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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94화 (19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94화

여자의 말에 주변에 서 있던 모든 평민들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거기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몸이 굳어버렸다. 엘리자베스는 간신히 눈을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보았다. 거기엔 익숙한 갈색 머리를 예쁘게 말아 올린 화려한 외양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앙카.’

‘소녀인지 소년인지는 몰라도 예쁜 놈을 데리고 오셨네? 케이 하커.’

켄터베리 홀에서 보았던 무희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눈을 찌푸린 것은 비앙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때문도 아니었고, 귀족 아가씨라는 호칭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성난 눈으로 쳐다봐서도 아니었다.

그건 비앙카와 함께 서 있던 케이 하커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뒤쪽으로 끌어왔다. 그러더니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엘리자베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넌 왜 모자를 안 썼냐? 하여간 칠칠치 못하긴.”

엘우드 밀이 푹 눌러 씌워준 모자 탓에 잠시 시야가 어두워졌다. 엘리자베스의 시야가 다시 밝아졌을 때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귀족 아가씨? 여기 귀족 아가씨가 어딨어?”

“저 사람보고 한 말 아니에요……?”

“저 사람? 저 사람이 무슨 귀족이야. 내가 볼 때 어린 소년 같은데?”

“머리가 길잖아요.”

“바지를 입었잖아! 귀족 여자들은 바지 안 입어! 특히 저런 바지는.”

엘리자베스는 모자의 위치를 조정하고 다시 케이를 보았다. 저 멀리서 비앙카가 케이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엘리자베스 쪽을 턱짓하고 있었다. 시위 참여자들이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귀족원의 세습 자체를 철폐해야지. 상원이니 뭐니 이름만 바꿔서 되겠어?”

“캬악, 퉤! 더러운 귀족들. 도시에서 귀족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세금도 안 내고 일도 안 하고…….”

“난 차라리 귀족원을 뽑느니 자본가들을 뽑겠어. 자본가들은 우리한테 일자리라도 주잖아?”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비앙카와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비앙카한테 뭔가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아마도 비앙카가 엘리자베스에게 알은척을 한 것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비앙카와 꽤 다정해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케이가 각자 저마다의 사정과 욕망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왔을 노동자들 속에서 케이가 잘 어울린다는 점 때문에 케이에게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애초부터 케이 하커는 이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귀족들의 사교모임에서 화려한 옷들, 가짜 엉덩이, 코를 찌르는 향수냄새로 자신들의 진짜 욕망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이들 속이 아니라 편한 옷을 입고 술 냄새를 풍기면서 자신들의 욕망에 침을 튀기며 토론해대는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 얽혀 있는 게, 그게 케이 하커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런 케이 하커를 그와 제일 어울리지 않는 곳에, 제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속에 묶어놓았었다니.

엘리자베스는 윌리엄 조쉬의 소식을 듣고 밝아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와 엘우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케이를 발견한 아루쉬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케이네요. 엘리자베스.”

시위대를 보고 얼굴이 어두워졌던 아루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루쉬는 케이 쪽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여긴 너무…….”

“너무 뭐요?”

“너무 분노의 냄새가 강해요. 머리가 아팠어요.”

아루쉬가 말하는 사이에 케이와 비앙카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러자 아루쉬의 눈썹이 꿈틀댔다.

“……근데 케이 하커도 화가 많이 났네요. 그냥 분노도 아니고 질투라니.”

질투?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루쉬에게 뭔가 물어보려는 순간에 비앙카가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여기서 다 만나네요. 진짜 걱정 많이 했어요. 건강해 보이니 좋네요. 엘리자베스…… 아, 아니. 엘리자베스…… 공녀님?”

비앙카는 어설프게 치마를 잡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돼요, 비앙카. 오랜만이네요.”

엘리자베스는 비앙카의 뒤에 서서 엘리자베스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케이를 곁눈질했다. 비앙카는 그런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케이의 등을 콕콕 찌르며 킥킥거렸다.

“왜 갑자기 입을 다물어? 이쪽 길로 오자고 할 때부터 누구 때문에 오자고 한 거 아니야? 어?”

“네?”

엘리자베스가 되물으려고 할 때 케이가 비앙카를 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닥치고 앰버나 찾아봐.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싸늘한 눈으로 엘리자베스와 엘우드 밀을 바라보았다. 엘우드 밀은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아루쉬가 물었다.

“앰버 모건 양도 함께 왔나 보군요?”

“같이 왔소. 에드워드랑 대구튀김을 파는 행상을 찾으러 간다더니 대구를 잡으러 간 건지 알 길이 없지만…… 아루쉬는 왜 여기 있습니까?”

케이의 질문에 아루쉬가 빙긋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왕립학술원에서 같이 이오페아 의학에 대해 공부하다가 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우리의 치료술을 가르쳐줄 차례라 나왔구요.”

케이는 아루쉬의 말에 엘리자베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모르게 케이의 얼굴을 보기가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케이가 말했다.

“윌리엄 조쉬의 목이 궁금해서가 아니고?”

“윌리엄 조쉬요?”

아루쉬의 질문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회 청사 테러 때 귀족과 자본가들을 멋대로 ‘처형’시킨 위험한 반역자 말이오. 아루쉬도 알고 있겠지?”

“죽은 사람의 목을 구경 간다는 겁니까?”

아루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보았다. 케이 하커도 윌리엄 조쉬의 목을 구경하러 온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윌리엄 조쉬의 목이 진짜로 윌리엄 조쉬인지 궁금해서 말이다.

“당신네 고향에서는 범죄자의 목을 거는 일이 없습니까?”

아까부터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엘우드 밀이 아루쉬의 말에 궁금증이 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루쉬는 엘우드 밀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살짝 웃었다.

“우리 고향땅에서는 범죄자의 목을 치지 않고 산 채로 눈알과 내장을 뽑아낸 후 그걸 높은 나무 위에 걸어둡니다, 엘우드 밀 씨.”

아루쉬의 말에 엘우드 밀이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내, 대체 그간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읽은 건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건 신화를 재연하는 제사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행위죠? 중세 시대의 이오페아에서처럼 농번기에는 어린아이를 토막 내서 여기저기 던지기도 하나요?”

“저기,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도서관에서 읽은 이오페아의 책들이 이국땅의 부족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써두었는지 알 것 같아서 엘우드 밀의 팔꿈치 부분을 있는 힘껏 꼬집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엘우드 밀은 얼굴을 찡그리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케이가 이를 바드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우드 밀이 말했다.

“왜 그래? 나 귀 잘 들린다. 그냥 불러.”

“그게 아니구요…….”

하지만 아루쉬는 키득거리며 웃으며 말했다.

“엘우드 밀 씨는 참…… 잘 속는 군요. 우리는 범죄자의 목을 걸지 않습니다. 내장이나 눈알을 걸지도 않아요. 우리한테 죽음은 그저 나와 남의 경계가 없어지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 구경거리가 되지 못해요. 우리는 부족에 해를 끼치거나 불명예스러운 일을 한 자는 내쫓지, 목을 걸지 않아요. 죽음은 불명예를 덮지도 못할 뿐더러 어떤 징벌도 되지 못하니까요.”

아루쉬의 대답에 엘우드 밀은 또다시 눈을 빛내며 아루쉬에게 이국땅에 대한 질문을 더 이어가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엘우드 밀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선생님, 약초 보러 가야죠. 이제 그만 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은 케이의 눈치를 보며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였다.

“너 저 남자랑 가봐야 되는 거 아니냐?”

“아니거든요!”

엘리자베스가 소리치며 엘우드 밀의 팔꿈치를 다시 꼬집었다. 엘우드 밀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아, 아파! 넌 진짜 힘이 세다. 대체 그 조그마한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투덜거리는 사이에 비앙카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그럼 우린 이쪽으로 갈게요. 앰버랑 에드워드를 잘 찾길 빌어요.”

“네? 아, 네…… 뭐…….”

비앙카가 케이 쪽을 보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아루쉬와 엘우드 밀을 데리고 약초상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무너진 의회 청사가 있을 법한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두 남자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케이가 세 사람을 따라잡았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세 사람을 따라잡은 케이는 엘우드 밀의 팔꿈치를 쥐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손을 낚아챘다.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자 그는 말없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서는 빠르게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힘에 딸려 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는…….”

“따라오기 벅차? 그럼 업어줄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멀어지기 시작한 두 남자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날 업는다고?”

“그래.”

케이는 두 남자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진 곳에서 뒤를 돌더니 엘리자베스를 당장이라도 들어 올릴 듯이 다가왔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케이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안 돼.”

“왜 안 돼? 네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싫은가보지.”

“당연히 싫지. 어떻게 좋을 수가 있어?”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거짓말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케이의 질투심을 자극해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느새 이렇게 말하고 있다니.

“그래. 그럼 널 업어야겠어. 나는 원래 네가 싫어하는 것만 하니까.”

“넌 진짜 미친놈이야. 넌 진짜…….”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을 때 케이가 단숨에 엘리자베스를 들어올렸다. 어린 아이들을 안듯이 품 안에 안은 것도 아니고 빨래라도 들쳐 메듯이 엘리자베스를 어깨 위에 얹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어깨 위에서 바동거리는 사이에도 케이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쳐다봤고 그중 몇몇 사람들이 케이의 이름을 중얼거리기까지 했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계속 걸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죽도록 패서라도 멈추게 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케이가 멈춰 섰다.

케이 하커가 멈추자마자 엘리자베스는 몸을 비틀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붙잡고 내려주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욕을 하면서 케이의 뺨을 때렸다.

“이 개자식!”

짝 소리와 함께 케이의 목이 돌아갔다. 케이를 밀쳐낸 그녀는 그대로 걸어가려 했으나 손을 붙잡혔다. 케이는 욕을 쉴 새 없이 뱉어내는 엘리자베스의 몸을 돌려 등 뒤에서 껴안고 그녀의 눈을 가렸다.

버둥거리던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저 위에 윌리엄 조쉬의 목이 있어. 넌 내가 저걸 보지 말라고 해도 저걸 꼭 봐야겠지. 꼭 그래야겠지. 그게 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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