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97화
엘리자베스와 케이 일행은 벨룬타 공원 근처에 있는 약초상에 들렀다. 아루쉬는 엘우드 밀에게는 진정이 될 수 있는 차를, 케이에게는 지혈과 항염에 도움이 될 만한 약초를 권해줬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 약초상에서 내어준 가장 안쪽의 자리에 앉았고 엘우드 밀과 나머지 사람들은 말린 약초들이 문처럼 막고 있는 가게 저편에 모여 있었다. 엘우드 밀은 빈민구제원이라는 말을 자신이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내내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약초 더미 너머로 엘우드 밀의 상태를 곁눈질하다가, 아루쉬가 그를 보살피자 다시 케이를 돌아보았다. 먼저 흐르는 물로 상처를 씻어낸 후 길이를 살폈다.
“봉합까진 하지 않아도 되겠어. 찍힌 상처에 가까워. 그래도 2주간 술을 마시거나 기름진 음식을 먹는 건 피하고…….”
엘리자베스의 무릎 위에는 붉게 물든 손수건이 놓여져 있었다. 케이의 시선은 거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수건이 또 엉망이 됐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움찔했다. 몸을 바로 세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는 대신에 엘리자베스의 무릎 위에 얹힌 손수건을 집어 올렸다. 케이의 피로 절어버린 손수건의 끄트머리에는 선명하게 ‘E’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시선을 피했다.
“이걸 아직도 갖고 있었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서 손수건을 빼앗아오며 말했다.
“내 거니까. 나는 물건에 괜히 의미부여하고 그런 사람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치워버리려다가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금 ‘또’라고 했어?”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엉망이 됐잖아. 마차 안에서 내 이마에 난 상처를 막아주다가. 공작부인이 수놓아주신 거라고 했었나.”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3개월 전에 하커 저택에서 나오며 케이의 이마를 지혈해주다 망가뜨린 손수건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딸에게 주는 선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 때문에 생겨났던 의구심이 어머니에 대한 흐릿한 그리움 따위에 묻혀가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머리에 총구멍이 났던 공작부부를 떠올렸다.
거기 계세요, 어머니, 아버지. 어차피 나도 거기로 갈 거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루쉬가 말해준 대로 지혈과 항염에 좋은 약초를 찧어 케이의 이마에 얹었다. 그리고 그 위에 깨끗한 천을 덮어 고정했다. 엘리자베스의 솜씨가 서툴렀던 탓에 케이의 이마는 엉망이 되었지만 아루쉬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따랐으므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마 치료를 마치고 나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의자 옆으로 치워두었던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건 이제 버려야겠어. 네 말대로 망가졌어.”
“다시 만들어줄게.”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내 마음이 네가 가져다버린 손수건 같았으면 좋겠어. 그 천 쪼가리처럼 네가 갈가리 찢어서 갖다버릴 수 있는 거면 좋겠다고.’
언젠가 케이에게 했던 말이 엘리자베스의 귓가를 맴돌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제 눈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손수건만 빤히 보는 것을 관조하며 생각했다.
이 손수건에도 네 마음이 담겨 있을까? 내가 이걸 갈가리 찢으면 너도 네 마음이 찢겨나가듯 아플까?
엘리자베스는 약초에서 나온 물로 엉망이 된 통에 손수건을 던졌다. 케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케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다시 만들어줘도 또 망가질 거야. 손수건이라는 게 그래. 잘 망가져. 그런 물건에 수를 놓는 건 애초에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거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케이가 상처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케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 약간의 절망의 그늘이라도 드리워져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견디기 힘들 것만 같았다.
“……차라리 우리 친구가 되는 건 어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더니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보는 순간 얼어붙는 것 같았다. 케이의 눈은 막 울기라도 했다는 듯이 새빨갰다.
“돌았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님 동지라든지. 혁명가 동지 있잖아.”
“우린 인민해방회가 아니야.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일에 끼어들 생각하지 마. 넌 너무 위험해.”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다가 자신도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지금보단 편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조지 왕자한테 박람회에서 우리 둘이 친근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약속도 했고…….”
“조지 왕자가 거기서 멈출 것 같아?”
케이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복권될 거고 조지 왕자는 왕위에 오를 거야. 그럼 넌 이제 다시 국왕의 사촌이야.”
국왕의 사촌.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를 떠올렸다. 자신이 국왕의 사촌이라는 것을 내세워 땅도, 재산도 없이 리오든에서도 쉐필드에서처럼 군림하려고 들었던 아버지.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케이의 말은 나도 아버지와 똑같이 될 거라는 뜻인가?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엘리자베스 역시 자본가들을 이용하고 경멸하는 귀족이 될 거라는 것인가?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그 전에 목숨을 잃을 테니까.
“그게 뭐.”
“그게 뭐? 조지 왕자가 원하는 게 뭐일 것 같아? 왜 너와 내가 재결합한 것처럼 보이길 원할 것 같냐고. 박람회에 온 귀족들, 자본가들한테 뭘 보여주고 싶은 거겠어. 자신의 사촌과 레본에서 제일가는 사업가의 결합.”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붉은 기가 도는 케이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케이 하커를 묶을 목줄이 되는 거겠지, 내가 또.”
저번 생에서 우리의 결혼이 그랬고, 이번 생에서 우리의 약혼이 그랬듯이. 결국은 또 내가 너를 구속하고 속박할 장애물이 되는 거겠지.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귀족들에게는 국왕이 하커 사를 등에 업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 거고, 자본가들에게는 평민이 국왕의 사촌과 결혼하는 걸 보여주겠지. 넌 이제 공녀가 아니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넌 국왕의 사촌이야. 공작이 될 수도 있다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숨을 들이마셨다. 공작이라고. 엘리자베스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작위라니. 생각해보니 엘리자베스가 왕가의 성씨를 다시 받게 되면 엘리자베스에게도 작위가 내려올 것이다. 솔튼 빌리스나 엘리자베스처럼 뭔가 문제를 일으켰던 왕가의 핏줄이라면 대체로 ‘경’ 칭호 정도를 받는 것에서 끝나야 했지만 조지 왕자는 엘리자베스에게 쉐필드를 영지로 내려주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 말은 ‘경’ 칭호 이상의 작위를 엘리자베스에게 내리겠다는 뜻이었다.
클레몬트 공작.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내려올 이름을 생각하고는 숨이 막혔다.
’너는 가문의 수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죽은 아버지가 아직도 망령처럼 살아남아 엘리자베스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일은……. 그런 일은 없어.”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대답했다.
“작위를 거절하겠다는 거야?”
“아니. 내가 아버지처럼 되는 일은 없다는 거야. 네 목을 조일 일도, 널 구속할 일도 없어. 우리한테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 케이 하커.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엘우드 밀? 그럼 더 문제겠네. 공작이 어떻게 신원도 보증이 되지 않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겠어. 그건 불가능해. 차라리 지금이라도 당장 엘우드 밀을 데리고 도망치는 게 빨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렸다.
“조지 왕자가 내게 공작 작위를 내려줄지 아닐지는 모르는 거잖아.”
“모르는 거지. 하지만 너와 내가 박람회에 같이 등장하는 순간 그럴 가능성이 커지는 거야. 공작이라니. 엄청난 작위잖아. 엄청난 선물에는 엄청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고.”
케이가 특유의 냉소적인 어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거야. 엘 선생님과 내가 결혼을 하든 말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너는 신경 꺼.”
‘우리’라는 말에 케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엘리자베스는 말을 이었다.
“정말 내가 엘 선생님과 잘 되길 원한다면 네가 해야 될 일은…….”
엘리자베스는 다시 케이 하커 앞에 있는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날 후원하는 거야. 박람회에서 전시장을 내주고 내 연구를 후원해줘. 퀴닌으로 건강음료를 만들 생각이야. 이름은 토닉워터로 지을 거고.”
토닉워터라는 말을 케이가 기억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엘리자베스는 잠시 어깨를 움츠리며 케이의 표정을 살폈다.
“이젠 아주 당당하게 돈을 뜯어가는군.”
하지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안도하며 대답했다.
“네가 가진 건 돈밖에 없잖아. 그리고 이렇게 해야 우리가 재결합한 것처럼 보이게 하겠다는 말이 앞뒤가 들어맞지.”
“얼마가 필요한데?”
케이는 당장이라도 수표를 써주겠다는 듯이 품 안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성질머리에 혀를 내둘렀다. 엘리자베스는 액수를 부르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이번엔 정말로 갚을 수 있어. 토닉워터는 분명 돈이 될 거니까. 그리고 루이 교수님의 우유 저장법도 같이 후원해줘. 교수님이 거기서 이런 이름의 책을 팔 거거든. <루이 니콜라스와 엘우드 밀의 당신의 우유를 맛있고 신선하게 보관하는 법>.”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 하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루이 니콜라스와 엘우드 밀의 당신의 우유를 맛있고 신선하게 보관하는 법>이라고. 그리고 유통기한과 제조 일자를 적은 우유를 준비해서 나눠줄 거야. 고온 살균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맛있는 우유를.”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그 제목. 정말로 그 교수가 괜찮다고 했어?”
“당연하지. 허락받았어.”
엘리자베스가 웃었다.
교수님이 그 책을 들고 사진을 찍을 땐 가면을 쓰고 싶다고 하시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엘우드 밀, 기억을 잃어버린 천재 과학자.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 거야. 신문에서 엘우드 밀 이야기를 싣고 왕립학술원에서 엘 선생님을 데려가게 만들 거야. 그러면…….”
그러면 내가 만약 죽더라도 엘 선생님은 여기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시겠지.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 말대로 그 사람을 내 곁에 두는 것도 조금이나마 수월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