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81화
엘리자베스의 생각과는 달리 컬로든 궁의 앞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기자들이 몰려와 이목이 집중될까 봐 긴장했던 엘리자베스는 곧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막상 정원에 도착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정원에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엘리자베스는 컬로든 궁의 소박한 정원 이곳저곳에서 모여 잡담을 나누는 귀족과 자본가들을 보며, 정원을 화려하게 꾸며놓고 자신의 궁전에 온갖 지역의 귀족들을 다 불러 모아 매일 같이 파티를 열었다던 선더렌의 빛의 왕을 떠올렸다. 그는 스스로를 하늘의 태양, 빛 그 자체라고 부르곤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귀족과 자본가들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케이는 노골적으로 그들을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케이의 팔을 꽉 쥔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다 돌아버린 것 같아. 국왕 폐하가 병중에 계시고 나라 전체가 장례식 분위기인데…….”
엘리자베스는 귀부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풍기는 향수 냄새며 별로 재밌지 않은 농담에도 과장되게 웃는 신사들이 풍기는 시가 냄새를 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등을 가볍게 쓸며 말했다.
“아니. 돌아버리지 않았으니까 하는 일이야. 너무 제정신이라. 살아남아야 하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노골적으로 귀족들을 견제하면서도 얼굴에 인위적인 미소만큼은 지우지 않았다. 꼬투리를 잡히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로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때때로 발음하는 숙녀, 신사, 날씨, 따위의 단어에서 귀족의 억양을 감지했다. 케이 하커 역시 이전 생과는 완벽하게 변해버린 이 세상에 맞춰 변해가고 있었다. 이게 그를 위해 좋은 일일까?
케이가 궁전지기를 부르며 엘리자베스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귀족들 중 꽤 많은 수가 니콜슨 공작을 차기 국왕으로 원했어. 니콜슨은 뼛속까지 귀족들의 편이고 레트니와 많이 닮았으니까. 심지어는 왕비조차도 그랬지.”
엘리자베스 역시 신문을 읽었다. 솔튼 빌리스의 목을 시가지에 내건 이후 왕비와 조지 왕자의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는 기사가 많았다. 공식석상에서 왕비가 조지 왕자와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왕자비를 홀대하는 등의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조지 왕자가 왕비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은 실수를 했다고 논평하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그 이유가 솔튼 빌리스의 목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것일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왕비든, 조지 왕자든, 레본의 왕족이 겨우 체면 때문에 강력한 우군과 틀어지는 우를 범하는 일은 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이든 자본가들이든 니콜슨을 비호했던 이들은 안달이 난 거네.”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궁전지기를 바라보며 케이에게 대꾸했다.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화창한 여름 하늘 아래 소다수를 하나씩 들고 깔깔거리는 귀족과 자본가들을 보았다.
저 행복해 보이는 미소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공포가 서려 있는가.
엘리자베스는 저들이 가진 공포가 아니라, 그 공포가 만들어낼 수많은 허위가 두려웠다. 궁지에 몰린 귀족들이 무슨 짓을 할지, 이 변해버린 세상이 어디까지 제정신이고 어디까지 돌아버렸을지, 엘리자베스는 이제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곳은, 이 생애는, 엘리자베스의 이전 생과 전혀 다른 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조지 왕자님께서 두 분을 안쪽 알현실로 모시라고 하십니다. 케이 하커 씨. 그리고 엘리자베스……”
그때 궁전지기가 다가와 완벽한 궁중 예절을 갖추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궁전지기의 목소리에 깔깔거리며 웃던 이들 전부 잠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클레몬트 양.”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공기 중에 흐르던 흐름이 살짝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면 그 시선들은 신기루였다는 듯이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엘리자베스는 긴장한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하며 궁전지기의 안내를 따라 궁전 안으로 향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해.”
“뭘?”
“도망가고 싶으면 말하라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오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에스코트를 위해 접었던 팔을 펴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깍지를 끼었다. 케이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말하면…… 같이 도망가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절절하게 느꼈다.
이제 이 엉망이 된 세상에서 도망칠 수 없다. 이곳을,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건 엘리자베스였으니까.
* * *
조지 왕자는 소문만큼 호탕한 성격을 가진 남자였다. 조지는 두 사람의 인사를 받기가 무섭게 식사를 했는지부터 물었다. 원래 왕족이 식사를 제안할 것이라면 초대 때부터 얘기가 오고가는 것이 예사였다. 하지만 조지는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엘리자베스를 위해서 칠면조와 대구 튀김 따위를 즉석에서 내오게 주문했다.
엘리자베스는 이 시원시원한 식사 권유가 무슨 의미일지를 생각하느라 식전주를 거의 즐기지 못했다. 조지는 엘리자베스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식전주를 쉴 새 없이 따라주며 말을 시켰다.
“사냥터에서 본 적이 있어. 정말 생각이 안 나느냐? 넌 정말 작았다. 이만했지.”
조지는 키득거리며 손으로 난쟁이보다도 작은 크기를 가늠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농담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대답했다.
“저에게 관심이 없으셔서 그러셨을 겁니다. 10년 전 쉐필드 사냥터면 제가 12살이었을 텐데요, 왕자 전하.”
왕자는 사과주를 단숨에 비우고 입을 닦아내며 푸른 눈동자로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십 년 전이라니. 그때 쉐필드는 참 좋았는데 말이야. 드넓은 평야에 키가 큰 나무들로만 이어진 숲…… 도시에서는 그런 나무 냄새 같은 건 더 이상 맡을 수가 없어. 케이 하커 씨는 도시에서만 살았으니 모를 거요. 참나무 냄새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말이오.”
왕자는 케이를 ‘씨’라고 부르며 사과주를 따라주었다. 케이는 사과주 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그런 숲 냄새를 맡아보고 싶군요.”
“기회가 되지. 암, 되고말고. 왕실에서 쉐필드 땅을 아직 팔지 않고 가지고 있다오. 예전에 있던 사냥터를 더 키워서 아예 거기에 별장을 지을 생각입니다. 나는 십 년 전 쉐필드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생각나요. 우리 아버지께서 그때 킹스로드에서 커다란 백마를 사들였는데 그 녀석을 타고 사냥터를 누비셨지요. 어찌나 멋있으셨는지……”
엘리자베스는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사실 조지 왕자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십 년 전이라고 하지만 지긋지긋한 지평선만으로 가득하던 쉐필드에 살던 열 몇 살짜리 꼬마 여자애가 국왕이 쉐필드에 방문한 큰일을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그때 엘리자베스는 공작 부부가 입혀주는 제일 좋은 옷과 모자, 신발을 신고 사냥터에 국왕 폐하를 뵈러 갔었다.
뙤약볕에서 공작 부부는 오랫동안 서 있었고 엘리자베스는 더위 때문에 온몸이 젖어서 냄새가 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사실 기우였다. 국왕 폐하는 공작 부부의 선물을 받을 때만 잠시 공작 부부를 상대해주었고 엘리자베스는 왕비와 조지 왕자와 아주 잠깐 눈인사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공작 부부가 왕비와 몇 가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린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조지 왕자와의 시간이라는 걸 가지긴 했는데 그건 어른들이 그저 명목상 엘리자베스를 꿩 사냥에 빠져 있는 조지 왕자 곁에 내버려둔 것에 불과했다.
조지 왕자는 엘리자베스가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고 엘리자베스 역시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왕자는 물론이요 국왕 폐하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의 모든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건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커다란 실크 햇을 쓰고 목을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정말 건강하셨지요. 지금은…… 지금은…….”
조지 왕자는 괴롭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왕자를 보았다. 이번에야말로 그때처럼 목을 숙이지도 않았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왕자를 볼 수 있었다. 어린 날에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건 부모님 때문이었다. 공작 부부는 엘리자베스에게 왕자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으니까. 혹시라도 왕자의 비가 될 수 있다면 너는 이 나라의 모든 여자를 발아래 두는 것이라고. 여자의 신분은 남편의 신분에 의해 결정되므로 너는 반드시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 저 남자를 잡아야 한다고 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을 듣고, 그런 상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쉐필드에 갇혀 매일 같이 가정교사에게 호된 교육을 받고 때때로 벽장 안에 갇히고 농노의 자식들과는 말 한 마디 섞을 수 없어 친구 하나 없는 삶을 살면서 내내 생각해왔다.
사랑만은.
사랑만은 나의 맘대로 할 거야.
그건 유일하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고개를 들어, 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갈 남자를 바라보다, 그것을 동경하다 그걸 사랑이라고 믿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했을까. 여자들이 가장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바로 결혼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
엘리자베스는 그때 그 무모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지금도 어이가 없었다. 그건 어린 날의 만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 어린 날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숙이고 절대로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굴욕이 아니었다. 그건 자존심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격식을 갖춰 왕자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어떠신지요?”
엘리자베스는 건너편에 있는 케이를 보았다. 이 화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케이였다. 엘리자베스는 식탁 아래에서 케이의 손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궁전의 식탁은 너무 크고 넓었다.
조지 왕자가 말했다.
“몸은 나쁘지 않으시다. 그냥 정신이 별로 온전치 못하셔. 오늘 별장으로 떠나셨단다. 극비리에 떠나셨지. 앞으로는 컨트리하우스를 몇 개 사들여 아버지의 거처를 자주 옮겨드릴 생각이야. 이런저런 자극을 받다보면 정신이 좀 맑아지시겠지.”
조지 왕자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어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왕자의 목소리 대신 눈을 주시했다. 그의 말은 진심일까?
레트니가 정신이 맑아지길 바란다는 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