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00화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케빈을 본 순간 엘리자베스는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케빈은 엘우드 밀의 등짝을 때리며 외쳤다.
“대체 어딜 갔던 거예요! 이 미친 삼촌아!”
케빈의 외침에 엘우드 밀이 어깨를 둥글게 말고 주저앉았다. 엘우드 밀은 떨리는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케빈은 갑자기 엘우드 밀이 주저앉자 놀라서 말했다.
“왜, 왜 그래요? 어지러워요? 괘, 괜찮아요?”
“……하…….”
케빈은 한숨만 푹푹 쉬는 엘우드 밀을 보다가 엘리자베스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말이 없자 당혹스러운 얼굴로 둘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아, 아니……. 나는 걱정이 돼서 그랬지……. 다들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요…….”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케빈 쪽을 보았다.
“너도, 너도 뭔가 알고 있냐?”
“네?”
케빈은 생뚱맞은 질문에 눈을 끔뻑거렸다. 엘우드 밀이 케빈을 닦달했다.
“흰색 털이 난 악어! 디트리히 폰! 그리고 내 정체! 얘 정체! 다 뭐야? 너도 뭐 알고 있는 거 아니냐고!”
엘우드 밀의 외침에 케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뭐예요? 삼촌 기억이 돌아온 거예요……?”
“모르겠어.”
엘리자베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엘우드 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무슨 작당이야? 엉? 나 말이지. 너네가 조금 고마웠거든? 기억도 없고 돈도 없고 통행증 하나 없는 나 같은 사람을 데리고 있어주고 걱정해주고……. 그런데 이제 보니까 너네 뭐야? 하얀 악어는 또 뭐고 디트리히 폰은 또 뭐야? 내 동생은 죽었다면서 왜 넌 내 동생이 어디에 묻혔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는 건데? 애초에 말이 돼? 난 혼타니스처럼 생겼는데 왕족이 아니야! 그리고 엘우드 밀이랑 디트리히 폰은 성이 다른데 형제지! 이게 무슨 개 같은……?”
엘우드 밀이 말을 하다가 북받쳐 오른 듯 말을 멈추고 고개를 내저었다.
“씨발……. 씨발…….”
엘우드 밀은 머리를 기둥에 대고 쿵쿵 소리가 나게 찧었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
“삼촌!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닥쳐! 냅두라고! 머리가 터져 죽든 뭐하든 그냥 둬!”
엘우드 밀은 케빈이 잡은 팔을 휘저었다. 싸움이라곤 전혀 못하는 몸치 과학자들의 몸싸움이 지리하게 이어졌다. 엘리자베스는 그 광경을 가만히 관조하다가 입을 열었다.
“디트리히 폰이…… 당신 동생이 흰색 괴물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의 반항이 멈췄다. 케빈도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우드 밀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당신 동생은 죽지 않았어! 당신 동생은 살아 있어. 괴물이지만.”
엘리자베스도 케빈도 엘우드 밀도 모두 동작을 멈췄다.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리는 리오든의 텁텁한 공기가 세 사람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빠르든 늦든 우리는 모두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 * *
케빈은 켄터베리 홀에 엘우드 밀을 찾았다는 연락을 하기 위해 떠났다. 엘리자베스와 엘우드 밀은 불이 꺼진 도서관에 촛대 하나를 들고 들어갔다.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도서관에 들어가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말할 것과 말하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정돈했다. 그리고 스스로 정리한 대로 말을 이어갔다.
엘리자베스가 엘우드에게 가장 먼저 말해준 것은 몰록에 관한 대부분의 것이었다.
잭이 보았다는 하얀 악어는 사실 악어가 아니라 몰록이다, 숙주에 기생하는 생물이라고도 세균이라고도 바이러스라고도 여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인간만을 감염시켜 대를 이어가는 존재다, 몰록에게 물린 인간은 6개월 안에 몰록이 된다.
“몰록의 번식 혹은 감염 성공률이 무척이나 낮은 이유는 아무래도 몰록의 강한 식욕 때문인 걸로 생각하고 있어요. 식욕으로 인해 폭력성을 자제할 수 없고 그래서 죽이지 않고 감염시킬 수 있는 개체가 많지 않은 거죠. 심지어…….”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추측하고 있던 가설을 이야기했다.
“몰록은 동종에게 더 강한 식욕을 느끼는 것 같아요. 동종을 공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엘리자베스는 솔치노 뒷골목에서 보았던 몰록을 떠올렸다. 몰록은 엘리자베스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의 피 냄새에 이끌려 왔다고 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역시 몰록의 손톱에 묻은 피를 먹고 무척 강한 허기를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몰록 그 자신의 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심지어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피에도 반응했다.
엘리자베스의 어두운 표정을 보던 엘우드 밀이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물었다.
“모든 게 가설일 뿐이잖아. 그리고 그런 식으로 번식하는 존재가 있다니. 믿어지지 않아. 너는 그 모든 걸 어떻게 알고 있는데?”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질문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의 동생한테 공격당했으니까요.”
“……뭐?”
엘리자베스는 딱 거기까지만 이야기했다. 그 외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엘우드 밀이 시간여행을 한 사람이라는 것, 그의 고향은 미래이고 그 미래는 아마도 전쟁으로 인해 국가가 국민을 지배하고 국민들은 세뇌당해 말도 안 되는 짓을 어린아이들에게 자행하는 곳인 것 같다는 것. 그런 것은 전부 잘 모른다, 당신이 나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 따위로 뭉개버렸다.
그 사실을 숨긴 건 엘우드 밀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엘리자베스도 이해할 수 없는, 확실치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치료제를 내가 가지고 있었다는 거냐?”
“그래요. 그런데 아직도 가지고 계신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알기로 선생님은 몰록한테 쫓기다가 죽을 뻔하셨고 선생님의 조수인 조도 몰록에게 공격당했어요. 그러니 선생님이 조를 치료하느라 치료제를 쓰셨을 수도 있고 잃어버리셨을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 조라고……. 그 이름 익숙해…….”
“뭔가 기억이 나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기시감 같은 게 든다는 거야. 잠깐. 그럼 넌 지금 얼마나 남은 거냐?”
엘우드의 질문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씁쓸하게 말했다.
“3개월, 아니 이제 3개월이라고 말할 수도 없네요. 2개월 정도 남았어요.”
이제 남은 시간은 2개월. 엘리자베스에게 남은 선택의 시간도 2개월이었다. 엘우드 밀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어떻게 하냐?”
엘리자베스는 피식 웃었다.
“뭘 어떡해요. 제 선택은 하나예요, 선생님.”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엘우드 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주사기로 주입하는 식의 치료제라고 했잖아. 나도 그걸 찾아보기 위해 노력할 거다. 정말이야. 노력할 거야. 내가 치료제를 만든 거 같댔지. 그럼 두 번은 못 만들겠냐? 알다시피 나는 천재야!”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표정을 보다가 키득거렸다.
“선생님. 아까까진 저랑 케빈을 못 믿겠다고 난리 치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요?”
“……잠깐……. 아니, 여전히 널 못 믿어. 넌 거짓말쟁이잖아.”
“왜요? 제가 왜 거짓말쟁이예요?”
“딱 보면 모르냐? 이제 보니 너 날 이용해서 케이 하커인지 뭔지 하는 놈한테 사기 쳤잖아. 날 좋아하는 척.”
엘우드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 어, 어떻게 아세요?”
“너 이거 안 보이냐?”
엘우드는 황당하다는 듯이 부은 제 얼굴을 가리켰다. 엘우드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대체 왜 그딴 짓을 하는 거야? 엉? 설마 3개월 있으면 죽는다는 생각 때문이냐?”
“……한심한가요?”
“한심한 걸 떠나서 애초에 별로 성공적이지도 않아. 너네 둘이 서로 안달이 나 있다는 건 지나가던 똥개도 알 것 같은 사실이다.”
엘우드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 새낀 미친놈이에요. 제가 2달 후에 죽는다는 걸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완전 또라이라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바이올렛 다발을 들고 돌 맞으러 갈 때부터 돌대가리 같아 보였다.”
엘우드 밀은 그렇게 말하곤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았다. 엘우드는 오랫동안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결국 나는 내 동생을 뒤쫓고 있었던 거구나. 그를 죽이려고.”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우드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디트리히 폰이라면 분명 선생님이 자신을 쏘길 원할 거예요. 그만큼……. 그만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남아 있는 삶을 원했던 사람이라고…….”
엘리자베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엘우드는 그 묘연한 표정 그대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그렇더라도 너라면 케이 하커가 괴물이 되면 그를 쏠 수 있을 것 같아?”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런 상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괴물이 되어가는 케이 하커, 케이 하커에게 총구를 들이민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의 붉은 눈과 마주칠 것이다. 괴물이 되어가는 증거인 그 붉은 눈을 보면서 엘리자베스는 분명 건방지고 오만한 케이 하커를 기억해내겠지.
내가 자신의 지옥으로 올까 봐 눈물이 난다던…….
멍청한 자식을 기억해내겠지.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을 거라는 데에 한 표를 걸었다.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엘우드 밀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내려는 듯 말했다.
“걱정 하지 마. 어쨌거나 내일 내가 빈민구제원에 한 번 가보마. 내가 거기를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거기에 내가 최근에 들렀던 것일 수도 있어. 아까는 잭 때문에 놀라서 금방 돌아 나왔지만 다시 가보면 나를 아는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몰라.”
엘우드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우드 밀은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에게 빈민구제원에서 잭을 또다시 만나게 되면 어떻게 지내는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와 달라고 가능하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자칫하다가 잭이 케이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엘우드 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만난 건 다음 날 도서관에서였다.
“삼촌하고 이야기는 잘 된 거예요? 삼촌은 왜 안 보여요?”
“빈민구제원에 가보셨어. 이야기는 잘 됐는데, 시간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안 했으니까 너도 입 조심해.”
“거기 가면 치료제가 있을까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지도.”
케빈은 들뜬 얼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희망이 헛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희망을 말리지 않았다. 희망은 나쁜 게 아니니까, 그건 그나마 남은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때 케빈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저, 홀에 딸린 커피 하우스에서 에밀리를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