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83화
컬로든에 조지 왕자를 알현하러 온 모든 귀족들은 분명 그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다. 컬로든은 지금 거대한 추모의 공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직 레트니는 살아 있었지만 모두들 레트니의 부재를 슬퍼했고 안타까워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왕자가 레트니와 닮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레트니보다 훨씬 더 영악하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조지 왕자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사이에 케이는 귀족들 몇몇에게 잠시 붙잡혔다. 조지는 케이를 기다리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다음 공간으로, 또 다음 공간으로 자꾸 이끌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멀어지는 것이 불안했지만 조지의 손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케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 조지는 거대한 레트니의 조각상 앞에 멈춰 섰다.
석고로 만든 조각상은 조지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커다란 종마를 타고 힘차게 달려가는 레트니의 모습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조각상에 있는 용맹한 레트니의 표정에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어서 조금 놀랐다. 레트니에게는 늘 표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지는 많은 방문객들이 레트니의 조각상을 보며 레트니를 무척이나 닮았다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전하.”
“그래?”
그때 조지가 되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조지를 보았다. 그러자 조지가 다정한 미소를 지우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냐. 아버지에게 이런 표정이 있었단 말이야……? 어땠느냐, 엘리자베스. 너는 이 레본을 시끌벅적하게 한 의회 청사 테러 사건의 목격자가 아니냐. 너는 케이 하커의 칼에 찔린 아버지의 표정이 어때 보였느냐.”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에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방문객도, 시녀나 궁궐지기도 없이 오로지 통로를 지키는 근위병만 남은 전시장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싸늘해졌다.
엘리자베스는 눈으로 케이를 찾았다. 통로 저 끄트머리에서라도 케이의 실루엣을 발견하길 바라며 말이다. 하지만 케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불안감이 온몸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분은 용맹하고 초연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대답과는 달리 고통으로 일그러지던,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 같던 레트니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용맹했다. 초연했다. 그래. 신문에도 그런 기사가 났지. 케이 하커는 레트니 국왕의 명을 받고 국왕을 찔렀다. 그렇게 말이야.”
조지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으며 용맹하고 초연한 석고 조각상의 표정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레트니의 목소리에 담긴 저의를 읽으려고, 그 와중에 케이를 눈으로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겠지. 케이 하커는 그저 의회 청사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국왕을 찔렀다. 아버지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셨을지는…… 글쎄.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내가 아는 아버지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야.”
조지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발을 쿵하고 굴렀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웅크렸다. 조지가 말했다.
“짐이 곧 국가다! 짐이 곧 레본의 역사고, 미래다. 그러니 짐의 목숨이 레본의 목숨인 게야.”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돌변해 레트니와 똑같아진 것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지가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레트니처럼 굳어진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얼굴을 풀었다.
조지가 말했다.
“그렇지 않느냐.”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지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더니 슬픈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조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조지의 팔을 잡았다.
조지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버지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평생토록 말이야. 아버지는…… 내 아버지는 아직도 어머니와 니콜슨 공작을 손아귀에 쥐고 내 목을 옥죄고 싶어 하시지. 레본은 아버지의 손에 썩을 대로 썩었는데도 레본의 고혈을 짜내고 싶어 해.”
엘리자베스는 조지가 갑작스레 무너지는 것을 보며 조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조지의 숨이 거칠어졌다.
“넌 모른다. 나는 아버지를…… 흡,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어. 정말이지 그랬다. 어젯밤, 아버지가 보낸 자객이 침입하는 일만 없었다면…… 흡, 나도 아버지를 컬로든에서 내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설득할 생각이었어…… 흡, 아버지를…… 아버지를 다시 왕좌에…….”
거칠다 못해 점점 급해지고 숨을 내뱉는 시간이 들이마시는 시간보다 짧아졌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숨소리를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하. 전하, 숨을 천천히 쉬셔야 합니다.”
과호흡이 오실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려고 할 때, 조지가 자신을 팔을 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넌, 넌 어느 편이냐, 엘리자베스.”
조지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붉은 눈을 보며 근위병들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으로 조지의 팔을 잡고, 그의 손목에 손가락 두 개를 가져다 댔다. 조지는 엘리자베스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피식 웃었다.
“내가 걱정이 되는 거냐?”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걱정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전하. 이건 저한테 숨 쉬듯이 당연한 일입니다. 제 행동에서…….”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엘리자베스에게 온 기회였다. 조지 왕자를 속이고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게 할 기회.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동시에 그렇게 온 기회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미워하는 아버지의 조각상과 초상화 속에 둘러싸인 채 거친 숨을 내뱉는 이 나약한 인간에게 진심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심을.
“제 행동을 믿지 마세요. 저를 믿지 마세요. 전하. 저는…… 저와 케이는…… 그저 살고 싶을 뿐이에요. 의회를 테러한 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저 살고 싶었을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잔인한 처형을 주도했던 대장의 얼굴을, 자신을 구해줬으나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조쉬의 얼굴을, 그리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겁에 질려 있던 자본가들과 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 모두 자리를 바꾸면 같은 처지일 뿐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라도, 다들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왜 죽음을 자초해. 왜.”
조지가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맥박이 조금 빠를 뿐 정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느끼고 조지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엘리자베스는 조지를 보며 말했다.
“그건 그저 그렇게는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겁니다. 전하. 여전히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여자들, 노동자들, 어린 아이들도, 다 살고 싶은 것일 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는…… 이렇게는 살 수가 없으니까. 전하도 그러시잖아요. 전하도, 이렇게는 살 수 없으신 거잖아요……”
엘리자베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조지에게 애원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를 둘러싼 수많은 레트니의 조각상들을 바라보았다. 조지가 제 친모와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진 이유는 결국 레트니 때문이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의 조각상을 잔뜩 모아놓은 조지가 미쳐버리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살고 싶다는 데에는 적어도 지옥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이 포함되는 게 아닐까.
엘리자베스 역시 괴물로는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도 적어도 그런 지옥은 싫었으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은 조지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조지의 호흡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조지는 살짝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쓸어올렸다. 조지가 말했다.
“너는 내 편이 되어라. 엘리자베스. 너도 알겠지. 케이 하커의 목줄을 조일 수 있는 인간은 이제 리오든에 너밖에 남지 않았어. 케이 하커는 위험한 자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하지만 너와 난 달라. 나에게 케이는 언제든 국왕을 찌를 수 있는 남자라 위험한 것이고, 너에게 케이는 언제든 널 위해 국왕도 죽일 수 있는 남자라 위험한 것이야. 케이를 데리고 나에게 와라. 나에게는 케이의 돈과 명예, 아니, 그의 모든 것이 필요하다.”
“……전하.”
엘리자베스가 조지의 말에 안타깝게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조지가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엘리자베스의 말을 막았다. 조지가 말을 이었다.
“네 부모를 죽인 게 아직도 화마라고 여기느냐?”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지를 보았다.
* * *
엘리자베스가 전시장을 나와 귀족들이 모여 있는 정원으로 나오자마자 케이 하커가 엘리자베스에게 뛰어왔다. 케이는 주변을 살피며 엘리자베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조지 왕자는?”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중간에 용무가 있으셔서 집무실로 올라가셨어.”
케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위아래로 살폈다. 엘리자베스가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된다는 듯이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누군가가 때리기라도 했을까 봐 무서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케이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야 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케이의 팔을 잡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려왔다. 케이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화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거짓말.”
“……진짜야. 그냥 레트니 얘기를 했어. 나를 조금 추궁했고…….”
“추궁?”
케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성난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케이의 팔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감았다. 엘리자베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의회 청사에서 본 것들이 생각났어. 불타버린 사람들, 갈비뼈 사이를 찔려 숨을 꺽꺽거리다 죽은 신사들, 솔튼 빌리스의 이마에 난 총구멍…….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비극에 관심이 많을까. 속이 안 좋아.”
엘리자베스는 지친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기둥 뒤로 데려갔다. 귀족들의 시선 안에 잡히지 않는 장소였다. 엘리자베스는 기둥 뒤로 들어가자마자 케이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살짝 울었다.
“네 말이 맞아. 시체를 보는 건 그만 둬야겠어. 약속해……. 내가 없어도 잭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잭을 구해내겠다고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울먹거리자 케이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뺨을 매만지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약속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자신의 쪽으로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몸으로 케이에게 꼭 안겨 조금 더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