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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87화 (18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87화

“빛이 어둠을 쫓아냈다! 에밀리가 석방됐다!”

엘리자베스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들을 따라 걸었다. 이들은 조지 왕자의 결정을 대부분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조지 왕자 만세! 만세!”

’너에게 쉐필드를 돌려주마. 땅을 돌려주었으니 이름도 돌려주어야겠지. 네 부모는 클레몬트의 성을 썼다. 너 역시 그러해야 해.’

조지 왕자는 거래를 제안했다.

엘리자베스는 받아들였다. 대가는 토지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의 대가는 잭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지금쯤 리오든 하늘 아래 자유롭게 걸어 다니고 있을 잭을 생각하며 웃으려고 노력했다.

빛이 어둠을 쫓아냈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언젠가 다시 어둠이 몰려오더라도, 지금은 그게 맞았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행진에서 빠져나왔다. 엘리자베스가 어두운 뒷골목으로 진입해 들어가 다른 골목으로 향했을 때, 행진의 꼬리 부분에 있던 엘리자베스는 머리 부분과 스쳐지나갔다. 

거기엔 그 여자가 있었다.

에밀리 벨.

엘리자베스는 교도소에서 윌리엄 조쉬만큼이나 고역을 치른 듯한 그 여자가 기침을 토하듯 뱉어내다 다른 여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보았다.

“감기에 걸렸나 봐요. 이봐. 거기 담요 좀 가져와.”

엘리자베스는 여자들이 에밀리의 몸을 담요로 돌돌 마는 것을 보다가 뒷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 * *

왕립학술원에 다다랐을 즈음 엘리자베스는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한 탓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기숙사 건물에 들어가 5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려다가 멈춰 섰다. 이제 거처가 바뀌었는데, 그것을 까먹고 말았다. 엘리자베스는 기숙사 동을 나와서 부교수 숙소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아니, 걸으려고 했다. 부교수 숙소 앞에 서 있는 커다란 키의 한 남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엘리자베스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때 남자도 그녀를 발견한 듯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케이 하커와 가까워질수록 엘리자베스에게는 그의 표정이 자세하게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가까워질수록 분노와 체념, 체념과 짜증, 짜증과 그리움, 그런 상반되는 감정들이 얽히고설킨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바로 앞에 섰을 때 케이가 말했다.

“뭐 하는…… 뭐 하는 짓이야.”

케이에게서는 피 냄새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피 냄새를 맡고 케이의 손을 보니 손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까까지 가졌던 결연한 마음과 달리 약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널 속이는 짓이지.”

다만 케이를 노려보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머리를 헝클였다.

“너, 윌리엄 조쉬의 감옥을 건드렸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는 숙소의 외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거센 타격음과 함께 케이의 손등에서 피가 흘렀다. 엘리자베스는 입을 막았다.

진한 피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과하게 달콤했다.

마치 동족인 몰록의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어질어질한 기분으로 케이를 보았다. 다시 케이가 외벽을 주먹으로 내려치려고 할 때,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케이의 주먹을 막기엔 엘리자베스의 순발력이 부족했다. 엘리자베스의 손이 외벽과 주먹 사이에 끼어서 살짝 피를 흘렸다.

그 순간 케이의 눈빛이 돌변했다.

케이가 이를 바드득 갈며 엘리자베스를 벽 쪽으로 잡아당겼다.

“뭐하는 짓이야!”

“너한테 말하면 하지 말라고 했을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피가 흐르는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흐르는 피 냄새를 맡는 순간 안 그래도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분노의 감정이 폭발할 듯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용솟음친 것은 그뿐은 아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등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그것을 핥아먹고 싶어졌다. 엘리자베스의 손목을 낚아채고 그 손등에서부터 손목, 가는 팔을 향해 흐르는 피를 혀로 남김없이 핥아먹고 싶었다.

아, 너를 남김없이 발라 먹고 싶다. 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입 안에서 굴리고 녹여먹고 싶다.

너를 나에게 준다면 나는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텐데. 그럴 텐데.

케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가 파도치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끔찍한 허기에 함락 당하기 직전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서 힘겹게 손을 뗐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피하며 말했다.

“그랬겠지. 네가 그딴 새끼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일은 내가 허락하지 않았겠지. ……내가 한다고 했겠지.”

케이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안에서 나는 소리 하나하나에도 집중하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네가 한다고 하면 그러면……”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숨을 쉴 때마다 흘러나오는 체향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케이의 냄새는 그 어떤 사람의 냄새보다 더 달콤했다.

이건 케이의 문제가 아니리라.

아마도 자신의 몸이 이지를 자꾸만 상실하려고 드는 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리라.

‘젠장…… 젠장할…….’

케이 하커를 먹고 싶다.

엘리자베스는 미약한 이성의 끈을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벽에 붙어서 지친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널 괴롭힐 수가 없잖아.”

엘리자베스가 벽에 붙어서는 바람에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리자베스의 금발이 흐트러지면서 앞으로 쏟아졌다. 엘리자베스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에 머리카락에 붙자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여전히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엘리자베스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뭐?”

케이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네가…… 네가 내 부모를 죽이지 않았다고 조지 왕자가 말해줬어.”

“…….”

케이는 벽에 붙어있는 엘리자베스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엘리자베스의 숨이 거칠어질수록 케이에게 더 많은 엘리자베스의 향기가 몰려왔다. 그러자 머릿속은 당장이라도 이성이 점멸될 것처럼 침몰하기 시작했다.

“……레트니가 내 부모를 죽인 거라고. 그러니 자기 편이 되라고. 그래서 그 증거로…….”

엘리자베스는 헐떡거리며 벽에 기대어 자신의 몸을 잠식하는 기괴한 허기를 느꼈다. 욕망이 비대해질수록 결핍은 고통으로 변해갔다.

“박람회에서 너와 내가 재결합한 것처럼 보이라고 했어. 나는 그러겠다고 했고. 그 약속의 대가로 잭을 풀어주기로 한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참기 힘들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에게 성큼 걸어와 엘리자베스에게 몸을 붙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뜨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식욕, 허기, 결핍……. 그 열기에는 수많은 이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 이름을 뭉뚱그려 이렇게 불렀다.

탐욕.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번들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케이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넌 그딴 걸 내걸지 않았어도 잭을 구할 수 있었어.”

“그럴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지. 나는 잭을 구하는 걸 확실히 하고 싶었고, 또…….”

엘리자베스는 외벽에 있는 벽돌을 더듬거리며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다. 어떻게든 이 탐욕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보며 원망스럽게 소리쳤다.

“그냥 널 속여보고 싶었어!”

“왜.”

케이의 몸이 엘리자베스에게로 더 가까이 왔다. 엘리자베스는 옷 사이로 와 닿는 케이의 피부를 느끼며 미쳐버릴 것 같은 허기에 시달렸다. 너의 몸을 갈가리 찢어서 씹어 먹고 싶어. 네 손, 네 발, 네 허리, 등, 네 모든 곳을 씹어 먹고 싶어.

“너도 날 속였으니까. 내 부모를 죽인 게 너라는 듯이, 내가 널 내 부모의 원수라고 믿게 만들어 놓고…… 너는 나를…… 기만했으니까. 나도 이렇게라도 너한테 복수를 해야겠으니까. 대체 왜 그딴 거짓말을 했어? 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니까? 내가 혹시라도 너한테 미련을 가지고 그 남자한테 못 갈까 봐?”

엘리자베스가 말하는 사이에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코앞에 와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향기를 맡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였지만 엘리자베스의 향기를 맡으면 맡을수록 케이는 결핍의 구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

“왜.”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앞니에 입술 피부가 찢어졌다. 침과 피가 섞여 옅은 붉은색 액체가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번들거리게 했다. 케이는 홀린 듯이 엘리자베스의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리고 참을 수가 없어서 엘리자베스의 피와 침이 묻은 손가락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케이는 그것을 빨아들였다.

달콤했다.

신화 속에 나오는 넥타르가 이것보다 달까? 이것보다 맛있을까?

케이는 이 액체가 엘리자베스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이 온갖 탐욕스러운 생각들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케이는 신음성을 흘리며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모두 마셔버리고 싶은 바닷물을 닮은 너의 눈.

케이가 말했다.

“……널 사랑하니까.”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넌 날 사랑하니까. 알아. 이제는 알겠어. 그런데 어떡해? 난 널 사랑하지 않는데.”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침과 피가 섞인 액체를 달콤하게 빨아먹는 케이를 바라보았다. 증오와 경멸, 혐오를 담아 노려보았다.

이전 생에서 네가 내 부모를 죽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너는 내 부모를 죽였어.

그런 거여야 해.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그랬어야 해.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어.

왜 그러지 않아서…….

또 나를 죽음 앞에서 흔들리게 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머리가 뿌예져 갔다. 엘리자베스의 눈빛을 바라보던 케이가 못 참겠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떡할 건 없어. 그냥 넌 날 사랑하지 않으면 돼.”

“아니, 난 널 이용할 거야. 널 무참하게 괴롭힐 거야. 복수할 거야. 어쨌든 네가 내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간 건 변하지 않아. 난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냄새가 날 제 손가락에 코를 박고 얼굴을 찡그린 케이의 손을 잡았다. 케이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케이의 숨이 엘리자베스의 코로 바로 들어왔다. 배가 고팠다. 허기가 졌다. 엘리자베스가 애원하듯 케이의 허리춤을 잡았다.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가 손을 뗐다. 엘리자베스는 제 손바닥에 묻은 액체를 보았다.

붉은 피였다.

끔찍한 혈향이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한 입에 삼켰다. 엘리자베스는 삼켜진 채로 웅얼거렸다.

“……다른 남자랑 행복할 거야…… 흡…… 넌…… 넌 나 때문에…… 흡…… 불행할 거야…….”

케이는 혀가 섞이고 입술이 부딪히는 바람에 자꾸만 끊기는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너 때문에 나는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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