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88화
케이는 문틀을 강하게 쥐었다. 나무가 비틀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케이는 자신의 품 안에서 거친 숨을 토해내는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어깨 뒤로 보이는 침대를 번갈아 보았다. 스스로 식욕으로 합리화했던 이 해일 같은 욕망은 점점 다른 얼굴을 내보이는 데에 거침이 없어졌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물고 잘근잘근 씹고 그 안에서 나오는 타액을 맛보면서 스스로가 점점 이지를 상실하는 것을 느꼈다.
케이의 손가락은 자신이 움직이고 싶은 곳을 향해 움직였고 케이의 입술은 자신이 맛보고 싶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것들에게는 자의가 있다는 듯이 멋대로였고 케이는 점점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껴안고 문 안으로, 엘리자베스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서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엘리자베스에게 거칠게 입을 맞추던 케이는 침대 앞에서 잠시 입술을 떼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았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그 예쁜 푸른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을까? 케이는 점점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이 조그마한 여자를 더럽히지 않을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침대 쪽으로 몰아붙였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침대 시트 위로 쏟아지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시트 위에 흩어졌다. 케이는 몽롱한 표정의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너는 나를 그저 이용하고 쓰다버리고 싶을 뿐이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마치 네 아버지가 노동자인 내 아버지에게 너를 빌려주는 척하면서 공장을 빼앗아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러니 나도 널 사랑하지 않겠어.’
’넌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자식인지 간과하고 있어.’
’......내가 널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너는 몰라.’
질주만 알던 케이의 욕망이 알 수 없는 환상 속에서 속도를 줄였다. 케이는 침대 위에 무릎을 댄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작은 창 밖에서 어떤 실루엣이 건물 앞을 서성이는 게 보였다. 케이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남자를 보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널 가지고 싶어.
널 그딴 남자한테 보낼 수는 없어.
네가 불행하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고 싶어.
케이는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손을 맞잡았다. 엘리자베스의 뺨은 발그레 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케이는 참지 못하고 잘 익은 체리 같은 그 뺨을 입술로 맛보았다.
“너무 부드러워…… 너무…….”
케이는 광인처럼 그녀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이 거친 피부가 엘리자베스의 피부에 상처라도 낼까 봐 두려웠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자꾸만 케이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려고 노크하는 이 환상이 케이에게 자꾸만 말했다.
넌 이걸 보는 순간 네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자식인지 알게 될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귓불을 물었다.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널 먹고 싶어. 널…….”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리자베스 역시 자신과 똑같은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스의 이 이상한 흥분상태는 오로지 몰록이 만들어낸 기괴한 욕망의 발로라는 것도. 하지만 케이는 그걸 이용할 정도로 나쁜 놈이었다.
케이가 대답했다.
“날 먹어……. 날 갈아서 마셔……. 그게 너한테 도움이 된다면. 아니, 그건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이 밤이 끝나면 분명히 나는 죽고 싶어질 테니까.
너는 다른 남자한테도 가고, 환상은 나를 꿈에서 깨어나게 만들겠지. 현실은 사실 이 천국 쪽이 아니라 저 지옥 쪽이라고 말하겠지. 러니까 이건 분명, 네 복수에 도움이 되는 일이야.
엘리자베스.
케이는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내며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이 케이의 허리춤을 감싸 안았다.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은 케이의 허리를 괴롭히다가 케이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케이는 시트 자락을 꽉 쥐었다. 터질 것 같은 욕망이 케이를 괴롭혔다. 케이의 몸이 셔츠 안에서 부풀고, 또 가라앉기를 반복할 때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셔츠 단추를 전부 풀어냈다. 엘리자베스의 거친 숨이 멈췄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몽롱한 눈동자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에서 팔로 내려가는 부분을 응시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는 끊어졌던 이성이 찬물이라도 부어진 듯 갑작스레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케이가 몸을 뒤로 빼자 엘리자베스가 상체를 일으켰다. 케이가 뒤돌아 앉기가 무섭게 엘리자베스가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뭐야.”
“뭐가.”
케이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엘리자베스 쪽으로 돌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에서 팔로 내려가는 부분이 전부 붕대에 감겨 있는 것을 보았다. 붕대는 피로 흥건했다. 셔츠 역시 그랬다.
“다 나았다며.”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어느새 흘러내려가는 자신의 셔츠 자락을 끌어올릴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셔츠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팔을 잡았다.
“봐봐.”
엘리자베스의 다급한 말에 케이가 그녀의 팔을 쳐냈다. 케이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흉터가 남았어. 흉해. 너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는 의사야. 그것보다 더 흉한 것도 봤어.”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물었다. 케이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던 케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케빈 퍼킨한테 물어봐. 다 나았어.”
“근데 왜 피가 흥건한데?”
“그건…….”
케이의 해명보단 엘리자베스의 손이 빨랐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케이가 엘리자베스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그녀의 허리를 받치는 데에 두 손이 다 묶인 사이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셔츠를 벗겼다. 엘리자베스는 셔츠가 피로 젖어 딱딱해진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피가 난 거야?”
엘리자베스가 셔츠의 등 부위가 젖은 것을 보고 케이의 등을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등에 있는 상처는 오늘 난 게 아니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눈썹을 꿈틀했다. 케이는 침대 근처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사선으로 서 있는 케이의 등에는 아까 교도소 외벽에 긁혔을 상처가 죽죽 가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말대로 그건 2-3일은 된 상처처럼 이미 딱지가 앉아 있었다. 케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정상적인 신체 회복 속도.
케이는 케빈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케이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등을 보며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저 여자는 케이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저 여자가 동정하는 이는 차고 넘쳤다.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를 죽이려고 했던 윌리엄 조쉬마저도 목숨을 걸고 구해낸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절대로 케이의 상태를 알아서는 안 됐다.
“붕대에서 스며 나온 거야.”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낚아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동그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피가 아니야.”
“그럼 누구 피야?”
엘리자베스가 당혹스러운 듯이 묻자 케이가 대답했다.
“경사 놈을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팼어. 그 자식이 흘린 피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싸우다가 흘린 피는 등에 묻지 않아. 싸우다가 흘린 피는 앞에 묻지.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반박을 듣지도 않고 케이가 창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니까 넌 이제 날 괴롭히는 짓은 그만 하고 밖에 있는 저 남자한테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흠칫 창밖을 보았다. 거기엔 나이트가운 하나만 입고 건물 앞을 서성거리는 엘우드 밀이 있었다. 엘우드 밀은 서성거리다가 한순간 쪼그려 앉더니 머리를 쥐고 괴로운 듯 몸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너…….”
“가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셔츠를 케이에게 던지며 말했다.
“나한테 거짓말하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난 네가 아니야. 난 널 함정에 빠뜨리는 짓 같은 건 안 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셔츠를 끌어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셔츠가 내려갔다는 것을 깨닫고 살짝 놀랐다. 케이가 말했다.
“조심해야지. 저 남자가 얼마나 관대한지, 알 수가 없잖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케이는 거울 앞에서 셔츠 깃을 정리하고 단추를 채우는 엘리자베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방문을 열고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케이는 혼자 불 꺼진 방 안, 침대 위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내 엘리자베스가 쪼그려 앉은 엘우드 밀에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자베스가 다가가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들었다. 엘우드 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케이는 그 끔찍하게 서글픈 광경을 바라보며 머리를 헝클였다. 케이는 자신의 입 안에 남은 엘리자베스의 체향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저도 모르게 그것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이 갈증은…….
결코 식욕이 아니었다.
그 순간, 케이는 환상이 자신을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케이가 본 것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첫날밤의 엘리자베스였다.
* * *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을 부르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들었다. 엘우드 밀의 하얀 피부는 안 그래도 창백한데다가 더 창백해져 핏기가 없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쪼그려 앉은 엘우드 밀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엘우드 밀은 뒷목을 붙잡고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자고…… 자고 있었나?”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목소리에 담긴 이상한 친숙함을 읽었다. 이 목소리는, 왠지는 모르지만 묘하게 자신이 알던 엘 선생님과 더 가까운 목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건물 저 뒤쪽에 서 있는 케빈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케빈과 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휘청거리는 엘 선생의 손을 잡았다.
“아뇨. 아니에요, 선생님. 어디가 아프세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픈 데가 있는 게 아니라…….”
엘우드 밀과 엘리자베스의 눈이 마주쳤다. 엘우드 밀의 초록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엘우드 밀이 떨리는 목소리로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내가 갸흐통 사람인가? 엘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