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91화
“뭐, 뭘 부탁하실 겁니까……?”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엘리자베스와 아루쉬를 구경하며 비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는 신사들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이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엘리자베스를 마녀라고 부르고, 때때로 죽은 생쥐를 방 앞에 가져다놓은 다음 ‘마녀가 낙태를 했다!’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는 이 기괴한 생명체들을 인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엘리자베스와 같은 학문을 수학하고 있었다. 그녀는 과학을 통해 이들이 세계를 보는 시선이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연구가 이룩해낼 기술 발전으로 얻어질 진보적인 미래를 믿고 있었다. 비슷한 특질 몇 가지를 공통적으로 가졌다고 해서 나머지 특질 역시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적으로 꼬리가 없다고 해서 인간과 원숭이의 생태적인 특질이 모두 같은 것이 아닌데도.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과학자라는 이유로 엘리자베스와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저 편견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엘리자베스가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 엘리자베스가 멋진 성과를 보여주면 저들도 엘리자베스를 이해하게 될 거라고 믿기도 했다.
엘리자베스가 멋지게 박람회를 마무리하고 또 그녀만의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보여주면 저들 중 몇몇은 엘리자베스를 달리 볼 거고, 그들의 새로운 시선이 점점 퍼져나가 엘리자베스를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도 생길 거고, 그러다보면 친구는 되지 못해도 어쩌면…….
‘우리’도 ‘우리’가 될 거라고.
엘리자베스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성과 지식, 생각과 신념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종래에는 뭉치게 될 거라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 따윈 서로의 공통점이 조금씩 채워가는 거라고.
물론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몇몇 과학자들의 선한 마음을 믿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죽은 생쥐 테러를 당한 날,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와 꽃 한 송이를 내밀며 ‘꽃 같은 여성이 이런 곳에서 험한 일을 당하는 게 마음이 아프오’라고 말하던 어느 신사의 목소리에서도, 그녀가 황산 같은 위험한 물질을 다루고 있으면 ‘당신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시험기를 빼앗아가던 한 동료의 피부 결에서도, 엘리자베스는 분명 그들의 선함을 느꼈다. 그걸 선함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때로는 그들의 선한 얼굴들이 엘리자베스의 기분을 더더욱 가라앉혔다. 자신을 조롱하고 심한 짓을 하는 신사들보다도 호의와 동정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신사들 때문에 주저앉고 싶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저들에게 인간이 아니라 여자였으므로.
이해라는 건, 적어도 같은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므로.
엘리자베스는 패트릭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래부터 ‘우리’가 아니었는데. 우리는 우리일 필요가 없는데.
나는 당신들의 생각대로 인간이 아니야. 나는 괴물이니까.
당장이라도 네 놈들의 얼굴에서 눈알을 손으로 뽑아버릴 수 있는 괴물. 손에서 뚝뚝 흐르는 당신들의 피를 빨아 마실 수 있는 괴물.
선한 마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치워버리고 당신들이 내 앞에서 벌벌 떨며 오줌을 싸게 만들 수 있는—
그래, 나는 괴물이야.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원래 기초 화학사 강의 때는 첫 시간에 연구 방법론에 대해 배우는 것 알고 있죠? 그때 실험기기, 실험 계획, 그리고 관찰자에 대해서 배울 텐데 기억하고 있나요? 이번이 두 번째 수강이면 기억하고 있겠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패트릭을 보았다. 신사들이나 그러하듯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고 눈썹 한쪽은 우그러뜨렸다. 3개월 동안 신사들을 관찰했던 엘리자베스는 끝내 그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신사들이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를 어떤 태도로 밟아주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괴물의 이빨로 물어뜯는 대신에 신사의 태도로 밟아주기로 결심했다.
“아, 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광학 현미경과…….”
엘리자베스는 재수강이라는 것을 들켜 얼굴이 새빨개진 패트릭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문제 상황 앞에서 정확한 지적을 하는 대신 상대의 말을 가로막고 감정적인 어조로 경멸하는 것. 그것이 신사들이 누군가를 짓밟을 때 흔히 쓰는 태도였다.
“아니, 아니…… 내가 방금 부탁할 게 있다고 했잖아요. 응?”
엘리자베스의 말에 패트릭이 침을 꿀꺽 삼켰다. 패트릭은 아까 자신이 엘리자베스와 아루쉬를 보며 킬킬 웃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패트릭의 성적을 알고 있었다. 기초 과목 중 화학사의 성적이 가장 나빴다. 어느새 패트릭의 무리들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가셨다.
“네, 그러…… 그러셨죠.”
“그럼 뭘 부탁하겠어요?”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었다. 그러자 신사들 몇몇이 피식거렸다. 저들끼리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보는 대신,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패트릭을 보았다.
지금 엘리자베스는 그와 대화하는 게 아니었다. 이건 그냥 공공연한 괴롭힘일 뿐이었다. 그녀는 담배를 쥔 손을 패트릭에게로 뻗었다.
“불이요. 패트릭. 행동이 느리네요. 둔한 사람은 좋은 과학자가 될 수 없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패트릭이 허둥지둥 성냥을 찾았다. 그 사이에 아루쉬가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걸어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아루쉬를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패트릭에게서 불을 받아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며 연기로 뿌연 시야 속에서 말했다.
“관찰자의 태도부분 말이에요. 거기에 그런 게 있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알고 있겠죠? 두 번째 수강이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아는 얘기였는지 얼굴이 밝아진 패트릭이 갑자기 마구 떠들기 시작했다.
“네. 알고 있죠. 유명 생물학자 로버트의 이론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때문에 비판 받고 있지 않습니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지요. A라는 특질을 가진 B라는 개체를 만났다고 해서 B가 속한 종 C가 전부 A라는 특질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친절하게도. 마치 앞으로 자신을 가르칠 엘리자베스가 이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엘리자베스는 일반화의 오류에 대해 자기가 아는 것을 떠들기 시작한 패트릭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약간 서글퍼졌다. 들고 있던 담배 케이스에 담배를 비벼 끈 그녀는 창문 쪽으로 걸어가 꽁초를 바깥으로 내던졌다.
“맞아요. 패트릭. 그럼 다음 수업까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대해 조사해 와요. 발표를 부탁할 거니까요. 재수강생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풍부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패트릭과 그들의 동료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투를 바꿔 말했다.
“자네들이라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얼마나 관찰과 실험에 큰 장애가 되는지 알고 있을 것 같군. 남자들은 여자들의 작은 특징을 하나 발견하면 일반화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니까.”
말을 마친 엘리자베스가 쓰게 웃었다. 그녀는 아까까지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아루쉬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패트릭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 저는…… 제가 사과를 드리고 싶은데…….”
“사과는 필요 없네, 패트릭. 난 자네의 진정성 없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자네가 연구자로서의 태도를 점검해보고 왜 지난 수업에서는 낙제했는지 깨닫고 반성하길 원하는 거지. 내가 또 자네를 떨어뜨리면 이번에야말로 고향에 내려가야 하지 않나?”
그를 향해 피식 웃어준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와 함께 다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쳐지나가며 본 패트릭의 얼굴은 빨개져 있었다. 패트릭은 떨고 있었다.
그가 떠는 이유는 아마도 엘리자베스의 말에 창피함을 느껴서는 아닐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또다시 낙제시킬 수도 있는 권력을 가졌다는 게 굴욕적이기 때문이리라.
엘리자베스는 이런 복수가 조금도 통쾌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저 권력의 재확인일 뿐이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찍어 누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의 자리만 바뀌는 것. 그 자리에 약한 사람들의 자리를 늘리는 방법은 조금도 논의되지 않는 것.
이런 복수는 엘리자베스에게 씁쓸한 뒷맛만을 남겼다.
‘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어젯밤 행복한 얼굴로 행진하던 여자들의 승리는 신기루였단 말인가? 아니면 이건 레본의 변화의 과정 속에 남아 있는 미약한 어둠에 불과한가?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와 함께 도서관 앞까지 응달을 골라가며 걸어갔다. 하지만 도서관 앞에는 위가 유리로 된 통로가 있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강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햇볕을 받은 아루쉬가 말했다.
“방금 당신이 저들에게 한 방 먹인 건가요?”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지도요. 어떻게 알았어요? 어려운 말투성이였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 정도 대화를 알아들었다면 아루쉬는 그들이 자신을 비웃는 말도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 아루쉬가 빙그레 웃었다.
“저 남자들의 얼굴을 보고 알았어요. 아까는 당신을 향한 비틀린 질투의 시선이 느껴졌는데, 방금 엘리자베스가 저들에게 말을 하고 나서부터는…….”
“그게 동경으로 바뀌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아뇨. 질투는 더 강해지고 그 안에 두려움이 섞였어요. 나는 알아요, 엘리자베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사람들이 냄새를 맡듯 사람들이 색깔을 구분하듯 알아볼 수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쏟아지는 햇빛 속에 손차양을 만들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우리 부족의 특징이에요. 우리가 아홉 부족 중에 가장 전투를 싫어하고 재물을 피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죠. 전투와 재물을 좋아하는 부족들은 당신들의 무역회사와 전쟁을 벌이거나 아니면 협력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어요.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서 가슴을 조이는 듯한 습기를 느끼고 타인의 욕심에서 구린 냄새를 맡아요, 엘리자베스. 지금 당신에게는 슬픔이 느껴지네요. 좌절. 후회. 원망. 그리고…….”
아루쉬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의 이마 위에 자신의 손바닥 두 개를 펴서 넓은 차양을 만들어주며 말했다.
“약간의 희망도 느껴져요. 약간이지만 아주 강하죠. 당신은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당신이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의 향기는 옅긴 하지만 아주 넓게 퍼져 있어요. 당신의 온몸을 지배하는 건 희망이에요, 엘리자베스. 맞나요?”
아루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만든 손차양을 내렸다. 아루쉬의 손이 가려주지 못한 햇빛이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 위로 쏟아졌다.
엘리자베스가 옅게 웃으며 도서관 문을 열었다.
희망이라고.
자신의 가슴 속에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던 희망이 곰팡이처럼 피어 있었다는 소식에 기분이 이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