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96화
“저 사람 그 남자 아니야? 케이 하커.”
“하커가의 차남?”
사람들 중 몇몇이 케이를 알아본 것 같았지만 돌멩이는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의 성난 돌멩이가 꼬챙이를 맞고 튕겨나가 케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케이의 머리 위로 돌멩이가 떨어졌다. 케이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케이는 피가 흐르는 이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찰스 아이드의 동상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몇몇 사람들은 케이 하커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수군거렸지만, 아직 누군가가 그 아래에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보았더라도 하필 윌리엄 조쉬와 솔튼 빌리스의 목 아래에 서 있다가 돌멩이를 맞은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덕에 돌팔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케이는 등과 어깨, 이마와 얼굴에 쏟아지는 돌멩이와 계란을 맞으면서 걸었다.
그는 비틀거리지도 않았고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이 다치는 것쯤은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엘리자베스가 당장 케이를 뒤따라가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고 할 때였다. 케이가 손에 쥔 바이올렛 다발을 꼬챙이 앞에 내려놓았다. 그걸 본 누군가가 소리쳤다.
“뭐야, 저 새끼! 재수 없는 자식. 감히 여기에서 저런 반역자를 추모하다니.”
다른 누군가는 또 소리쳤다.
“사람이 지나가는데 돌은 그만 던져요!”
“네가 뭔 상관이야! 저 새끼도 귀족일 거야!”
“아니라고, 미친놈아. 저 사람은…….”
하지만 케이 하커는 자신이 귀족일 거라고, 아니라고 저 자식은 평민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눈으로 엘리자베스 쪽을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당장 고함을 지를 생각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당장 돌아오라고.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케이는 웃고 있었다.
저 미친놈은 웃었다. 오만하고 건방지게. 한쪽 어깨는 늘어뜨리고, 한쪽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시체 냄새로 가득 찬 무너진 의회 청사를 배경으로 여유롭게 서서는 엘리자베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가 입을 달싹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입모양을 읽었다.
비틀거리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누군가가 그러쥐었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아보곤 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앰버…….”
“엘리자베스. 여기 어떻게 왔어요? 케이랑 약속하고 온 거예요? 얼굴이 새하얀데…….”
앰버는 곧 엘리자베스가 조금 전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던 곳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케이예요? 뭐 하는 거야…… 여기 기자들도 있는데……. 에드워드! 이쪽으로 와요! 저 미친 새끼를 끌어내든지 뭐라도 하라구요! 머리에서 피가 나잖아요!”
앰버의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뒤에서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가 케이에게 걸어가는 것을 보며 케이의 입모양을 떠올렸다.
현기증이 일었다. 케이의 피 냄새가 시체 냄새 속에 섞여 진하게 전달되었다.
‘사랑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모양을 보는 순간 케이가 자신의 무언의 질문에 대답한 것임을 알았다. 너 거기서 뭐하는 거냐고, 엘리자베스가 던진 질문에 케이가 대답한 것이다.
사랑을, 하고 있다고.
엘리자베스 때문에 이마가 터져가면서, 자신의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는 게, 그게 바로 그 짓이라고.
사랑하는 거, 그 짓.
엘리자베스는 저 또라이가 사랑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뭐든지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저 미친 개자식은 사랑이 뭔지 모르고, 그래서 사랑을 동정이랑 착각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제 몸을 사람들의 돌팔매질 앞에 내던지는 게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눈에 저건 그저 오만이고 독선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 모건의 팔을 잡은 채 잠시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럼에도 여전히 엘리자베스를 뒤흔드는 말이었다.
사랑이라니. 네가 감히 나한테……. 사랑이라니.
건방진 자식.
* * *
케이는 벨룬타 공원에서도 그나마 한적한 곳으로 끌려났다. 에드워드는 케이에게 욕을 한바가지 하며 쉴 새 없이 케이의 어깨를 때렸다.
미친 거 아니냐. 대체 무슨 생각이냐. 아니, 생각이라는 게 있기는 하냐.
에드워드가 잔소리를 하며 케이의 이마에 난 상처에 손을 대려고 할 때 그들을 뒤쫓아 온 엘리자베스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뭐 하는 짓이야?”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케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하겠다는 짓을 내가 대신 한 거야.”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할 일을 왜 네가 하는데.”
“누가 하든 했다는 건 똑같고 나는 네가 하는 꼴은 못 보겠으니까.”
“왜 그래야 되는데!”
엘리자베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며 케이의 어깨를 밀쳤다. 그러자 아까까지 케이의 어깨를 툭툭 때리던 에드워드가 놀라서 엘리자베스를 말리려고 들었다.
케이는 피식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대답했잖아.”
“개자식.”
엘리자베스가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났다.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에게 차마 손은 못 대고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저기…… 고, 공녀님…….”
“공녀님이라고 부르지 마요! 그리고 저 자식 깨진 이마는 스스로 치료하든지 말든지 하라고 해요. 왜 저 자식이 벌인 일을 다른 사람이 수습해요? 가요, 아루쉬!”
엘리자베스가 소리치자 아루쉬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루쉬는 순순히 끌려가기 시작했지만 엘우드 밀은 달랐다.
엘우드 밀은 대체 어디서 났는지 표면에 성에가 낀 수통을 들고 케이에게 걸어왔다.
“이봐요. 상처 좀 봅시다.”
“…….”
케이는 엘우드 밀을 노려보았다. 엘우드 밀은 케이의 살기등등한 눈을 보며 몸을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케이의 앞으로 걸어왔다. 엘우드 밀이 수통의 뚜껑을 열고 케이에게 물을 부으려고 하자 케이가 엘우드 밀의 손을 쳐냈다.
“치워.”
엘우드 밀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분명히 욕을 안했는데 욕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엉? 대체 그건 무슨 재주지?”
엘우드 밀은 손에 엎어진 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케이가 대답이 없자 엘우드 밀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케이의 이마에 조금씩 물을 부었다.
“나 또 때리면 진짜 신고할 거야.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케이는 엘우드 밀이 자신을 치료하는 광경을 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엘리자베스 쪽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댁을 때린 걸 기억은 하고 있나 보지?”
“기억하지.”
“그럼 두 대 더 맞기 전에 꺼져.”
케이의 말에 엘우드 밀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엘우드 밀은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내고 대답했다.
“세 대를 더 맞아도 꺼질 순 없지.”
케이는 그 대답에 서늘한 기분으로 엘우드 밀을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왜인지 대답을 알 것 같은 기분으로 물었다.
“왜? 내가 댁을 때렸는데 왜 꺼질 수가 없지?”
“그야 나는 의사니까.”
엘우드 밀의 대답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우드 밀이 케이의 상처를 흐르는 물로 닦아내다가 손을 멈췄다.
“내가…… 내가 방금 뭐라고…….”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뒤에서 갑자기 당혹스러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엘우드 밀을 잡아당겼다. 엘우드 밀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았다.
“어? 어…….”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것보다 깨끗한 천이 없어. 깨끗한 천으로 지혈을 하고 근처 빈민구제원에서 봉합 도구를 구하면 좋겠는데……. 내가 아는 빈민원이 이 근처에 있으니까……. 아, 봉합은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네. 이 정도 열상이면……. 아니, 아니…….”
엘우드 밀이 우다다다 말을 쏟아내다가 제 입을 가렸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엘우드 밀을 보고 있었다. 엘우드가 말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깨끗한 천이 없다구요.”
엘리자베스도 엘우드 밀과 똑같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거 말고.”
“봉합도구 얘기도 하고, 지혈 얘기도 하셨어요. 선생님, 지금 이것도 다 책에서 읽으신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엘우드 밀이 케이의 피가 묻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엘우드 밀은 얼굴을 찡그렸다가 폈다를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방금…… 내가…… 의사라고 했나? 내가 의사라고? 내가 왜 의사야? 아니, 내가 의사야? 이렇게 나에 대해 기억이 난 건 처음인데……. 근데 내가 의사인 것 같기도 하고…… 이 냄새 말이야…… 엘리즈.”
엘우드 밀은 제 손에 남은 피에 코를 처박고 킁킁 거렸다.
“이 피 냄새. 이거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응?”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자신에게 피가 묻은 손을 들이미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서둘러 입을 가렸다. 피비린내가 엘리자베스의 코로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익숙한 허기가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엘우드 밀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엘리자베스에게 계속해서 물어봤다.
“내가 왜 열상의 지혈법을 알고 있냐고. 물론 갸흐통 말도 그렇고 내가 은근히 뭘 많이 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것들이 기억난 건 처음이야. 특히나 피 냄새 말이야. 쓰읍…… 하……. 피 냄새라니. 내가 의사가 맞긴 해? 사실 나는 의사가 아니라 살인자거나 사냥꾼이었던 거 아니고? 이봐. 엘리즈……? 엘리즈…… 컥, 으억!”
그 때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가는 엘우드 밀의 가슴을 케이 하커가 커다란 손으로 떠밀었다. 케이 하커는 화난 얼굴로 엘우드 밀을 내려다보았다. 거구의 케이 하커 앞에서 엘우드 밀이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당신, 뭔가 기억이 난 거야? 엉? 말해봐. 기억이 났으면 뭐가 기억이 났는지. 제대로 말해보라고. 방금 빈민구제원 같은 얘길 했잖나. 말해! 당신이 아는 빈민구제원이 어디야!”
엘리자베스는 화난 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뒤로 물러났다. 피 냄새가 옅어지자 머리가 조금씩 맑아졌다. 그런데 케이는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왜?
“어어, 케이…… 진정해요……!”
에드워드는 분노한 케이가 엘우드 밀을 닦달하자 케이의 팔을 잡았다. 케이의 이마에서는 지혈이 채 되지 않은 상처가 벌어져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엘우드 밀은 케이에게 떠밀려 나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빈민구제원 얘길 했다고? 빈민구제원……? 그게 뭔데?”
케이가 엘우드 밀의 멱살을 틀어쥐려는 순간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어깨를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숨을 참느라 꽉 틀어 막힌 목소리로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에드워드, 케이를 붙잡고 있든지 어떻게든 해요.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예? 아, 네……!”
엘리자베스는 화난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다가 품 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꾹 눌렀다. 그들의 뒤에서 엘우드 밀이 중얼거렸다.
“빈민구제원……. 빈민구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