 이름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에 무슨 미련이 남아 있었던가.
설마.
설마 기대를 했었나.
엘리자베스의 옆에 남아서 그녀의 약혼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그녀의 곁을 맴돌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적어도 6개월은 그런 꿈같은 하루하루가 케이에게 허락될 거라는 기대?
개새끼.
더러운 새끼.
감히 어디서 그런 꿈을 꿨을까.
케이는 스스로를 더럽게 여겼다. 산탄총을 쥔 자신의 손에서 말똥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마구간이 아니라 침대에서 자게 된 이후에도 언제나 케이의 손을 떠나지 않았던 그 말똥 냄새 말이다.
감히 이 더러운 손으로 저 인형 같은 여자애를 가지고 싶어 했다니. 케이는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나, 나, 나는 그냥 너랑 대화가 하고 싶었던 거야. 어? 이 씨발, 진짜 그 총 좀 내리고 얘기하라고! 아, 나 진짜 머리 아파. 나 지금 허리도 아프고. 돈이 필요하다고……. 너 내가 집을 못 팔게 다 막아놨더라? 내가 그것 때문에 일주일동안 집에만 처박혀서…… 씨발! 네가 뭔데? 어? 네가 뭔데 내가 도박을 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넌 내가 도박해서 좋을 거 아니야? 응? 하커 가의 장남이 미쳐서 도박이나 하고 돌아다닌다……. 그러니까 사생아인 너 같은 새끼한테 이런 엄청난 기회가 주어진 거 아니야? 다 내 덕분이지!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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