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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92화 (19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92화

도서관 열람실에 도착한 엘리자베스는 제일 먼저 엘우드 밀을 찾았다.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퉁퉁 부어 울긋불긋한 얼굴로 다른 사서에게 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위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책을 정리하라고 했지, 언제 책을 잔뜩 늘어놓고 있으라고 했어요? 당장 이 책들 치우라구요!”

엘우드 밀은 사서의 구박에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까 말씀하신 책 더미 말씀이시죠? 그건 전부 저쪽에 정리해뒀습니다.”

엘우드의 당당한 대답에 사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책 두 권을 엘우드 밀의 앞에 내려놓았다.

“참나. 이거 보여요? 이 책이 이 앞에 오게 넣어놨잖아요? 듀이십진분류법 몰라요? 내가 서가정리법을 분명히 종이로 정리해서 줬잖아요! 내가 진짜……. 루이 교수님의 추천이 있어서 신분도 불명에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인간한테 일자리를 줬는데…….”

“이폴리트가 하버마스의 뒤에 오는 게 왜요? 둘 다 철학서이니 100 섹션에 넣는 게 맞는데요?”

엘리자베스를 따라 출입증을 제시하고 도서관에 들어온 아루쉬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엘우드 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낀 엘리자베스는 아루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 선생이 저런 목소리를 낸 뒤에는 언제나 엘 선생이 폭발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목소리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엘 선생에게 윽박지르던 사서가 외쳤다.

“이폴리트가 어떻게 하버마스의 뒤예요! 앞이죠! 여기 청구기호를 보면…….”

“이런 멍청이가! 이봐! 헛소리도 작작해야지!”

엘 선생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던 건 말하자면 폭풍의 눈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엘 선생의 폭격이 시작될 준비가 다 끝났다는 뜻인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이어지는 엘우드 밀의 호통에 귀를 틀어막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아루쉬에게 말했다.

“저, 저쪽으로 가요.”

엘리자베스는 엘과는 반대편에 있는 열람실 끄트머리 책상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와 아루쉬가 그 책상으로 가는 사이에 엘우드 밀은 자신을 혼내던 선배 사서에게 ‘이폴리트 스펠링을 알기는 하는 거냐’, ‘인식론하고 철학을 구분 못 하다니 사서가 맞기는 하냐’, ‘청구기호가 잘못 되어 있길래 라벨링도 전부 다시 했다’, ‘너 같은 멍청이랑 같이 일하는 건 내 수치다’ 같은 폭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엘 선생이 그렇게 분노하는 경우는 아주 한결 같았다.

상대가 무식한데 말이 많을 때!

엘리자베스는 그런 이유로 끔찍한 공격을 당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엘우드 밀에게 폭언을 들은 선배 사서는 결국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울며 뛰쳐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서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고 했다. 아루쉬가 엘리자베스에게 의자를 빼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가 빼준 의자를 보다 아루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아루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레본에서는 신사가 숙녀에게 의자를 빼주는 게 예의라고 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루쉬가 빼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난 숙녀가 아니고 아루쉬는 신사가 아니잖아요.”

“왜 엘리자베스가 숙녀가 아니에요?”

아루쉬는 엘리자베스의 건너편에 앉으며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걸 보더니 아루쉬가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무척이나 사려 깊은 사람이에요.”

“……왜요?”

“지금 엘리자베스에게서 피어나는 감정에는 조심스러움이 많거든요. 자기의 감정을 남의 감정보다 앞세우는 이들은 대부분 대화 속에서 조심스러움을 잃어버려요.”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근데 정말이에요?”

“네?”

“감정을 읽는다는 거요. 난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잘 모르겠는데…….”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듣던 아루쉬가 피식 웃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군요.”

“아뇨. 믿지 못한다기보다…….”

“하긴 이오페아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상식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야만적’이라고 부르더군요. 아니면 거짓말이라고 부르든지요.”

아루쉬의 표정에 약간의 씁쓸함이 어렸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말을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믿기로 했다. 아루쉬의 말대로 엘리자베스도 도무지 남들에게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나.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자 아루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엘리자베스를 빤히 보았다. 마치 엘리자베스의 감정의 변화를 읽었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는 묘한 기분이 들어 아루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저쪽 책상 근처에서 여전히 씩씩거리는 엘우드 밀이 보였다.

‘저 성질머리…….’

엘리자베스는 기억이 없는 주제에 더러운 성질머리만 그대로 돌아온 엘우드를 보며 흠칫했다. 그러자 아루쉬가 뒤를 돌더니 얼굴이 울긋불긋한 엘우드 밀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사서…….”

“잡담은 그만하고 그럼 이제 공부 시작해볼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엘 선생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다시 엘리자베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홀램브로 학술지를 펼친 아루쉬는 제일 먼저 라듐이라는 단어를 가리켰다.

“이거…….”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아루쉬의 손을 막고 홀램브로 학술지를 덮었다.

아루쉬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자 엘리자베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루쉬. 모든 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기초부터 배워야 해요.”

엘리자베스는 기초 화학사 책을 꺼내 펼쳤다.

“1장. 실험방법론에 대하여.”

“……네?”

“이오페아에 왔으니 아루쉬도 이오페아 과학자들이 어떻게 연구하는지부터 알아야죠. 그러지 않으면 이오페아의 의술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긴 힘들어요. 우선 화학부터 시작해요. 그 다음에 해부학. 그 다음이 되어야 이런 것도 읽을 수 있는 거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홀램브로 학술지를 쓰윽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보던 아루쉬는 살짝 놀란 눈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화학, 해부학이요?”

“네. 그럼 시작할까요?”

아루쉬는 엘리자베스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혹시 지금 나한테 자신의 강의를 실험해보려는 건 아니에요?”

아루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들어 들고 있던 펜으로 아루쉬의 손등을 툭 쳤다.

“아니에요. 집중해요.”

하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루쉬는 사실 남의 감정을 읽는 게 아니라 남의 생각을 읽는 거 아닐까?

엘리자베스는 기초 화학사 책을 건네받아 1페이지부터 읽어가는 아루쉬를 빤히 바라보았다.

* * *

“존 돌턴의 실험 소고가 들어 있는 문철협회보가 필요한데요. 그게 아마 2월호일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학습 능력이 기대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아루쉬는 처음에는 1장에서 나오는 이오페아 식의 실험 설계와 실험 진행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모든 것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에단 밀러의 원자설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내심, 대자연을 에테르의 흐름으로 이해한다는 나라에서 온 아루쉬가 이 학습과정을 포기할까 봐 약간 두려웠다. 하지만 아루쉬는 원자설을 금방 이해했고 곧이어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엘리자베스는 대부분 무난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말이 꼬이기 시작했고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루쉬 한 사람한테 지식을 전해주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도서관 밖에서 보았던 패트릭 같은 사내들을 잔뜩 모아놓고 강의를 한다고……?

그에 생각이 미치자 공포에 질린 엘리자베스는 존 돌턴의 소고가 실린 자료를 가지러 사서에게 온 것이었다.

“지금 2월호만 없네요. 빌려간 사람은 없는데. 아마 또 사라졌…… 거나 저쪽에 있는 저 이상한 놈이 읽고 있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최대한 정중하게 요청했는데 돌아온 건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이자는 아까 엘 선생에게 폭언을 듣고 울면서 뛰쳐나갔던 사서였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이 도서관에 들어올 때부터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엘우드 밀을 가리키며 치를 떨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그 자리에 앉아서 계속 책을 쌓아놓고 읽는 것을 보았다. 엘우드 밀은 당장이라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집중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서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엘우드 밀에게로 걸어갔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가 제 코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책만 읽었다. 엘리자베스는 헛기침을 했다. 세 번인가 네 번째 쯤 되었을 때 엘우드 밀이 고개를 들고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또 뭐…….”

엘우드 밀과 눈이 마주친 엘리자베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제는 괜찮으셨는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은 정말이지 끔찍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목은 쭉 뺀 채 허리는 구부정하고 어깨는 둥글게 말려 있는 자세 그대로 움찔 뒤로 물러났다. 엘우드 밀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러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훠이, 훠이. 너 저리 가라. 나 또 얻어맞고 싶지 않거든?”

“어제는…… 케이가 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무슨 오해?”

엘우드 밀은 코웃음을 쳤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목소리 하나하나에서 익숙한 냉소를 느꼈다. 정말 무자비한 스승의 냉소였는데, 엘리자베스는 그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그립고 고향에 온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의 고향은 사실 쉐필드였는데도 말이다.

하긴, 고향이라는 게 꼭 태어난 곳이어야 할까?

엘리자베스는 쉐필드가 태어난 곳이지만 단 한 번도 쉐필드가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엘우드 밀에게는 미래의 갸흐통이 태어난 곳이지만 그가 그곳을 그리워할 거라곤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냥 제가 케이한테 선생님에 대해 잘 설명을 못 해서요.”

그때, 엘우드 밀이 품 안에서 작게 접힌 신문 하나를 꺼내 툭 하고 내려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책상 위에 놓인 신문을 보았다. 거기에 적힌 말들은 작게 접힌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접히는 부분에 [윌리엄 조쉬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조쉬의 이름에 갈급해진 엘리자베스는 얼른 신문을 낚아채려고 했지만 엘우드의 손이 더 빨랐다. 엘우드는 신문을 다시 들어 보이더니 구석에 있는 작은 글씨를 가리켰다.

[한편, 두 사람의 입궁이 파혼한 줄 알았던 케이 하커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재결합한다는 신호탄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그 남자, 네 약혼자였냐?”

엘우드 밀이 그 문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엘우드 밀에게서 신문을 빼앗아 들었다.

“네, 맞아요. 파혼하긴 했지만.”

엘리자베스가 빼앗은 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악랄한 인민해방회의 대장과 윌리엄 조쉬의 목이 솔튼 빌리스의 목과 함께 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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