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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01화 (20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01화

“에밀리?”

“그래요. 그 서프러제트라는 여자.”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그런데 그 여자, 신문에 켄터베리 홀을 비판하는 기사도 쓰지 않았어? 근데 거기 커피 하우스에 있었다고?”

에밀리는 옥살이를 하기 전부터 서프러제트로서 세상에 목소리를 내왔다. 그녀가 쓴 수많은 글 중 한 논설문에는 켄터베리 홀에 대한 비판 글이 있었다. 켄터베리 홀처럼 신사들이 돈을 내고 캉캉 춤을 볼 수 있는 곳은 여성인권 후퇴에 이바지하는 장소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발행 당시에는 뭐 이런 글이 있나, 하는 반응이었던 모양인데 막상 에밀리가 유명해지니 그 글도 꽤 유명세를 탔었다.

엘리자베스도 그 글을 읽어보았지만 사실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에밀리는 그 논설문에서 켄터베리 홀의 폐업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만약 정말 그렇게 되어버리면 직업을 잃은 무희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무희들은 앰버 모건과 같은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리오든 내에서는 결코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 돈벌이 수단조차 없다는 것은 며칠 안에 길바닥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거라는 뜻이었다. 동냥을 하다가 범죄의 표적이 되거나 굶어죽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같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에밀리의 글이 그런 고민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는 좋은 글이라고 여겼다.

“그래요. 안 그래도 그래서 거기에 온 손님들이 엄청 노려보더라구요. 켄터베리 홀은 엄청나게 성업 중이에요. 에밀리 같은 사람들이 아무리 비판해도 문을 닫을 것 같지 않던데요? 하지만 원래 귀족 아닌 평민 신사들은 회원제로 가려서 받았는데 이번 일이 계기가 됐는지 이젠 회원이 아닌 평민들도 들어갈 수 있게 됐대요. 그래서 솔치노 골목이 완전 난리예요.”

케빈의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세상이 들썩거리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솔치노 스트리트에 있는 대부분의 클럽과 홀, 커피 하우스, 오페라 하우스는 귀족과 평민 둘 중 하나만 가려서 받았다. 물론 켄터베리 홀처럼 규모가 큰 곳은 평민도 회원제로 받긴 했지만.

예를 들어 조쉬가 다니던 올라운드 클럽의 경우는 아예 귀족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옆에 있는 허밍 커피 하우스는 평민들만 이용하는 곳이었다. 허밍 커피 하우스는 솔치노에서 처음으로 생긴 평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커피 하우스였고, 그 이유로 유명해진 곳이었다. 물론 그곳에 귀족이 입장한다고 하여 막지는 않겠지만, 귀족들은 평민들만 이용하는 커피 하우스에 들어가지 않았다. 평민이 썼던 잔과 식기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더러워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켄터베리 홀처럼 술이 비싸고 무희들의 관리가 철저히 이루어지는 곳에서 회원이 아닌 평민들을 받기 시작했다면 솔치노 골목에 돈이 엄청나게 풀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케빈의 말대로 온 골목이 난리라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비앙카랑 같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더라구요. 옥살이 때문에 그런지 얼굴색도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손에서 담배를 놓질 않던데요. 완전 골초더라구요. 어쨌든 절대 같이 앉아 있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함께 있어서 저도 놀랐죠. 케이도 그 근처에 앉아 있었는데 케이한테 말은 잘 전했어요. 엘우드 밀이 왕립학술원으로 돌아왔다고.”

“……뭐래?”

엘리자베스는 초조하게 물었다.

“뭐 그냥 알겠다고만 했어요. 엘우드 밀은 괜찮냐고도 물어봤구요.”

“……혹시 뭔가 아는 것 같은 낌새는 없어?”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빈이 과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뭘 알아요? 케, 케이가 뭘 알 일이 있다고?”

“아니, 알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잭이 선생님한테 흰 털이 달린 악어 얘기를 했다니까 신경이 쓰여서. 케이랑 잭이 마주친 적이 있잖아.”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놀란 얼굴에 자신이 더 당황해서 주변을 보았다.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와 케빈 쪽을 힐끔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목소리를 낮추고 케빈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왜? 케이가 뭔가 아는 것 같은 눈치야?”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빈이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알긴 뭘 알아요. 내가 알기로 재, 잭이랑 케이는 한 두 마디도 길게 안 나눴구만, 뭘. 그, 그리고 면회 갔을 때는 옆에 교도관도 있고 그래서 대단한 말도 못했을 거예요. 무슨 걱정을 해요. 걱정을 하긴…….”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골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가? 하지만 케이가 생각보다 많은 걸 기억하는 것 같았어. 내가 윌리엄 조쉬한테 입 맞추는 것도 봤다 그랬고…….”

“윌리엄한테 입 맞췄어요?!”

케빈이 빽 소리를 지르는 통에 엘리자베스의 의자가 삐걱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넘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버티고 멈춰서 케빈을 노려보았다.

“깜짝이야! 뭐야! 놀랐잖아!”

엘리자베스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케빈은 주변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나도 놀랐거든요……?”

“왜 놀라? 케이가 많은 걸 기억하는 게?”

“아뇨?”

“그럼 뭘 놀라? 네가 놀랄 게 뭐 있어?”

엘리자베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알을 또르르 굴리다가 제 노트를 집어들고 일어났다.

“하…… 시끄럽구요. 이제 진짜 일주일 정도 밖에 안 남은 박람회 준비는 앞으로 각자 하죠. 우유저장법 관련해서 제가 루이 교수님을 도와야 하는 건 다 준비됐구요. 프란시스네 공장에서 토닉워터 용기랑 내용물은 소량으로 100개 정도 찍어주기로 했구요. 엘리자베스가 다른 남자랑 입 맞추고 돌아다니는 동안 내가 일을 참 많이 했어요?”

케빈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아무래도 케빈이 엘리자베스가 그간 바빴던 탓에 혼자 일 부담을 많이 졌던 것 같아 미안해졌다.

“케빈…… 미안해. 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일을 소홀히 했어. 앞으로 남은 건 따로 하지 말고…….”

“따로 하지 말고?”

케빈이 삐져서 가려다가 슬쩍 뒤를 돌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보고 싱긋 웃으며 케빈에게서 노트를 빼앗아 들었다.

“내가 혼자 다 할게. 넌 그냥 푹 쉬어. 케빈!”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밝게 웃으며 케빈의 노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케빈이 그 자리에 서서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가만히 있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나한테 인수인계해줄 거 있을까 봐? 걱정하지 마. 내가 물어보러 갈게. 푹 쉬어. 대부분 이 노트에 써 있지? 쉬어. 쉬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아…… 나…… 진짜……. 내가……. 하…… 참…….”

케빈은 한참을 중얼거리다 엘리자베스가 노트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쿵쿵 발소리를 내며 도서관을 떠나갔다.

엘리자베스는 도서관에 남아 또 자정 정도까지 연구를 시작했다.

엘우드 밀은 그날 밤 아무런 소득 없이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잭은 이미 빈민구제원을 떠났다는 소식뿐이었고 엘우드 밀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그 구제원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결국 또다시 원점이었다. 엘우드 밀은 시무룩해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침착하게 그를 토닥였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었다. 자라나는 희망만큼 실망도 큰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혼자 남아 박람회 준비를 했다. 아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결국 또 다시 원점.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기초 화학사 책을 노려보았다. 박람회를 성공시키고 엘우드 밀에게 신분을 만들어주고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며 후세들을 위하여 강의를 연다고 해서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진보한 세상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살아갈 수 없는데.

엘리자베스는 ‘미래’라는 단어가 허상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이 세상은 진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디트리히 폰의 기억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분명히 국가가 국민을 압살하는 세상을 보았다. 인간이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고, 사람의 목숨은 고작 병력 1이라는 수치로만 여겨지며 대를 위해 소는 희생해도 좋다고 여기는 세상. 그런 세상을 어느 누가 지금보다 더 진보한 세상이라고 여길 수 있나.

엘리자베스는 세상이 변할 거라는 믿음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엘리자베스는 점점 어두워지는 도서관 안에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도서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수천 권의 책들은 엘리자베스의 고뇌에는 대답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하는 일이 이런 힘없는 침묵을 늘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해졌다.

* * *

답답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정신없는 시간들이 휘몰아쳤기 때문이었다.

프란시스 공장에 넣은 발주를 매일 확인해야 했고 박람회에서 보여줄 과학 기술에 대해 최종 점검도 해야 했고 또 강의 계획서도 마무리 지어 제출해야 했다. 아루쉬와 함께 공부하는 것은 자정쯤에 한 시간 정도 몰아서 했다. 아루쉬는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피로, 저주, 멸망 따위의 빛이 흘러 다닌다고 말했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이 세계가 멸망했으면!

엘리자베스가 요새 매일 하는 말이었다.

“일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오랜만에 로킨트 저택에서 식사를 하러 떠나는 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짐을 들어주며 말했다.

“당연하죠. 일이 손에 잡히기도 전에 스쳐지나가잖아요?”

케빈의 눈 아래에도 퀭한 눈 그늘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 슬펐다.

“뭐라도 발라야 하는 거 아닐까……? 프란시스가 보면 분명히 엄청난 잔소리를 할 거야…….”

“뭘 발라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그냥 잔소리를 들어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스스로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봐도 이건 도무지 화장 따위로 지워질 눈 그늘이 아니었다.

“나 진짜 너무 억울해……. 나는 진짜 이렇게 바쁜 것 치곤 꼼꼼히 챙겨먹고 꼼꼼히 잤는데…….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엘리자베스는 슬퍼하며 케빈이 넣어주는 짐을 들고 토비의 마차에 탔다. 토비는 엘리자베스의 짐을 함께 들어주려고 내렸다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곤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아, 아가씨?’

“나 맞아. 너구리 아니고 나야.”

엘리자베스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토비가 입을 가렸다. 케빈은 그 꼴을 보더니 키득거리며 말했다.

“잘 갔다 와요! 프란시스 상태도 잘 보고 오고. 이제 남은 3일은 박람회 준비 때문에 잠은 다 잔 거나 다름없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섬뜩한 말을 들으며 마차 문을 닫았다.

3일.

이제 박람회가 3일밖에 남지 않았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장례식 분위기였던 레본에 약간이나마 활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리오든의 거리에는 레본 국기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솔치노에는 술을 먹은 사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크리스털 궁전까지 이어지는 에렌델 왼쪽 골목에는 짐마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놀랍도록 변화무쌍한 시대이자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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