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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90화 (19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90화

케이를 붙잡는 데에 온 힘을 쏟던 엘리자베스가 손에서 힘을 풀자 케이가 뒤를 돌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뺨을 내려쳤다.

“엘우드 밀은 환자야. 낙상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환자야. 돌았어? 그런 환자의 머리를 때리다니.”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맞은 뺨이 빨갛게 부어오르는데도 가만히 서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살기등등한 눈을 보며 피식 웃고는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케빈에게 기댄 채 서 있는 엘우드 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맞네. 내가 잘못한 거지. 미안하게 됐소.”

케이의 사과에 엘우드 밀이 움찔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케이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케이가 아까까지 눈이 벌게서 엘우드에게 달려들었던 자의 표정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다정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사과는 제대로 해야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 이상한 태도가 이해가 안 가 잠시 벙찐 채 서 있었다.

이 미친놈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시간여행을 한 이후 케이 하커의 몰랐던 여러 가지 면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럴수록 점점 더 현상에만 접근하고 원인에는 접근을 못하는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실험 결과를 까봤는데 이상한 규칙성은 있고 이게 왜 이러는지를 입증 못하는 과학자가 된 기분이라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위태로운 눈으로 케이 하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케이는 예의를 차려 엘우드 밀에게 인사하며 용서를 구할 뿐 어떤 돌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엘우드 밀은 두려움에 떨면서 케이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케이는 곧 케빈에게 뭔가를 말하더니 다시 엘리자베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건방진 태도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난 문명인이니까 사과했어.”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니?”

케이가 피식 웃었다.

“아니. 난 네가 날 좀 가지고 논다고 해서 머리가 어떻게 될 정도로 충격은 안 받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방금 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방금은 완전히 정신을 놓고 말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 안에서 헐떡거리던 스스로의 모습이 생각나 어딘가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그게 정말 식욕 때문이었을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향한 욕망이 정말 단순히 식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숨겨진 욕망이 드러난 건지 혼란스러웠다. 어느 쪽이든 엘리자베스는 점점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본능의 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3개월.

6개월의 딱 절반. 아니, 셈을 정확히 하자면 절반도 사실 채 남지 않았다. 요 근래 정신없는 일들로 시간이 빨리 간 느낌이 들어 그렇지 열흘 정도만 지나면 이제 2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몸이 벌써 반 정도는 몰록으로 변해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엘우드 밀의 기억은 돌아올 길이 묘연했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 일은 전부 잊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 하커가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체향이 또다시 자신의 이성을 엇나가게 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케이는 한순간 오만하고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잊어버리지. 그래야 네가 또 잊어버릴 일을 만들지 않겠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를 때렸다. 그랬다가 케이의 붕대가 떠올라 살짝 놀란 눈으로 케이의 어깨를 잡았다.

“아까 상처…….”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상처를 보자고 말하기가 무섭게 엘리자베스에게서 물러났다. 케이는 순식간에 엘리자베스와의 거리를 벌리더니 말했다.

“이제 가야 돼. 앰버 모건이 만들어준 알리바이에 따르면 나는 삼십 분 후에 프란시스를 만나러 온 의사와 접촉해야 하니까.”

“의사? 프란시스가 여전히 안 좋아?”

“아니. 말했잖아. 알리바이 때문이라고.”

케이는 단호하게 대답하곤 머뭇거림 없이 돌아섰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나가자 케빈이 따라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혼자 남은 엘우드 밀은 비척거리며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미안해요. 아까는…….”

“괜찮아요.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의 엘우드 밀을 바라보았다. 엘우드 밀은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섰다. 엘리자베스는 여름 바람 치고는 스산한 기운이 남아있는 공기에 제 팔을 감싸쥐었다. 두려웠다. 여름이 온 지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가을이 오는 것 같아서.

시간은 너무나 빨랐다.

* * *

엘리자베스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이번 꿈은 전에 꾸었던 그 어떤 꿈보다 더 생생했다. 엘리자베스는 꿈속에서 몰록을 만났다.

처음이었다.

꿈속에서 몰록이 된 적은 있어도 몰록을 만난 것은 없던 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몰록이 의회 청사를 기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쏟아지기 직전인 외벽을 뱀처럼 기어올라 몰록은 단숨에 의회 청사 창문에 매달렸다. 의회 청사 안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강렬한 피 냄새도 났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마다 몸을 부르르 떨며 팔로 얼굴을 막았다.

그러자 하얀 털북숭이 팔이 뺨에 닿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몰록을 만나는 이 꿈속에서도 몰록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그때였다.

‘이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 같이 먹자.’

창문에 매달려 있던 몰록이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붉은 눈을 바라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솔치노 뒷골목에서 들었던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몰록의 검은 발톱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또 총소리가 났다.

탕! 타탕! 탕!

비명소리와 함께 혈향이 진하게 의회 청사 안에서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의회 청사 외벽을 향해 도약했다. 아니, 도약하려고 했다. 총 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탕!

엘리자베스는 총소리가 시작된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이미 뛰기 시작한 케빈 퍼킨이 보였다. 케빈은 몰록이 매달린 의회 청사 건물을 향해 뛰고 있었다. 꿈속이었는데도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몰록에게 당할까 봐 두려워 속으로 외쳤다.

‘위험해, 케빈! 위험하다고!’

엘리자베스가 속으로 그렇게 외치는 사이에 케빈 퍼킨은 외벽으로 드러난 계단 같은 것을 오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따라 자신을 막고 있는 파편을 치우며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조그마한 아이는 너무 빨랐고 너무 빠르다 못해 어느새 의회 청사 위에 올라가서 몰록을 노렸다. 엘리자베스는 외벽을 기기 시작했다.

탕!

총소리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떴다.

“허억…… 헉…… 헉…….”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상체를 일으킨 채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구역감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뛰쳐나와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구역질을 했다.

한참 구역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건물 앞에 한 남자가 서서 엘리자베스를 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루쉬였다.

“메심 조르.”

아루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헉헉거리며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대충 닦았다. 건물 밖에 선 아루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은 거예요? 어제 술이라도 많이 마셨나요?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눈꺼풀 위를 돌아다니는 몰록의 잔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의 꿈의 끝에는 익숙한 얼굴도 나왔다.

케이 하커.

케이 하커의 실루엣을 얼핏 보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지만 그래도 케이 하커를 보는 순간 느꼈던 강한 욕망만은 여전히 엘리자베스의 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케이 하커에게서 나는 피 냄새와 땀 냄새, 침 냄새 따위를 맡는 순간 얼마나 케이 하커가 먹고 싶던지.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만큼은 진정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꿈에 불과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대체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민망한 얼굴로 아루쉬를 보았다.

“네, 좀 과음했어요. 흉한 꼴을 보였네요, 아루쉬. 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홀램브로 학술지를 포함한 몇 가지 서적을 가리키며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같이 공부해야죠. 약속했잖아요?”

아루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오늘은 윌리엄과 잭이 잘 탈출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뭔가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윌리엄의 소식은 알아볼수록 오히려 윌리엄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었고 잭은 보비들의 보복이 두려워 어딘가에 숨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어젯밤 로킨트에 의사가 다녀간다고 했으니 빨리 아루쉬에게 프란시스의 중독 증세를 치료할 방법을 배우는 게 나았다.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네. 맞아요. 같이 가요.”

엘리자베스는 민망한 얼굴로 제가 토해낸 노란 즙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창문을 닫았다. 엘리자베스는 커튼을 닫고 얼른 겉옷을 껴입었다. 그러자 엉망이 된 침구가 보였다. 제 땀으로 범벅이 된 침구를 보는 순간 어젯밤의 기억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여기서…….’

엘리자베스는 제 뺨을 매만졌다.

’그래, 잊어버리지. 그래야 네가 또 잊어버릴 일을 만들지 않겠어?’

엘리자베스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뺨을 붉게 물들인 스스로의 얼굴이 비춘 거울을 노려보았다.

멍청이. 머저리. 바보.

어쩌려는 거야.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거울로 걸어가 거울을 툭 쳤다. 거울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책상 위에서 적당한 노트를 꺼내어 펜과 함께 들고 방을 나섰다.

* * *

엘리자베스와 아루쉬가 도서관에 도착하기까지 학술원의 많은 신사들이 두 사람을 보며 키득댔다. 신사들은 저들끼리 떠든답시고 수군거렸지만 엘리자베스와 아루쉬가 자기들 앞을 지나가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마녀가 유색인종과 같이 다니네.”

“저 먼 이대륙에 있는 남자들은 원래 머리가 텅텅 비어서 마녀한테 잘 홀리는 법이야.”

엘리자베스는 평소라면 그런 신사들에게 눈길도 못 주고 뛰어갔겠지만 오늘은 아루쉬가 옆에 있었으므로 조금 달랐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에게 이오페아 대륙의 인간들이 다 이렇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 중 이름을 아는 남자 하나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패트릭. 내가 듣기로 기초 화학사 강의 신청을 한 것 같더군요? 이번에 기초 과목에서 낙제하면 임용에 도전하기는커녕 졸업하기도 힘들어 보이던데?”

엘리자베스의 말에 패트릭이라 불린 남자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주변 남자들을 보며 말했다.

“그, 그래서요?”

“그래서는요. 내가 기초 화학사 강의를 맡기로 했으니 부탁할 게 있어서 그렇지요.”

“기초 화학사 강의를…… 마, 맡기로 했다구요?”

패트릭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킬킬거리는 주변 친구들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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