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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84화 (18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84화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로킨트 저택에 내려주고 토비를 불렀다. 토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리자베스를 걱정스럽게 보며 얼른 케이에게 달려왔다.

“토비. 켄드릭이 이곳을 방문했나?”

“예? 큰 도련님이요? 아니요. 그분이 오시기로 하셨어요?”

토비는 로킨트 저택으로 옮긴 프란시스가 걱정되는 눈으로 물었다. 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토비의 머리를 헝클였다.

“아니. 오기로 한 일은 없다. 하지만 켄드릭이 곧 찾아올지도 몰라. 켄드릭이 오면…….”

케이는 현관문 앞에서 케이를 힐끔 보곤 안으로 들어가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리고 궁전에서 자신의 품에 안겨 벌벌 떨던 엘리자베스의 감촉을 떠올렸다.

왜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들까.

케이는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좇았다. 문이 닫히고 케이가 말했다.

“이런저런 행패를 부릴지도 모른다. 알고 있겠지?”

“예? 아, 예…… 뭐. 큰 도련님 성질은 저도 잘 압니다. 도련님.”

토비의 말에 케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마차 좌석을 드러내고 안에 있는 커다란 장총을 토비에게 건넸다. 케이는 눈이 휘둥그레진 토비가 휘청거리며 장총을 받아드는 것을 보았다.

이 작은 소년에게 장총을 내미는 것이 맞는 일인가.

케이는 3개월 전 멜니아를 떠나기 전 자신이 토비에게 권총을 주었던 때를 떠올렸다. 토비는 그때 두려워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권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던가. 케이는 토비의 얼굴에 난 흉터를 보며 입을 열었다.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를 지켜줘. 이번에도 잘 해주면…….”

“고용 계약을 연장해주시는 거죠?”

토비는 긴장한 표정을 숨기려 애써 웃으며 말했다.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용 계약 연장은 없다, 토비.”

케이의 말에 토비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왜, 왜, 왜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도련님? 전 정말이지 마구간을 잘 돌볼 수 있어요, 도련님. 물론 제가 다른 부잣집의 마부들처럼 멋진 모습으로 문을 열어드리는 데에는 약간 떨어질 수 있지만 저만큼 골목길 운전을 잘 하는 마부는 없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도련님. 저도 그간 제가 과분할 만큼의 임금을 받아온 것 알고 있어요……. 임금을 조금 깎아서라도 저는 도련님한테 마차를 계속 태워드리고 싶어요, 네?”

토비가 다급하게 말하자 케이가 토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토비. 토비…….”

“도련님.”

“그만. 넌 너무 어려, 토비. 네가 올해로 나이가…….”

“열여덟 살이에요.”

“거짓말 마라. 넌 열여섯이야. 널 처음 만났을 때 네 나이가 열넷이었는데, 어떻게 네 나이가 두 해만에 열여덟이 될 수가 있냐.”

케이는 토비의 정수리를 콩 하고 주먹으로 때렸다. 토비는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민들도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박람회가 무사히 끝나고 엘우드 밀이라는 놈의 기억도 돌아오면 엘리자베스가 위험에 처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다. 프란시스도 마찬가지고. 그때가 되면 너는 학교에 가라.”

“엘우드 밀이요? 아니, 학교요?”

토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이를 보았다. 토비는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도련님. 고향에 제 동생들이 두 명이나 손가락 빨고 있어요. 저번에 주신 돈…….”

“설마 네 부모가 또 날려 먹었냐?”

케이는 이를 아드득 갈았다. 토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 들어. 고개 들어라 토비.”

토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케이가 토비의 이마에 딱밤을 놓으며 말했다.

“사내새끼가 질질 짜기는. 네놈 임금은 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내가 내줄 거다.”

케이의 말에 토비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제, 제가 학교에 다니는데 임금을요? 도련님. 그건…….”

“당연한 거다, 토비. 어린놈들은 학교에 다녀야 하는 거야. 공장이나 마구간에서 일할 게 아니라.”

케이는 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토비는 케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비 또래의 아이들은 전부 다 이미 직장을 구해서 일을 했다. 공장에 취직한 게 제일 좋은 일자리였고 토비처럼 마구간에서 자거나 농장에서 잡일을 하는 것도 꽤 괜찮은 일자리에 속했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네 자식이 태어나거나, 너도 다 커서 너처럼 어린 자식들을 만나게 되면 말이야. 어린놈들은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걸.”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토비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래도 네가 일을 똑바로 안 하는 한량 같았으면 이런 기회는 주지 않았을 거야, 토비. 그러니까 똑바로 공부하고 열아홉이 되는 날부터 일을 시작해라. 그때 널 비싼 값에 사가는 사장 놈이 없으면 내가 널 고용해주마.”

토비는 케이의 손에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올리며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토비는 케이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학교 마치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 꼭 돌아올 거예요. 그런데 어차피 돌아올 건데도 학교에서 배워야 하나요?”

토비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고 토비의 목덜미에 손을 둘렀다. 일반 성인 남자보다 훨씬 커다란 케이는 토비보다 훨씬 큰 덩치로 토비를 짓궂게 짓누르며 말했다.

“그래. 그래야 한다, 토비. 네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어렸을 때는 배워야 하는 거야. 교육은 직업을 위한 게 아니라고, 이 자식아. 이리 와. 어어? 이리 오라고 했다.”

케이는 자신의 장난이 이어지자 장난스레 도망가는 토비에게 손을 뻗었다. 토비는 장총을 들고 저 멀리 꽁무니를 빼고 소리쳤다.

“저 사실…… 공부는 싫은데요!”

* * *

그날 밤, 케이는 앰버와 함께 솔치노 골목에 있는 커피 하우스에 들렀다. 두 사람은 커피 하우스에서 에그 크림과 위스키를 마시고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밤거리를 산책하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을 목격한 귀족들과 젠트리들이 꽤 많았다.

케이의 팔짱을 끼고 앰버가 말했다.

“내일 아침이 되면 리오든에서 오늘 밤 우리 둘이 데이트했다는 걸 모르는 가문은 하나도 없을 거야.”

“그렇겠지.”

케이의 대답에 앰버가 한심하다는 듯이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겠지? 난 네가 이럴 때마다 정말 머저리 같아, 케이.”

“누가 내가 머저리가 아니라고 해?”

케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앰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앰버의 코에 붙은 작은 실밥을 떼 주었다. 주변에 있던 귀부인 하나가 얼른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자신의 시종에게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앰버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토 나와.”

“참아.”

케이가 으르렁거렸다. 앰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이봐. 넌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조지 왕자가 너와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려고 한다면 결혼하는 게 맞아. 너는 지금 온갖 핑계란 핑계를 찾아 엘리자베스를 붙잡는 게 맞다고. 엘리자베스한테 물어봤어? 그 사랑한다는 남자 정말 있는 게……”

“맞대.”

케이는 단칼에 대답했다. 케이는 하커 가의 인장을 단 마차 문을 열고 앰버에게 손을 뻗었다. 앰버는 당황한 얼굴로 케이의 손을 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맞다고? 정말 그 신분도 불명확한 이상한 남자를…….”

’그런데 일전에 말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거…….’

케이는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의 문 앞에서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눈에 슬픔을 잔뜩 담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표정도.

케이는 기묘한 꿈 덕분에 이제 알고 있었다. 엘우드 밀은 단순한 신분이 불명확한 남자가 아니다. 그 남자는…….

‘시간여행기를 발명한 남자다.’

케이는 자신의 추측을 어디에도 털어놓기 힘들었다. 심지어는 케빈 퍼킨에게도. 사실 케이가 들고 있는 정보는 너무 적고 주관적이었다. 그러나 케이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꿈 때문만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에게 시간여행기를 채워주던 엘프처럼 하얀 얼굴의 엘우드 밀, 그 남자가 하던 이상한 말들……. 그런 꿈 때문만은 절대 아니었다.

’열흘이 지나고 나서도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파혼해줄게, 케이 하커.’

’몰라. 그냥 갑자기 변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날 사랑하지 않는 것들은 사랑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케이 하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변한 지점을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변했고, 파혼을 원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보여준 열렬한 구애는 케이가 보기에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고 케이는 언제나 그것이 연기만 날리며 꺼지는 순간을 예상해왔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파혼을 원했을 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드디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그만둔 거라고 여겼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거라고.

하지만 이제 보니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정신을 차린 게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보았던 것이다. 아직은 케이가 꿈으로 접하지 못한 무궁무진했을 두 사람의 지옥을.

’우린 보통 부부들과는 달라. 알고 있잖아.’

케이가 처음 꾼 꿈으로 미뤄봤을 때 만약 정말로 엘리자베스가 겪었던 미래에서 케이와 결혼을 했었다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별로 순탄치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탄할 리가 없었다.

’‘앞으로도 공녀 년의 혼을 쏙 빼놓아라. 너도 밥값은 해야지. 그년은 우리 집안의 보배가 될 게야, 케이.’

두 사람의 결혼은 그런 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귀족들에게 편입되길 원했던 돈만 많은 허영심 넘치는 자본가와, 돈에 쫓겨 딸을 팔아먹기로 결심한 귀족의 탐욕스러운 만남으로.

그러니 행복할 리가 없었다.

이전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앰버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마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앰버는 케이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그렇더라고 해도 애원해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나를 사랑해달라고. 한 번 말이라도 해볼 수 있잖아. 애원하지 못할 이유가 뭐야? 너는 목숨도 내놓았는데, 목숨보다 자존심이 소중해? 우스워, 케이 하커.”

앰버의 말에 케이는 상의를 다 갈아입고 자신의 재킷을 앰버의 얼굴에 던졌다. 그리고 바지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앰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존심 같은 건 없어. 사랑한다고도 말했어.”

“그런데?”

케이는 상의도, 하의도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마부에게 손가락으로 지시했다. 하커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가 웨스트리오든 거리에 멈춰 섰다. 케이가 말했다.

“그런데는 없어. 엘리자베스는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했으니까.”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앰버가 눈을 떴다. 앰버가 케이의 팔을 잡았다.

“……조심해. 여긴 웨스트 리오든이야. 어?”

케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케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케이는 이제 목숨 같은 건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살아서도 죽어서도 지옥뿐일 것이다. 

너는 너를 닮은 괴상한 과학자한테 갈 거고, 나는 적어도 네가 살아갈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만들면, 그냥 그걸로 된 거겠지.

엘리자베스.

아니,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마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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