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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99화 (19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99화

엘우드 밀이 나타나기 전.

빈민구제원에 갔던 케빈은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고 울상이 되어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들어가서 좀 쉬라고 권했다. 엘우드의 행방불명 소식 때문에 진이 다 빠진 두 사람은 토스트에 베이크드빈스를 올려 지푸라기라도 씹는 표정으로 조금 먹다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그 후 다시 정문으로 나온 엘리자베스는 타블로이드지를 몇 개 사서 읽었다. 신문은 대부분 에밀리의 석방 소식으로 화제였고 레트니 국왕이 언제쯤 조지 왕자에게 정식 승계를 할 것인지 따위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실려 있었다. 대부분이 귀족들 입장에서는 패색이 짙은 이야기들뿐인 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타블로이드지를 파는 소년들도, 구두닦이 소년들도, 왕립학술원을 오가던 마차들과 그 안에서 내리던 신사들도 점점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

겨우 몇 숟가락 먹은 베이크드빈스가 속에서 불어나는 듯 더부룩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후세를 위하여>라고 적힌 동판 앞에 앉았다.

그러고도 한참 후, 엘리자베스가 계단 난간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을 즈음 정문 밖이 아닌 기숙사로 통하는 옆길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가 그 사람이 코앞까지 왔을 때에야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외침에도 남자의 표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약간 지치고 힘든 듯한 얼굴 그대로였다.

“너 왜 여깄어?”

“왜 여기에 있긴요. 선생님이 없어지셨으니까 여기에 있죠!”

엘리자베스가 분노해서 소리치자 엘우드 밀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그를 닦달했다.

“어디 갔다 오시는 거예요? 대체 어디에 있다가 오셨어요? 빈민구제원을 돌아다니셨어요? 진짜 왜 이러는 거예요…… 엄청 놀랐다구요. 하…….”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주었던 모자를 벗고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선생님한테 기억을 다시 해내라느니 그런 압박 안 드려요…… 저는 선생님이 기억을 못해내더라도 괜찮아요. 아니, 물론 괜찮진 않지만…… 그냥 괜찮아볼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몸조심하시라는…….”

“너, 잭이라는 남자 아냐?”

엘우드 밀의 질문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잭?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보자 엘우드 밀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는구나.”

“잭이 왜요? 잭을 보셨어요?”

엘리자베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우드 밀이 잭을 어디서 만난단 말인가?

“갑자기 너무 혼란스러웠어. 에드워드인지 뭔지 하는 그 사람이랑 같이 길거리에 나섰는데 거기서 나는 약초냄새나 사람들의 목소리 같은 게 너무 익숙한 거야. 기시감인건지…… 아니면 내가 기억을 되찾은 건지…….”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실낱같은 희망을 느꼈다. 엘우드 밀이 뒷골목에서 사람들을 치료해왔다면 당연히 약초상이 많은 벨룬타 공원 뒤의 거리에도 당연히 가봤을 만했다. 익숙한 환경이 엘우드 밀의 기억을 되찾게 만드는 동인이 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에드워드한테 설명하지 못한 건 그 친구한테 미안하게 됐지만, 어쨌든 그 길로 내게 익숙한 느낌을 쫓아서 어디론가 갔어. 내 머릿속엔 계속 같은 단어만 맴돌았지. 빈민구제원……. 빈민구제원…… 그래. 그리고 정말로 내게 익숙한 길로 갔더니 거기에 빈민구제원이 있는 거야. 건포도가 손바닥만 한 빵에 기껏해야 하나 정도 박힌 빵을 케이크라고 부르며 먹는 사람들…… 하필 식사 시간인 것 같았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들으며 엘우드 밀과 함께 했던 1년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 역시 빈민구제원, 구빈원 따위로 불리는 그 장소에서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나 리오든 근교에 가면 그런 모습은 더더욱 심각했다. 리오든에는 농번기에 일손을 도와서 다만 빵 한 쪽이라도 빌어먹을 수 있는 농가 같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엘우드 밀은 그런 곳에서 광채를 뿜어내는 의사였다. 장기간 동안 영양실조에 시달려 장기며 피부, 머리카락 어디하나 성한 곳이 없는 이들의 병을 꿰뚫어보았고 비싼 약이나 주사 대신에 실질적인 방법을 환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때의 엘우드 밀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기억하는 곳이 맞을 거예요……. 선생님은 그런 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셨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후세를 위하여>라고 적힌 동판이 달린 기둥에 무너지듯 기댔다.

“내가?”

“네. 선생님이요.”

엘리자베스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엘우드 밀의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들었다. 이렇게 기대했는데 만약에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아니, 그리고 돌아왔는데 치료제를 이미 써버렸거나 잃어버렸다면?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질려 엘우드 밀을 보았다.

“생각이 나지 않아…….”

엘우드 밀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등을 토닥거렸다.

“걱정 마세요. 생각이 나실 거예요……. 생각이…….”

“거기서 잭을 만났다.”

그때, 갑자기 엘우드 밀이 고개를 들었다. 엘우드 밀의 아름다운 초록 눈동자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내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지? 나도 알고 있어. 내 생김새가 특이하다는 거. 도서관에서 읽은 책에는 나처럼 생긴 사람들을 갸흐통에서 혼타니스라고 부른다고 하더구나. 이오페아에서도 갸흐통처럼 북동쪽에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보통 왕족의 특성이라고. 왕족들은 근친혼으로 순수 혈통을 유지해왔으니까 말이야. 그럼 대체 나는…… 나는 뭔지…….”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혼란스러운 표정에도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아는 거라곤 엘우드 밀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미래의 갸흐통 사람이고, 그때의 갸흐통은 전쟁 중에 있었으며 전쟁통에— 혼타니스 아이들을 잔뜩 ‘생산’해냈다는 것뿐이다.

그럼 이렇게 말해야 하나? 당신이 혼타니스인 것은 왕족이여서가 아니라 국가가 특정 생김새를 가진 인종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인 것 같다고? 그래서 당신에게는 부모도 형제도 없고 아마도 당신의 유전학적 부모도 당신의 존재도 모를 것 같다고?

물론 이 모든 게 추측이긴 하지만 이 추측이 맞는다면 당신은 아마……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에 불과하다고?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워하는 엘우드 밀을 그저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엘우드 밀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모두가 나를 보았어. 그 중에 한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걸어왔어. 나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거야. 나를 분명히 본 적이 있대. 그때는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냐고. 나는 처음에 그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어.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대충 돌아서려는데 그 남자가 자기 이름은 잭이라면서, 엘리즈 네 얘기를 했어. 공녀님은 죽지 않은 거냐고.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무서워서 엘리즈 네 앞에는 차마 나타나지 못했다고. 하지만 공녀님이 자길 도와준 건 알고 있다고.”

엘리자베스는 잭이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에 헛웃음을 지었다. 잭도, 윌리엄 조쉬도 결국 살아남은 것이다. 아니, 원래 살아 있었어야 하는 사람들을 엘리자베스가 원래의 운명으로 돌려놓은 것뿐이지만, 엘리자베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엘리자베스 때문에 엉망이 된 세계에 휘말려 그 사람들이 죽었다면 엘리자베스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안도감에 취해 있을 때였다. 갑자기 엘우드 밀이 이상한 말을 했다.

“……그리고 하얀 악어 이야기를 했어. 하얀색 털이 달린 악어.”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에서는 땀이 났다. 잭이 몰록이 된 그녀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잭은 케이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엘리자베스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엘우드 밀이 말했다.

“하얀 털이 달린 악어라니. 악어는 파충류야. 딱히 아크네의 분류체계를 보지 않아도 딱 보면 알 수 있잖냐. 파충류는 털이 없다고.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악어한테 털이 달려 있을 수가 있어? 그래서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랬는데…….”

엘리자베스는 어둠에 잠긴 습한 리오든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시선을 돌리기가 무섭게 뭔가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지? 뭐였을까?

설마…….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머릿속을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의 입에서 밭은 숨이 내뱉어졌다. 여름이 되어 확실히 리오든의 공기가 더 답답해진 느낌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숨이 차는 것은 갑작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전 엘우드 밀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감싸쥐었다. 엘우드 밀이 말을 이었다.

“아니래. 자긴 분명히 봤대. 사기꾼 놈이 헛소리를 할 땐 믿지 않았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믿어졌다는 거야. 그리고 까마귀 가면을 쓴 의사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알겠다는 거야. 그게 나래. 근데 그 말을 듣는데…….”

“……그 말을…… 그 말을 듣는데요?”

“뭔가가 떠올랐어. 이번에는 정말 기억이 떠올랐어. 나처럼 하얀 피부에 초록 눈을 가진 남자가 나랑 같이 달리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순간 뭔가가 폭발해. 우리는 잔해 속에 쓰러져. 그리고 우리는 서로 엉켜들고 서로를 바라봐. 나랑 똑같이 생긴 초록 눈동자를 가졌어. 내가 그 아이를 이렇게 불러. 디트리히…….”

“디트리히 폰.”

엘리자베스와 엘우드 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엘우드 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환영 속으로 빨려들었다.

’형……?

똑같이 하얀 피부, 똑같이 초록색을 띠는 눈, 비슷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똑같이 생긴 침대에 누워 있는 커다란 방.

디트리히 폰과 엘우드 밀이 침대에서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는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몰래 침대 아래로 내려간다. 작은 촛불을 켜고 두 사람이 침대 아래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초록색 눈.

’이제부터 너와 나는……. 형제야.’

엘우드 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초록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우리는 형제야. 나만이 너를 이해하고…….”

“너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어.”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의 말을 뒤이었다.

엘우드 밀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누구야?”

“전…… 저는…….”

그때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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