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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95화 (19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95화

그제야 주변의 소리가 들렸다.

화난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은 귀족원의 폐지는 물론이고 귀족들의 탈세, 사치와 방탕에 대해 규탄했다. 윌리엄 조쉬는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세습되는 귀족원 자리를 물려받고도 감사한 줄 모르며 국왕을 시해하려고 들었던 가장 좋은 예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고인의 신체나 가정사, 문란했던 성생활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들에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리오든 뒷골목에서 악어에 물려 죽은 부랑자 여자 시체를 구해서 겁간하기를 일삼았다잖아요?”

“윌리엄 조쉬가 사실 형을 죽인 이유가 여자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저희 신문에 실려 있는 기사인데, 사실래요? 1페니예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보다도 엘리자베스의 귀를 사로잡았던 것은 뭔가가 자꾸만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툭, 툭, 툭.

“뒈져라, 귀족 새끼들!”

“하는 일은 없고 국고나 축내는 놈들!”

“상원도 만들지 마! 참정권을 확대해라!”

“인민해방회? 지들이 인민이 아닌데 무슨 인민을 해방해!”

“나는 솔튼 빌리스랑 윌리엄 조쉬가 저 대장이라는 사람이랑 같이 걸려 있는 건 문제라고 봐.”

“신도 주인도 없다? 주인이라니. 우리의 주인은 우리야. 자기들이 여전히 신과 같은 줄 아나 보지!”

엘리자베스는 툭, 툭, 툭 소리가 계속 이어질 때마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돌멩이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윌리엄 조쉬의 목에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있어?”

케이의 손은 엘리자베스의 속눈썹 위에 가볍게 얹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만졌다. 그의 손은 거칠고 두꺼웠다.

“그래.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있어. 위험하니까 돌아가자.”

케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제 말이 저도 우습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한테 이딴 말이 먹힐 리가 없겠지.”

엘리자베스는 의회 청사 앞에 모인 평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장례식에서 보았던 귀족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윌리엄 조쉬를 변절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윌리엄 조쉬가 신도 주인도 없다고 말할 때, 주인은 영주를 말하는 것이었다. 국왕으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아 소유하고 농노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영주.

이제 진정한 의미의 영주로서 살아가는 귀족은 레본에 거의 남지 않았다. 영주라는 것 자체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주들은 일개 지주가 되었다. 농노들은 소작농이 되었다.

소작농은 지주에게 지대를 내긴 하지만 영주에게 농노가 하던 것처럼 자신의 딸이 겁탈을 당하거나 이웃에게 곡식을 털렸을 때 달려가 재판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동의 자유가 없던 농노와는 달리 지대가 비싼 곳에서 싼 곳으로 이주할 권리도 가졌다.

국왕은 영주에게는 부과하지 않았던 세금을 지주에게는 부과했다. 세금을 내지 않는 귀족은 국왕의 군대에게 목이 잘리기까지 했다. 사실 쉐필드의 영주였던 클레몬트 공작 역시 땅을 모조리 저당 잡히기 직전에는 지주로 떨어졌던 셈이었다.

주인이라는 말에 많은 귀족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부가 누렸던 영주로서의 권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역시 주인이라는 말에 클레몬트 공작 부부를 떠올렸으니까.

귀족들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제 조상들이 누렸던 땅에 대한 완전한 권리들이 원래 자신의 것이었어야 한다는 생각에 닿았으리라.

마땅히 내 것이었어야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들.

‘신도 주인도 없다’는 문장은 귀족들 안에 내재된 분노를 건드렸다.

하지만 그 문장은 평민들의 분노 역시 끌어냈다. 윌리엄 조쉬가 인민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평민들은 어린 귀족인 윌리엄 조쉬가 감히 자신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탈세를 일삼는 귀족들에게서 그들이 아직 빼앗아오지 못한 권리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권리의 대부분을 윌리엄 조쉬가 누려왔다는 것도.

결국 윌리엄 조쉬는 그 어느 쪽의 이해도 얻지 못했고 동정도 사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의 머리 밑에 바이올렛을 한 다발 놔줘요.’

‘내 목이라고 생각될 그 불쌍한 시체의 머리 밑에도 놔주면 좋겠군.’

엘리자베스는 한때는 사교계에서 잘 나가는 바람둥이였던 남자가 교도관들에게 얻어맞아 퉁퉁 부은 얼굴로 하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엘리자베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 사람’이랑 약속을 했어. 바이올렛 한 다발을 대장이랑 저 사람 목 아래에 놔주기로 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야.”

케이의 말이 맞았다. 윌리엄 조쉬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세상일은 그렇게 똑떨어지지 않는 걸까?

윌리엄 조쉬는 결국 엘리자베스를 죽이는 데에 실패했으며 케이까지 살렸다. 윌리엄은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자 두 사람을 살린 사람이 된 셈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거랑 약속을 지키는 건 다른 일이야.”

“어떻게 달라? 넌…….”

넌 정말 이상해.

케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케이는 몇 번이나 속으로 다짐했지만 벨룬타 공원 근처에서 엘리자베스를 보는 순간 도무지 저 여자를 여기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그 여자가 엘우드 밀의 손을 잡고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고 있었는데도.

케이는 까칠까칠한 제 손이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상하게라도 할까 봐 두려워서 차마 그녀의 얼굴에 손바닥을 대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케이는 자신의 손바닥에 와서 닿는 엘리자베스의 속눈썹의 감촉을 느꼈다. 파들파들 떨리는 그것은 봄에 피는 꽃잎이나 호숫가에 사는 백조의 깃털 따위를 연상시켰다.

사실 케이는 봄에 피는 꽃도, 호숫가에 사는 백조도 본 적이 없었다.

리오든 거리에는 마차에 짓이겨진 흙길에 피어난 잡초 빼곤 볼 만한 식물이 없었고 꽃시장에서 파는 꽃들은 대가리만 잘린 채로 신문지에 쌓여 전시된 꼴이 저것이 봄이라서 핀 것인지 봄이라서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하일 강에는 간간히 악어나 개구리가 모여들긴 했지만 바다에서 하일 강으로 종종 모여든다는 물고기들은 폐수를 먹고 배에 기름이 껴 떠올라도 부랑자들조차 먹기를 기피할 정도였으니 새들의 먹잇감이 될 리 없었다. 하물며 백조라니.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속눈썹이 닿아 간질거리는 손바닥으로부터 익숙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언제나 케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인형, 꽃, 백조…… 케이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으므로 케이가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

케이는 엉망이 된 의회 청사를 노려보았다. 의회 청사의 잔해들을 조지 왕자는 조금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완벽하게 무너진 의회 청사의 바깥 쪽 기둥들과 반파된 찰스 아이드의 동상.

케이는 조지 왕자의 심중을 헤아려보려고 했다. 그는 귀족의 편인가, 아니면 평민의 편인가. 아니면 레트니가 그랬듯이 그저 그 자신의 편일 뿐인 것인가.

하지만 추측이 쉽지 않았다. 조지 왕자는 레트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듯하면서도 막상 진짜 중요한 것들은 드러내지 않는 영악한 지도자였다.

케이는 돌멩이가 부족하자 썩은 계란을 들고 모여드는 평민들을 바라보며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대체 어떤 놈이 목을 잘랐는지 목 아래로는 여전히 내장이 붙어 있는, 윌리엄 조쉬라고 여겨지는 이의 목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여름이 그리 뜨겁지 않은 리오든이라도 여름 햇살 아래 이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도록 갈색으로 변해버린 솔튼 빌리스의 목과 달리 그 목은 형태만은 분명했다. 이목구비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악어에게 뜯긴 탓에 흉측하긴 했지만.

“저딴 걸 봐야겠다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버틸 수 없을 거야. 귀족 아가씨가 보고 있기엔 너무 끔찍한 광경이라 너는 곧 기절할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좌절시킬 수많은 문장을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신분을 엘리자베스의 장애물인 냥 꼬집으며 엘리자베스의 의욕을 깎아먹을 수 있는 수많은 문장들을. 그는 자신의 꿈이자 엘리자베스의 기억이라는 그 꿈속에서, 그런 식으로 수없이 엘리자베스를 추락시켰다.

’그렇겠지. 귀족 나리들께서는 노동자들처럼 숯 검댕을 묻히거나 음식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니지 않으니까.’

’그래. 네가 귀족 신사들이랑 시시덕거리는 동안에도 나는 가만히 있잖아.’

’아이는 부부를 이어주려고 태어나는 게 아니야.’

케이는 이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케이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를.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이라면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의 꿈의 날개를 꺾고 짓밟아 자신의 곁에 묶어둘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정말로 케이에게 원한 것이 사랑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상황과 여건이 모두 다 맞았더라도 어차피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원하는 사랑은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케이는 로버트 하커의 아들이었다. 로버트 하커가 프란시스에게 그러했듯이,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좌절시키고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옆에 두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엘리자베스를 붙잡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보고 배운 것이 이것밖에 없는 케이 하커 같은 놈을 함부로 건드렸던 셈이었다.

케이는 등 뒤에서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부리나케 따라잡기 시작한 엘우드 밀과 아루쉬를 보았다. 엘우드 밀은 황당한 표정으로 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몸을 자신 쪽으로 돌리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자신을 향한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래.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해. 기억을 잃어버린 저 이상한 놈한테 가는 것도, 망할 무정부주의자에게 꽃을 바치는 것도. 넌 네가 하고 싶은 거니까 다 해.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니까.”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해하며 케이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화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그러자 허공에 매달린 목이 엘리자베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윌리엄 조쉬가…….

윌리엄 조쉬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목은 자신이 바꿔치기 한 시체의 목이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죽음마저 이용당한 시체에게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부채감에서 약간이나마 자유로워졌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시큼한 시체 썩는 냄새 속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귀족원들을 없애자!”

“참정권을 달라!”

“귀족들은 무능하고 쓸모가 없어!”

그때 분노에 찬 외침 속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어? 저 사람…….”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주목하기 시작한 쪽을 바라보았다. 썩은 계란이나 과일, 돌멩이가 쌓여 있는 윌리엄 조쉬, 솔튼 빌리스, 대장의 목 아래로 누군가가 다가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거구의 사내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돌멩이가 날아드는 그들의 목 아래로 걸어가는 케이의 손에는 바이올렛 다발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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