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82화
조지 왕자는 엘리자베스를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어느새 조지 왕자를 수색하듯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조지 왕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름답구나, 내 동생.”
엘리자베스는 조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레트니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 같아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엘리자베스는 차마 조지를 다시 보지 못하고 건너편에 있는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굳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다면, 말하라는 듯이.
저 미친 자식.
저 미친 자식을 믿는 나는 뭘까. 이런 알현실에서 케이에게 한 번 배신을 당한 일이 있지 않나. 그런데도 왜 나는 케이 하커를 믿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건 지나간 사랑에 대한 미련인가. 아니면 이제는 우리가 ‘우리’가 되었다는 믿음인가.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배신했고, 엘리자베스의 목숨을 구했다. 왕의 편에서 엘리자베스의 부모를 죽였고 엘리자베스를 구하기 위해 왕을 찔렀다. 케이는 배신자였지만 여전히 엘리자베스의 구원자이기도 했다.
너를 잃더라도, 너만큼 내 인생에서 이상한 놈은 다시없을 거야. 그리고 그럴 때마다 네가 생각나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조지 쪽을 다시 보았다. 조지의 입꼬리는 레트니가 웃을 때처럼 활짝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눈은, 그 눈만은 레트니와는 달랐다. 거기엔 수많은 감정들이 얽히고 설켜 있었다. 그것이 엘리자베스에게 유리한 것이든, 불리한 것이든.
“부끄럽습니다. 폐하.”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지가 막 나온 전식 접시 위에 놓인 스프를 숟가락으로 건드리며 싱긋 웃었다.
“아니야. 정말로 아름다워. 어렸을 때도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감히 너에게 말을 걸 생각은 하지 못했지. 너는 아무하고도 눈을 맞추지 않았지 않느냐. 나하고도 말이야.”
조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자가 정말로 엘리자베스를 기억하는 것일까?
정말로 엘리자베스를 기억하는 것이든 그저 그녀를 놀리려는 것이든 적절한 변명을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저, 저는…… 그저 너무 부끄러워서…….”
부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자신을 왕자나 공작의 아들들과 결혼시켜 어떻게든 몰락해가는 자신들의 처지를 일으켜 세울 궁리만 하는 부모. 그 부모의 욕망의 산물이었던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모두가 자신의 가족들의 뻔한 수작질을 알아채고 있다고 여겼다.
“정말이냐? 그 어린 소년들은 모두 너와 눈이라도 한 번 맞춰보고 싶어서 뒤에서 내기도 했었는데. 크큭…… 네가 전혀 몰랐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조지를 보았다. 조지는 다정하게 웃으며 과거에 대한 잔향이 남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볼 뿐, 그녀를 놀리려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조지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조지가 말했다.
“어쨌든. 그런 네가 아직도 혼처를 구하지 않았다니 놀랍구나. 이미 네 나이 대의 왕실의 여인들은 혼처를 구하였거나 이미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있어. 너 역시도 몇 개월 안에 혼처를 구할 생각이겠지?”
조지는 그렇게 말하며 식전주 다음으로 나온 와인으로 입을 적셨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조지의 시선을 느끼면서 와인을 마셨다. 엘리자베스는 적당한 말을 머릿속으로 골랐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궁리는 없었다. 조지는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재결합을 바라고 있고, 엘리자베스는…….
3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케이는 미친놈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한다는 환상에 붙잡혀 있고, 그런 상태에서 엘리자베스가 죽는다면 케이 하커는 또 다시 신시 주식회사인지 뭔지 그 위험한 곳으로 가서 혁명을 돕거나 돈을 벌거나…… 아니, 대체 뭘 하는지는 몰라도 또 목숨을 내놓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지금이 좋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믿고 그 사실 때문에 조금 괴로워하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고통을 손 안에 쥐고 녀석을 괴롭히고 복수를 하고 통쾌해하고.
그렇지만 사랑은 아닌.
지금 이 상태가 엘리자베스는 딱 좋았다. 이 지옥 같기도, 천국 같기도 한 인생을 3개월간 지속할 수만 있으면, 그러면 딱 좋을 것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전하. 저는 아직 혼처를 구할 생각이, 아니, 아직이 아니라 혼처를 구할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레본에서 저처럼 직업이 있는 여성을 제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 할 남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있다고 해도 저와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남자들은 견디지 못할 겁니다, 전하. 홀램브로 학술지에 얼마 전 방사선에 관한 논문을 쓴 여성 학자가 있습니다. 레본보다는 여성 과학자가 많은 갸흐통 출신의 학자입니다. 그런데 그 학자도 갸흐통에서 입에 담기도 힘든 염문에 시달렸다고 하더군요. 남편과 아내 둘 다 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신사 복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지도 그제야 엘리자베스의 신사 복장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그녀의 복장을 보았다.
“보시다시피 저는 좀 이상한 여자가 아닙니까, 전하.”
조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리가 있는 법이야. 그리고 너의 자리는 여기가 맞다, 엘리자베스.”
“그럼 제 자리는 조금 외로운 자리겠죠. 전하. 저는 그냥 지금이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서로를 불행하게 하는 그런 생활은 원하지 않습니다, 전하.”
조지 왕자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내내 손에서 놓지 않던 잔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케이를 보았다. 조지가 말했다.
“케이 하커 씨의 생각은 어떻소? 이런 대화에 남자의 시선이 빠질 수야 없는 노릇 아니오. 뭐 나를 비롯한 귀족 신사들의 대답은 안 들어도 뻔하지. 그들은 고리타분하고 낡아빠졌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케이 하커 씨의 생각은 좀 다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조지는 정말 친근한 사촌 오빠처럼 엘리자베스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가 레트니를 닮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레트니를 닮았다면 이렇게 연기에 능숙할 수가 없었다. 레트니는 국왕에게 연기는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사람이니까.
케이는 조지의 질문에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아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궁중의 테이블 매너에는 익숙하지 않다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조지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케이는 그런 조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하. 저에게 진보적인 생각 같은 걸 기대하셨다면 안타깝습니다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는 오만하고 건방진, 특유의 표정과 몸짓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레본의 많은 남자들처럼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여성이 좋지, 책을 읽고 위험한 약물 따위를 취급하는 마녀 같은 여성은 별로입니다.”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위장이라는 것을, 손쉽게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허술해서야. 조지도 알아볼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얼굴을 보았다. 조지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케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케이가 말을 이었다.
“다만.”
시녀들이 칠면조 요리를 내려놓았다. 케이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마음에 재킷 자락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땀이 배어나왔다.
“다만 저 역시 그런 남자들과 저 자신이 별로 맘에 들지 않고 엘리자베스 양께서는 그런 고리타분한 남성 중 하나를 굳이 골라 결혼할 필요 같은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케이의 말에 조지가 씨익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낭패감에 고개를 숙였다. 조지가 말했다.
“그래. 그렇지. 맞는 말이야. 케이 하커 씨의 말이 맞다. 엘리자베스. 너는 그런 남자들을 골라 결혼할 필요가 없어.”
조지는 칠면조 요리를 직접 자르려고 꼬챙이와 칼을 집어들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엘리자베스 쪽으로 걸어와 잘 익은 칠면조의 몸통에 꼬챙이를 쑤셔 넣었다. 쑤욱, 손쉽게 꼬챙이가 들어가면서 접시 위로 기름이 흘러나왔다. 조지가 말했다.
“너에게는 널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남자가 필요하지. 그런 남자를 골라 결혼하면 될 일이야.”
조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도 엘리자베스가 가진 낭패감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조지는 분명 엘리자베스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남자가 케이 하커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반쯤은 맞았고 반쯤은 틀린 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곧 자신의 접시 위에 올려지는 붉은 기가 도는 칠면조의 가슴 부위를 바라보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엘리자베스는 살과 뼈, 피의 냄새를 맡으며 오랜만에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또다시 그 환시를 보았다.
의회 청사 위를 기어 올라가는 거대한 괴물. 그 괴물을 쫓는 어지러운 시선.
엘리자베스는 냅킨으로 서둘러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눈을 칠면조 요리에서 돌리기 위해 케이를 보았을 때 엘리자베스는 자신과 똑같이 냅킨으로 입을 막고 있는 케이를 보았다.
왜.
왜일까.
잠시 의아했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조지가 칼과 꼬챙이를 내려놓고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보고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궁전 내부를 구경시켜 주마. 정원 산책도 시켜주고. 네가 여기 왔을 때가 3개월 전이었던가. 그때는 예배당만 보았겠지? 궁전 내부는 완전히 달라졌다, 엘리자베스. 아버지는 이제 컬로든에 계시지 않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기 위해 내가 궁전을 완전히 달리 꾸몄어. 방문객마다 아버지의 조각과 초상화를 보고 놀라워한단다. 어쩜 이렇게 아버지를 똑같이 그렸냐고 말이야.”
* * *
식사를 마치고 조지는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해 궁전 내부와 정원을 구경시켜주었다. 케이와 엘리자베스는 식사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 대화를 할 시간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정말로 조지가 궁전 내부와 외부에 레트니의 초상화와 조각을 잔뜩 배치해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대부분은 레트니가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죽으면 궁전에 배치하도록 그려놓거나 조각해놓은 것일 터였다. 레본의 대부분의 국왕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방문객들이 저마다 레트니의 초상화와 조각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다정하게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하는 조지를 보며 깨달았다.
조지 왕자는 레트니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