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86화
“에밀리, 이쪽을 한 번 봐주세요! 에밀리!”
웨스트리오든 정문 쪽에는 수많은 여자들과 몇몇의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긴 치마 혹은 바지를 입은 여자들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역시 서프러제트의 한 사람으로 보일 뿐, 딱히 튀어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들 사이에 교묘하게 섞여들어 골목까지 걸었다. 기자처럼 입은 한 남자와 함께. 하지만 그 남자는 기자가 아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윌리엄 조쉬. 웨스트리오든 교도소의 수용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윌리엄 조쉬는 대체 교도소 내부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절뚝거리는 다리로 엘리자베스를 따라 걸으며 중얼거렸다.
“나를 업고 나오다니.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겁니까.”
엘리자베스는 눈 한쪽이 부은 조쉬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마차 같은 건 기대하지 말아요. 그런 건 가지고 올 수 없었으니까.”
“시체를 가지고 나오느라 바빠서 말이오?”
조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움찔했다. 엘리자베스는 악어에게 뜯어 먹힌 시체를 케이 몰래 빼돌린 순간. 손의 감촉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었다. 왜 그 시체에게서는 그토록 달콤한 향이 났을까. 그 시체. 사실은 몰록에게 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시체에게 몰록의 털이나 살점, 손톱 따위가 묻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까지 달콤할 이유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몰록이 하일 강 근처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것을 확신했다. 왜 하필 하일 강일까. 수영을 할 줄 알아서? 아니면…… 엘우드 밀이 두려워서.
엘리자베스는 놈이 지성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놈과 대화 같은 것도 가능했으니까. 그렇다면 몰록은 엘우드 밀이 자신을 찾으러 다닌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몰록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래서 자신의 흔적을 일부러 남기지 않기 위해 하일 강의 악어처럼 행세를 한다면?
엘리자베스가 읽은 수많은 과학자들은 인간만이 이 생태계에서 지성을 가진 생물이라고 여겼다. 신을 닮은 피조물. 그러나 몰록은 인간이 아니면서 동시에 생물이었다. 그렇다면 신을 닮은 인간과 대척점에 있으면서 지성을 가진 몰록은 무엇인가. 악마를 닮은 피조물? 이 말을 들으면 신학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신학자들은 언제나 창조는 신만의 영역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빛을 만든 것이 신이듯, 어둠을 만든 것도 신이라고.
그럼 몰록이라는 어둠을 만든 것도 신이란 말인가.
왜.
왜 신은 인간들에게 어둠을 하사하고 싶은 걸까.
대체 뭔 놈의 심술궂은 신이.
엘리자베스는 영악한 몰록이 리오든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물어뜯고 다닌다는 것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엘우드 밀은 몰록의 개체수가 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치료제 덕도 있지만 몰록이 자신에게 당한 피해자를 대부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처럼 도망친 자가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엘우드에게 치료제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일단 케빈의 말을 들으면 엘우드의 몸에는 치료제가 없었던 게 분명했다. 엘우드는 몰록을 쫓는 동안 치료제를 어딘가에 숨겼겠지. 그게 어디였을까?
리오든에 있는 빈민구제원? 수녀원이나 수도원?
가능성은 너무 많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두운 골목길에 다다르자마자 썩어가는 음식물이 들어있는 통을 뒤집어 음식물들을 쏟아내고 그 통 위에 조쉬를 앉혔다. 조쉬는 그 위에 앉아서 헉헉거렸다. 체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다리부터 살폈다. 엘리자베스가 조쉬의 발목을 쥐고 이쪽저쪽으로 돌리자 조쉬가 신음을 내지르며 말했다.
“나한테 복수하려고 데리고 나온 거요?”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재킷 안감을 뜯어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뼈의 문제는 아니에요. 관리만 잘하면 비올 때 시큰거리는 정도에서 끝날 거예요. 왼발은 당분간 쓰면 안 돼요. 다리를 절면 도망자 신세로도 오래 못 가는 거 알고 있겠죠? 얼마 안 된 상처네요. 어디서 당했어요?”
“교도관들. 총살당하기 직전의 수용자들은 저들한테 좋은 놀잇감 아니겠소.”
조쉬가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바드득 갈며 조쉬의 발목에 천을 감았다. 부목이라도 있으면 나을 텐데 그런 것 따윈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처치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조쉬가 말했다.
“난 당신을 죽이려고 했소.”
“안 죽였잖아요.”
“그래도 그러려고 했소. 실패한 거지.”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발목을 칭칭 감싸 매다가 멈췄다. 그리고 조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두 번 구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 번은 의회 청사에서겠고, 또 한 번은 언제지?”
엘리자베스는 조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쉬가 모르는 언젠가, 언젠가 조쉬는 엘리자베스를 구해준 적이 있었노라고. 그런 말은 작별 인사로는 적당치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내어준 칼몽 여관 기억나요? 해미쉬의 사촌이 하는 곳 말이에요.”
조쉬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 부르튼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기억나지.”
‘옷을 갈아입고 근교로 가시오. 노스웨스트 리오든에 있는 칼몽 여관 주인인 해미쉬의 사촌동생이 나를 잘 알고 있소. 그녀에게 내 이름을 대면 하루 정도는 쉬어가게 해줄 거요. 거기서 쉬었다가 행선지를 정하고 내일 동이 트기 전에 리오든을 떠나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이전 생에서 조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옷으로 갈아입고 노스웨스트 리오든으로 가요. 해미쉬의 사촌에게 제가 이야기해놨어요. 하루 정도는 쉬어가게 해줄 거예요. 말도 한 필 준비했으니 내일 동이 트기 전에 국경을 넘어요. 윌리엄.”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 조쉬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여관장이 그렇게 순순하게 매수되는 사람이 아닐 텐데.”
윌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하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입을 맞춰주나?”
윌리엄은 엘리자베스가 발목을 꽉 묶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능글맞은 목소리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윌리엄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닥쳐요. 이제…….”
엘리자베스는 눈이 팅팅 부은 윌리엄 조쉬를 보며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이제 살아남는 것만 신경 써요. 혁명이니 무정부주의니 하는 것 따윈 신경 끄라구요. 당신은…. 당신의 목숨은 이 썩어빠진 리오든보다 소중한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리엄이 눈을 감았다. 윌리엄은 뭔가 생각하는 척하며 코 밑을 쓱쓱 닦았다.
그때 골목길 저편에서 여자들이 행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밝히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던 윌리엄이 말했다.
“그 말은. 그 말은 틀렸소. 저들을 보시오. 우리는…… 우리는 이 썩어빠진 리오든의 하나요. 썩어빠진 귀족들과 자본가들만이 리오든과 레본의 전부는 아니란 말이오.”
엘리자베스는 조쉬가 ‘우리’라는 말을 쓰는 걸 보면서 이 냄새나는 골목길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내가 언제나 ‘우리’이길 바랐던 단 한 사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오늘 보기 좋게 속여 넘긴 그 남자를 떠올렸다. 지금쯤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 것을 깨닫고 분노로 떨고 있을 한 남자.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살아나갈 너.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오만한 미소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며, 삐뚤어진 콧대 따위를 떠올렸다. 윌리엄 조쉬의 말이 맞았다. 썩어빠진 귀족이며 자본가가 리오든의 전부는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려 리오든에 첫발을 내딛던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주었던 더러운 소년.
엘리자베스에게 리오든은 한때 그 소년이었다.
윌리엄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할 거요. 걱정하지 마요. 내가 붙잡히면 당신도 위험해지는 건 걸 알아. 두 가지만 부탁하지. 대장 동지가 죽으면 시가지에 걸린 그의 목이 썩어서 떨어지기 전에 그의 머리 밑에 바이올렛을 한 다발 놔줘요. 그가 농노이던 시절, 영주에게 치욕을 당하고 영주의 부인에게 맞아죽은 그의 아내가 바이올렛을 좋아했다고 들었소. 내 목이라고 생각될 그 불쌍한 시체의 머리 밑에도 놔주면 좋겠군. 내 형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던 그 농노 아이도 꽃을 좋아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윌리엄의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인민해방회의 사연 같은 건 더 알고 싶지 않았다. 더 안다고 해도 달라질 수 있는 건 없었다. 미래에서 온 사람조차 과거를 바꾸지 못하지 않나. 심지어 엘우드 밀이 기억을 놓아버린 지금, 어떤 마법을 부린다 해도 대장이 사랑했던 여자나, 윌리엄과 관계가 있을 농노 아이를 살릴 방법 따윈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가시밭길 같은 현재를 살아가야만 했다.
“그럼. 가요.”
엘리자베스는 윌리엄에게 짧게 말했다. 그리고 골목길 근처로 여자들의 행렬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를 노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여자들의 행렬 안으로 끼어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행렬과 합류하기 직전 골목길을 돌아보았다.
윌리엄은 없고 엘리자베스의 버려진 재킷만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안도했다.
엘리자베스가 행렬 속에서 팻말을 든 여자들과 함께 걷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여자들이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걸었다.
“웃옷이 없네요. 왜 없어요? 내가 담요를 줄게요.”
엘리자베스는 낯선 사람의 호의 앞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정말.”
엘리자베스는 상류층으로 보이는 한 여자의 손에서 담요를 받아들고 숄처럼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다른 여자 하나가 엘리자베스에게 촛불을 주며 말했다.
“빛이 어둠을 쫓아냈어요.”
엘리자베스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팻말을 든 여자들 무리를 보며 생각했다.
조지 왕자는 정말 레트니가 만든 어둠을 내쫓을 만한 자일까?
엘리자베스는 조지 왕자가 한 말을 떠올렸다.
‘네 부모를 죽인 게 아직도 화마라고 여기느냐?’
오늘 오전, 레트니의 조각상 앞에서 조지 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네 부모를 죽인 건 보비들의 총이었다. 로빈스라는 폭도 놈이 지른 불이 아니라 보비들의 총 말이다. 그 보비들을 움직인 건 내 아버지였다. 그래. 내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어. 케이 하커가 그것을 막고 싶어 아버지에게 엄청난 돈과 토지를 가져다 바쳤지만 그건 전부 무용지물이었어. 아버지는 공작 부부의 입을 막고 싶어 했거든.’
‘케이가…… 제 부모의 죽음을 막고 싶어 했다구요?’
‘그래. 케이 하커가 말하지 않더냐? 네 부모는 멍청했다. 아버지 같은 분에게 협박이 먹힐 거라고 믿었지. 케이와 너의 약혼이 틀어지면서 생긴 여러 가지 부채 문제를 아버지를 협박해 해결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케이, 그자가 그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네가 풀려나게 만들려고도 엄청난 돈을 썼을 거다. 케이와 아버지의 약속은 그 엄청난 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공작부부를 멸문시키고 목숨은 구해주는 것이었으나…… 내 아비는…… 레트니 클레몬트는 약속을 지키는 남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