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89화
“네?”
엘리자베스는 얼어붙은 채로 엘우드를 보았다.
엘리즈.
방금 엘리즈라고 했나?
“아니, 엘리자베스 양. 미안해요. 내가 또…… 내가 뭔가…… 지금 좀…….”
엘우드가 또다시 비틀거리며 관자놀이를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엘리즈라고 불러도 돼요. 선생님, 머리가 아프세요?”
엘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이럴 때가 있어요.”
“방에 약이 있어요. 제가 지금 가지고…….”
그때 엘우드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손에 닿는 차가운 손바닥의 느낌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았다. 엘우드의 어깨 뒤로 엘우드와 함께 온 듯한 케빈이 쭈뼛거리며 서 있는 게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해 보이는 케빈과 눈이 마주쳤다. 케빈은 이 밤에 엘우드를 왜 데리고 온 걸까?
“아니. 약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엘우드가 간절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갸흐통 말을 할 줄 알아요. 내가 갸흐통 사람이에요?”
기억이 돌아온 건가?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에 희망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알았어요? 본인이 갸흐통 말을 할 줄 안다는 거요. 어떤 기억이 돌아왔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손을 꽉 쥐었던 제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엘우드의 손이 떨궈졌다. 엘우드가 뒷목을 잡고 엘리자베스 주변을 마구 서성거리며 말했다.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데,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하나 봤거든. 그런데 그 책 내용이 이상한 거야. 아니, 그 책 내용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고 내가 이상한 거지. 뼈 이름에 관한 책이었는데 진짜 이상해. 내가 그 뼈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는 거야! 엘리즈!”
엘우드가 허공에서 손짓을 하며 말을 빠르게 했다. 엘우드는 마구 돌아다니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우드가 하는 행동은 너무나 익숙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가 무의식중에 엘 선생으로서의 자아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넘어지려는 엘우드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러자 엘우드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 손을 꽉 쥐고 말했다.
“뼈 이름만이 아니야. 내가 신기해서 다른 책들도 봤거든? 그런데 화학, 약학에 관한 책의 내용도 내가 거의 외우고 있어. 기시감 같은 게 아니고 진짜로 내가 직접 표의 한 쪽 열을 감추고 종이에 썼어. 진짜야. 한 번 볼래? 엉?”
엘우드는 그렇게 말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다급한 행동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이건 좋은 징조일까? 기억은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엘우드는…… 이 정신없고 성질머리 급한 남자는…… 완전히 엘 선생님과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기억상실증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 책을 보면 기억 손실은 환자 본인의 정보만 한정될 뿐, 환경적인 정보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즉 환자 본인은 자신의 문화적이거나 사회적인 배경은 전부 기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광장에서 투우를 벌이는 전통이 있는 솔레민 사람이 마차에 치여 기억상실을 겪는다고 해도 그는 투우사의 이름이나 광장의 형태, 투우의 관습 따위는 전부 기억하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그저 현상만을 입증할 뿐, 기억상실의 원인을 알아내거나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기억상실증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엘우드 밀처럼 낙상으로 인한 후두부 충격으로 뇌세포가 파괴된 경우라면 기억이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파괴된 세포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엘리자베스는 비이성적인 흥분으로 가득했던 가슴이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엘우드 밀이 내미는 종이를 보았다. 그 종이에는 아주 기초 화학에 관련된 지식이 적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보며 궁금해졌다.
이 남자가…… 치료제에 대해 기억해낼 확률도 있을까?
치료제의 위치 따위는 기억하지 못해도, 치료제의 조제 방법 같은 걸 기억하고 있을 확률은?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인생이 통째로 날아갔는데도 지금은 그게 너무나 궁금했다. 엘리자베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희망에 가득 찬 엘우드 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전부 기호까지 제대로 쓰셨네요.”
“그렇지? 그렇다니까. 이건 좋은 신호인 것 같아. 정말이야, 엘리즈. 아니…… 엘리자베스 양…. 미안해요. 내가 자꾸.”
엘리자베스가 구깃구깃한 종이를 엘우드에게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선생님. 정말이에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 그냥 엘리즈라고 부를게. 케빈도 널 그렇게 부르던데.”
엘리자베스가 케빈과 눈이 마주쳤다. 케빈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선생님.”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엘우드 밀은 다시 마구 돌아다니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내가 너무 놀라워서 다른 책들도 뽑아서 봤어. 문학, 철학, 역사…… 역사. 그래 역사책이었어. 이오페아의 역사를 엮어놓은 책을 보는데 거기에 이런 문장이 쓰여 있는 거야. ‘과거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 내가 그걸 읽었더니 옆에 있던 사서가 물어보더라고. 언제 갸흐통 말을 배웠냐고. 나 그제야 알았어. 그게 갸흐통 말인 줄.”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나 갸흐통 사람이야? 생각해보니까 내 성은 몰라도 이름은 갸흐통 사람들 이름과 비슷한 것 같아. 내친 김에 갸흐통 가문도 찾아봤는데, 내 성과 같은 건 없더라. 그런데 이름은 비슷한 이들이 많았어. 근데 내가 아는 이름은 하나도 없긴 하더라. 난 귀족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내 고향이 갸흐통이야? 어? 대답해봐, 엘리즈.”
엘우드 밀은 어린 아이처럼 방방 뛰며 엘리자베스를 독촉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심장이 조여오는 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엘우드 밀의 고향은 이곳에 없었다. 엘우드 밀의 고향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엘우드 밀을 미친 과학자로 만들고 그의 사랑하는 동생은 괴물로 만든 엘우드의 조국을 그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엘우드 밀의 기억상실은 어쩌면 낙상 때문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생애를 잊어버리고자 발버둥을 친 그의 무의식이 노력한 결과물은 아닐까?
엘리자베스가 잠시 넋을 빼고 있자 뒤에서 케빈이 다가왔다.
“삼촌. 이제 그만 해. 밤이 늦었어요. 엘리즈도 자야 되고 무엇보다 이런 밤에 남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면 옳다구나 하고 여기저기서 말을 지어낼 거예요. 응?”
케빈이 엘우드 밀의 어깨를 잡자 엘우드 밀이 케빈의 손을 쳐냈다.
“잠깐만! 잠깐이면 되잖아! 내가 갸흐통 사람이냐고. 내 동생, 내 동생은 갸흐통에 있나? 살아 있어? 만나보고 싶어……. 며칠 전까지는 이런 꼴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내 동생, 만나보고 싶어,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초록색 눈을 보는 순간 몰록의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괴물이 된 디트리히 폰. 한때는 고아원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을 엘우드 밀과 디트리히 폰.
엘리자베스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더듬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대체 뭐라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죽었어요. 디트리히 폰.”
엘리자베스의 말에 흥분해서 활짝 웃던 엘우드 밀의 표정이 굳어졌다. 케빈도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엘우드 밀이 미간을 찌푸렸다.
“……죽었다고?”
“네.”
엘리자베스는 차마 디트리히 폰이 살아 있다고, 그러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슬픈 눈으로 엘우드 밀을 보았다. 엘우드 밀은 자신이 기억도 못하는 존재가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왜? 어떻게?”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엘우드 밀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니. 아니야. 안 들을래. 괜히, 괜히 물어봤어.”
엘우드 밀은 천천히 뒤로 돌더니 몇 걸음을 걷다가 뒤를 보았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다른 가족은? 나한테 다른 가족은 없나?”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없어요. 제가 알기로 디트리히 폰과 당신은 고아원에서 함께 자랐어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요. 그런데 둘 다 부모는 없고 둘 다 순혈 혼타니스라는 건 알아요.”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그게 꽤나 이상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디트리히 폰의 기억 속에서 엘우드 밀과 디트리히 폰은 고아원에서 같이 자랐는데 고아원이란 부모가 죽거나 부모가 버린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 고아원에는 순혈 혼타니스들만 잔뜩 모여 있었단 말인가. 순혈 혼타니스의 외형적인 특징이란 결국 왕실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증거여야 하는데. 그 수많은 아이들이 전부 왕실의 핏줄을 그렇게 많이 이어받았단 말인가? 그럼 그들의 부모는? 왕가의 사람들이 그렇게 아이들을 많이 유기했다고?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이 혼돈 속에서 자신의 논리적 결함을 메워줄 기묘한 가설을 하나 떠올렸다.
씨말들을 흘레붙이는 사육장처럼 순혈 혼타니스를 만드는 인간 공장이 있었다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였다. 엘우드 밀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엘우드 밀은 어지러운 듯 자꾸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사기…… 사기야…….”
“뭐요?”
케빈이 물어보자 엘우드 밀이 갑자기 소리쳤다.
“거짓말이라고! 디트리히 폰? 정말 내 동생이 맞아? 방금 내가 고아원 출신이라며 그런데 내가 어떻게 혼타니스일 수가 있어! 너 거짓말 하는 거지? 엉?”
엘우드 밀이 소리치며 엘리자베스에게 달려들었을 때였다.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엄청난 속도로 거구의 남자가 엘우드 밀의 턱을 날려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제 입을 틀어막은 채 한 방에 나가떨어진 엘우드 밀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엘우드 밀의 몸 위에 올라탄 케이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케이 하커!”
“너 감히 누구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미쳤어?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머리가 돌아버렸냐고. 감히 네 여자한테 소리를 질러? 감히?”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엘우드 밀에게 주먹을 한 방 더 먹이는 것을 보다가 케빈에게 소리쳤다.
“당장 두 사람을 떼어놔! 당장!”
케빈과 엘리자베스가 겨우겨우 두 사람을 떼어놓는 사이에 엘우드 밀이 중얼거렸다.
“뭐? 내 여자……? 저 새끼 뭐야…… 뭐 하는 새끼야…….”
엘우드 밀이 입술에서 질질 피를 흘리는 사이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등을 꽉 껴안고 거친 숨을 토해내는 케이가 엘우드에게로 달려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