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80화 (18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80화

케이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공녀님이 할 만한 일이 아니야.”

“나 이제 공녀 아니야.”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조지 왕자가 너를 공녀로 만들려고 눈이 벌건 걸로 아는데.”

케이는 그렇게 말하다 엘리자베스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넌 공녀야.”

“어떡할 건데. 계획이 있다는 거잖아.”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물어볼 때 즈음 마차가 에렌델 스트리트에 도착했다. 케이는 속도를 줄이느라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마차 창문을 열고 주변을 보았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잭을 죽일 거야.”

“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쏟아지려고 했다. 케이는 재빨리 엘리자베스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잭을 시체와 바꿔치기 할 거야. 간수들이 잭이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뭐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돈을 좀 먹이면 경감에게 할 말이 생겼다고 좋아들은 하겠지. 어때. 확실히 공녀님이 볼 만한 광경은 아니지.”

엘리자베스는 마부가 마차 문을 열고 헛기침을 하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시체라면 너보다 내가 많이 봤어. 피나 살점, 뼈의 단면 같은 것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곤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케이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케이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화려한 거리의 풍경이 엘리자베스에게 갑작스레 다가왔다. 케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20분 정도면 될 것 같으니, 기다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자신의 팔 위에 올려놓고 에렌델의 한 신사복 가게로 향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앞에서 괜찮다고 했지만 시체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엘리자베스를 지나치는 행인들의 손에는 저마다 아름다운 양산과 신문이 들려 있었다. 어린 꼬마 소년이 그들을 지나가며 외쳤다.

“리오든 타임즈예요! 리오든 타임즈! 의회 앞에 목이 걸린 솔튼 빌리스 사진을 보고 가세요! 이마에 총구멍도 났대요!”

엘리자베스는 꼬마 소년의 환한 미소를 일별하며 케이의 팔을 꽉 잡았다. 케이가 속삭였다.

“괜찮지 않으면 지금 말해. 오늘 밤이야. 웨스트 리오든에 가는 거.”

엘리자베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시체, 라고 하면 떠오르는 의회 청사에서의 광경에 자꾸 집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위태롭게 바라보았다.

* * *

엘리자베스는 신사복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케이는 문고리를 잡고 그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신사복 가게의 통유리 창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뭐해?”

케이의 물음에도 엘리자베스는 통유리 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 하고 입궁해도 될까? 정말? ……피부가 많이 푸석푸석해졌는데…… 머리도 엉망이고…….”

엘리자베스는 전날 밤을 샌 것을 후회했다. 열흘 뒤에 강의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이런 얼굴로 입궁을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자 케이가 문고리를 놓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와서 가게 벽에 기대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뭘?”

엘리자베스는 유리에 비친 제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정말로 피부가 푸석푸석하고 머리가 엉망이라서 예쁘지 않다든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냐고.”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고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벽에 손을 짚은 채로 그 커다란 키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일부러 그러는 거지.”

케이는 통유리 창에 비친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뭘 일부러 그래?”

“너 스스로도 네가 예쁜 걸 아니까. 일부러 그러는 거야. 예쁜 걸 더 빛나 보이게 하려고.”

케이는 그런 말을 잘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옆을 휘휘 둘러보고 놀라서 케이를 보았다.

“야!”

“왜.”

“너 언제부터 나를 놀리는 데에 취미를 붙였어? 그만해.”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아니면 뭐야. 피부니 머리카락이니 그런 것 따위 때문에 정말 네가 뭔가 이상해 보일 수가 있다고 생각해?”

엘리자베스는 일반 남성보다도 커다란 덩치의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 하커는 커다란 덩치로 엘리자베스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내가 예뻐 보여?”

엘리자베스가 창피함으로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케이는 피식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쥐었다. 신사복의 넉넉한 품 탓에 어깨에 주름이 잡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돌려 자신이 아니라 다시 통유리 창을 바라보게 했다.

“길 가는 사람을 열 명 붙잡고 물어보면 열 명이 다 그렇다고 할 걸. 네 얼굴이 주근깨투성이가 된다고 해도 네 얼굴보고 뭐라고 할 인간은 없어. 그런 인간이 있으면 그냥 트집을 잡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런 너 자신을 상대로 트집을 잡아대는 넌 지금 오만을 떨고 싶은 거겠지,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통유리 너머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커다란 신사복을 입고 초췌한 얼굴에 질끈 머리를 묶은 몰락한 공녀. 엘리자베스도 알고 있었다. 제 얼굴이 예쁜 편에 속한다는 것은. 사교계에 처음 진입했을 때도 귀족들이 그녀의 부족한 예의범절을 가지고 은근히 따돌린 적은 있어도 그녀의 미모를 가지고 수군거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화려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남들의 한 달 생활비쯤 되는 보석을 휘감았을 때의 그녀에 국한된 얘기였다.

지금은 다르지 않나. 엘리자베스는 그 아름다웠던 공녀의 치장을 지워놓고 자신을 보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 펑퍼짐한 신사복 차림이 또 하나의 치장이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케빈의 공로를 가로채고 잭을 위험에 빠뜨렸고 3개월 후면 괴물이 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내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길래 나는 여전히…….

나는 여전히 내가 소중하고 내가 예쁠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듣고 거울을 빤히 바라보다가 통유리 창 너머로 그렇게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점원 하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움찔 뒤로 물러났다. 점원이 씨익 웃었다. 케이가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나 가게 문을 열었다.

“들어가지.”

엘리자베스는 허둥지둥 대답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점원이 호들갑스럽게 두 사람을 응대했다. 두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눈치를 챈 기색이었다. 케이가 타이를 추천해달라고 하자 점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타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좀 있으면 저 남자가 이 가게에서 가장 비싼 타이와 가장 비싼 넥타이 핀, 커프스 링크 따위를 가지고 나올 거야. 돈 냄새를 맡았으니까.”

케이의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그의 목덜미 근처에서 키득거리며 웃는 것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말대로 가장 비싼 타이를 고르는 것인지 한참을 꾸물거리는 점원을 바라보다가 케이에게 말했다.

“마음을 바꿨어. 타이는 하나만 고르자.”

“왜. 너는 타이를 안 하려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진열장에 있는 연한 노란빛이 도는 타이를 골라서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에 대었다. 단번에 고른 것이었는데도 엘리자베스의 연한 정장과 잘 어울렸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네가 옷 만드는 일을 했다는 걸 또 잊어버렸어.”

“옷이 아니라 천이야. 그리고 이 천은 너랑 잘 어울려.”

케이는 대부분이 실크로 이루어진 가운데에 약간의 양모가 섞인 노란 넥타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네 머리카락이랑 느낌이 비슷하잖아.”

엘리자베스가 노란 타이를 받아들었을 때 점원은 이미 두 사람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케이의 말대로 비싸 보이는 타이와 커프스 링크, 핀 따위를 잔뜩 들고 씨익 웃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점원을 보며 다정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거. 너는 그냥 타이 하지 마.”

엘리자베스는 점원에게 타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점원이 실망스러운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네? 하지만 신사복에는 원래 타이가 필수입니다. 아무래도 숙녀분이 뭘 모르셔서……”

케이는 점원의 구시렁거림에 점원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노란 타이 한 장이라도 팔고 싶으면 닥치고 값을 불러. 잔돈은 안 받지.”

케이의 으름장에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값을 말했다. 케이는 자신의 말대로 잔돈이 없이 똑 떨어지는 금액을 점원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점원에게서 다시 타이를 받아들고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에 타이를 매어주었다.

“왜 마음이 바뀌었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마음인 건 알지만.”

케이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엘리자베스의 셔츠 깃을 세우고 두꺼운 타이를 예쁘게 맸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하고 겁먹어서 저 멀리 뒤로 물러난 점원에게 소리쳤다.

“아까 가져왔던 넥타이핀과 커프스 링크를 다시 가져와. 금색으로.”

점원은 아까 이 거구의 남자가 무섭게 자신을 째려보았던 것을 기억한 듯 이번에는 군말 없이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케이 하커의 성질머리는 대체 언제쯤 고쳐질 수 있을까? 이건 고쳐지기는 하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고약한 성질머리로 인해 생겨난 케이의 이마 주름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타이를 매어주는 케이의 셔츠 깃을 매만졌다. 케이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넌 타이를 안 하는 게 어울려. 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타이를 하지 않아 훤히 들어난 그의 목덜미를, 살짝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삐뚤어진 그의 콧대를 가만히 훑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주 약간씩만 깔끔하게 정리하고 말했다.

“내가 신사복을 입는 이 나라의 몇 없는 여자이듯이 너는 신사복을 입지 않는 이 나라의 몇 없는 남자로 남았으면 좋겠어. 그게 나한테도, 너한테도 어울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이 남자에게 신사복을 입히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저번 생의 자신의 오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생을 건너 온 지금에서야 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