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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98화 (19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98화

“그 사람에게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거군.”

케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까지고 떠돌이로 사실 순 없잖아. 그분한테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어.”

“……네가 있지.”

엘리자베스는 흠칫 케이를 보았다. 케이의 표정은 어두웠다. 케이가 물었다.

“그 사람을 왜 사랑하게 됐어?”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 돼?”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거짓말에 신물이 나서 짜증스럽게 물었다. 케이가 오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

엘리자베스는 잔뜩 뒤틀린 케이의 미소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뭔가 말해야 했다. 엘우드 밀을 왜 사랑하게 됐는지.

’귀족 아가씨는 마차에서 내리는 것도 혼자 못 하는군.’

하지만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은 엘우드 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케이 하커와 처음 만났던, 그래서 케이 하커가 엘리자베스에게 모든 것이 되어버렸던 순간의 기억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을 열었다.

“……나와 달랐으니까.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걸 그 사람은 전부 갖고 있었어.”

오만, 드높은 자존심, 인위적인 평화 속에 살아왔던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거친 삶의 흔적들. 너의 눈빛, 너의 목소리,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내게는 없는 그것들이 묻어나왔었다.

“천부적인 재능.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과학자였어. 그러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싶어 했지. 나랑은 달랐어. 나는 언제나 포기와 체념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너는 나와는 달랐어. 쉐필드에서 농노들에게 둘러싸여 오만과 건방 같은 건 갖출 틈도 없이 평화 속에서만 살아왔던 나에게는 자존심이란 날 때부터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필요가 없었기에 갖추지 못했고 갖추지 못했기에 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나를 함락당하고 내가 아는 나라는 사람의 취향과 기호는 잘게 썰려나가고 어느새 뒤돌아보면 ‘나’라는 존재는 없고……. 나는 그렇게 살았어.

나는 너와는 달랐어.

“달라서 좋았는데 그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된 건 아니야. 다르기만 했다면 사랑은 하지 못했을 거야. 다른 건 좋을 수도 있지만 나쁠 수도 있잖아. 사람들은 자신이 채울 수 없는 결핍은 피해버리잖아. 나도 그 사람을 피하고 싶었어. 처음에는 그랬어.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에게서 내가 보이는 거야. 내 사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됐어.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서 내 모습을 찾는 순간.”

’귀족 아가씨는 같은 나라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나?’

네가 감춘다고 감춘 적의를 드러낸 순간. 네 안에 담긴 열등감과 계급의식이 표출된 순간.

내가 너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아는 순간, 공격당한 어린 짐승처럼 너는 발톱을 드러내며 나를 할퀴었지. 나는 봤어. 네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어. 마치 이 야단스럽고 대단한 도시, 리오든에 와서 떨고 있었던 나처럼.

너도 나를 보는 순간 두려워한다는 걸 아는 순간, 내 사랑은 거기에서 시작됐어. 케이 하커.

“그 사람을 안아주고 싶다고, 내가 그 사람에게 전부가 되어주고 싶다고, 우리는 다르지만 비슷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딱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마치 퍼즐처럼 내가 튀어나오면 그 사람이 들어가고 그 사람이 튀어나오면 내가 들어가면 되잖아. 그러면 되니까…… 물론 지금은 선생님이 기억을 잃어버리셨지만…… 너, 너 내 말 들어?”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리다가 케이를 추궁했다. 그러자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케이의 눈은 새빨갰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건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케이의 새빨간 눈에 매달려 있는 물기가 증명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왜…… 왜 우는데?”

왜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나를 흔드는 건데.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니까 화가 나? 나는 네 거여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래서 화가 나?”

“아니.”

“그럼 뭐야……. 그럼 뭔데…….”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다 그녀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엘리자베스는 머리에 붕대를 한 이 커다란 남자가 자신의 손에 제 뺨을 가져다대는 것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마치 제가 쉴 곳은 이 커다란 땅에서 오롯이 엘리자베스의 손바닥 안뿐이라는 듯 케이는 물기로 축축해진 얼굴을 엘리자베스의 손바닥의 냄새를 맡고 뺨을 비볐다.

케이가 말했다.

“네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 남자는 기억을 잃었잖아. 나는 내가 널 사랑하는데,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서 이렇게 지옥에 있는데…… 그런데……. 너도 내가 있는 지옥에 올 거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개 같아.”

케이가 축축해진 입술을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오랫동안 대었다가 뗐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입술자국이 화인처럼 남아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어 목덜미를 매만졌다. 엘리자베스가 손을 뺐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케이의 눈은 새빨갰지만 케이는 어느새 다시 오만한 미소를 되찾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저 새끼가 기억을 못 찾으면 내가 찾게 만들 거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법사를 불러서라도 찾게 해줄 거니까. 꼭 그럴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 앰버가 약초들 사이를 헤집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앰버는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치료 다 했어요? 문제가 생겼어요. 그 엘 선생이라는 사람, 그 사람이 에드워드랑 같이 밖으로 나갔다가 갑자기 사라졌대요.”

“뭐?”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앰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만류했다.

“에드워드가 쫓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로 뛰어갔대. 그런데 에드워드는 뛸 수가 없잖아. 바로 돌아와서 알렸는데 우리가 나가보니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가 없었어.”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여기 가만히 있어. 그 새끼는 내가 찾아올 거니까.”

“선생님은 기억이 없어. 아까 상태도 안 좋아 보였는데…….”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턱을 가볍게 감싸쥐고 나지막이 말했다.

“어차피 멀리 갈 순 없을 거야. 네 말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이니까.”

엘리자베스가 불안한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벗어두었던 재킷을 챙겨서 앰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엘리자베스가 그들을 따라가자 아루쉬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어디 간 건지 모르겠어요. 계속 빈민구제원이 어디 어디 있냐, 그런 소리를 하긴 했는데…….”

엘리자베스는 앰버, 에드워드, 비앙카와 함께 엘우드 밀이 갈 만한 곳을 논의하고 있는 케이에게 말했다.

“근처에 있는 빈민구제원으로 간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우리가 근처 빈민구제원을 다 뒤질 거니까 너는 왕립학술원으로 돌아가. 아루쉬는 여기에 있고.”

“왜 나는 돌아가 있어?”

엘리자베스가 발끈하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는 돌아가 있어야지. 그 인간이 아는 곳이라곤 왕립학술원밖에 없다며. 두 시간 뒤에 우린 다 같이 켄터베리 홀로 갈 거야. 그러니까 그 안에 엘우드 밀이 돌아오면 거기로 연통을 해. 돌아오지 않아도 연통을 하고. 엘우드 밀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 비앙카가 알려줄 테니까.”

이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초상을 나서기 전,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놓고 간 재킷을 일별했다. 대체 엘우드 밀은 어디로 또 사라진 걸까?

* * *

왕립학술원에 도착하고 나니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선 케빈 퍼킨을 찾아 상황을 알렸다. 그 후 엘리자베스는 케빈과 교대로 연구실과 정문 앞을 지켰다.

그러나 두 시간동안 엘우드 밀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한 엘리자베스는 왕립학술원에서 일을 하는 급사 소년에게 돈을 주고 켄터베리 홀로 가보라고 부탁했다.

급사 소년은 모처럼의 심부름에 얼굴이 환해져서는 켄터베리 홀 쪽으로 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기분으로 같이 정문에 서 있던 케빈에게 말했다.

“선생님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셨어…… 빈민구제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내신 것까진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마음을 놓았던 걸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어두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위로했다.

“걱정 마요. 그 삼촌은 일단 어딜 가서든 먹고살 만한 생존력을 가진 인간이고. 뭐 그걸 떠나서도 빈민구제원이라는 말도 떠올릴 정도면 리오든에 관한 기억이 꽤나 돌아왔다는 건데 별 일이야 있겠어요? 오히려 뭔가를 기억해냈다면 좋은 일일 수도 있죠. 진짜로 자기가 아는 빈민구제원에 간 걸 수도 있고.”

빈민구제원.

엘리자베스는 엘우드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엘우드 밀이 저번 생에서는 이때쯤에 어디에 있었지? 아마 그때도 엘우드 밀은 리오든에 있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엘우드가 만났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리오든에서였고, 3개월 전에도 엘우드 밀은 경찰청에 잡혀 있었다. 또한 조와 엘리자베스가 마주친 것도 3개월 전이었다. 그것은 엘우드 밀이 적어도 6개월간은 리오든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가 치료제를 보관할 만한 장소 역시 리오든에 있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그 장소가 아마도 빈민구제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엘우드 밀의 연고지는 대부분 빈민들을 치료할 수 있을 만한 장소였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각 속에서 케빈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빈민구제원이 있는데 거기를 얘기해줘야겠어. 너 지금 달려가면 급사를 따라잡을 수 있겠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못 따라잡더라도 제가 가서 그냥 전하면 되죠. 엘리즈는 실험 마치고 여기 계속 죽치고 있어요. 삼촌 진짜…… 잡히기만 해봐.”

케빈이 분노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엘리자베스에게 빈민구제원의 위치와 이름을 듣고 쌩하니 달려갔다.

엘리자베스는 혼자서 연구실로 돌아갔다. 루이 교수님 역시 엘우드 밀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인간 괜찮은 거냐?”

“일단 찾고 있으니까요…… 것보다…….”

엘리자베스는 루이에게 케이가 그들의 연구를 후원할 거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루이 교수님은 얼굴이 밝아졌다. 박람회까지 필요한 연구비는 충분했지만 문제는 이후 몰려들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한 생산품 따위를 제조할 때 들어갈 연구비였다. 연구 실적을 보고 계약하려는 이가 있어도 자본가의 후원이 없으면 막상 실물 샘플까지는 제조할 수 없어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케이 하커라면 수율이 낮은 퀴닌의 비용은 물론 우유와 토닉워터 용기 따위에 들어가는 돈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엘리자베스는 즐거워하는 루이 교수님 앞에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일단 실험실을 정리하고 정문으로 나왔다.

거기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엘우드도, 켄터베리 홀에서의 소식도 한참이나 도착하지 않았다.

엘우드 밀이 왕립학술원 정문에 나타난 것은 자정쯤이 되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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