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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79화 (17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79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안 할 거잖아. 그러니 그냥 놀리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녀가 케이를 사랑할까봐 두려워할 거란 말인가. 그녀는 이미 케이를 사랑하고 있는데.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그랬듯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

“뭘?”

“네가 이러는 이유.”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넌 너한테 사랑한다고 매일매일 고백하며 매달리던 상대가 갑자기 너한테 무관심해 보이니까 아쉬운 거야.”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거라고 해.”

“그런데 아쉬워할 것 없어. 네가 가졌던 사랑은…….”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이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야. 나는 너한테 그런 사랑을 줬어.”

엘리자베스는 오만하고 건방진 케이의 미소를 흉내 내며 내면 또한 오만해지려고, 건방져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미소를 바라보는 케이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그걸 보는 엘리자베스도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케이가 말했다.

“그랬겠지. 호기심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급한 이야기를 했다.

“잭은? 잭은 어떻게 됐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피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복잡해.”

복잡?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대답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분명 어젯밤 잭을 탈출시키겠다고 하지 않았나.

“뭐가 복잡하다는 거야?”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케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잭이 이감됐어. 웨스트 리오든 교도소로.”

“이감? 왜 갑자기? 오늘 총살하기로 한 사람을 이감할 이유가 뭐가 있어?”

“복잡한 사정이 있었겠지. 총살당할 인간이 너무 많다든지, 그런.”

“케이.”

“어쨌든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덕분에 총살도 미뤄졌고 그 안에 대충 수를 내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말을 돌리려는 걸 알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케이의 몸이 움찔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해. 거짓말하지 말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잡힌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쳐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얼마나 솔직하길 바라는데. 잭의 머리에 난 총구멍이 어떤 방향에서 시작되어 어떤 방향에서 끝났는지도 말해줘야 하나?”

“케이 하커!”

“……웨스트 리오든은 윌리엄 조쉬가 갇혀 있는 곳이야. 거긴 중범죄자들이 있는 곳이라고. 어떤 이유로 이감이 되었든 간에 거기에 있는 사람을 빼내는 건 어려워. 이런 얘기까지 듣고 싶은 거야?”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마주보았다.

잭을 빼내는 게 어렵다고? 엘리자베스는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를 구하겠다고 하수도를 걸어 의회 청사까지 왔던 잭이었다. 화재 사건 때는 그가 수많은 수용자들의 목숨을 구했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수용자들을 돌봤다. 그런 잭이 수용자들을 빼냈다는 이유로 총살이라니.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된다고. 내가 직접 가야겠어. 내가 가서…… 왕자 전하한테 빌든지, 아니면 내 전 재산을 털어서 주든지……. 뭘 해서라도……”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위험한 상상을 했다.

웨스트 리오든 교도소 외벽을 타는 하얀 털복숭이 괴물 말이다. 그 괴물은 단숨에 쇠창살을 뜯어내고 보비들의 총칼을 튕겨내고 목과 팔 다리에 사슬이 묶여 있는 잭을 구해낸다. 잭을 품 안에 안고 단숨에 뛰어내리고……

“엘리자베스!”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상상에서 벗어나 케이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케이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더 세게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에 들어 있는 초조함, 다급함, 불안함을 읽었다.

“……절대 나설 생각 하지 마. 조지한테 빌 생각도, 혹시라도……”

“혹시라도?”

엘리자베스는 잠시 의아해졌다. 케이의 얼굴에는 이상하리만큼 불안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마치 엘리자베스가 괴물로 변해 웨스트 리오든에 침입할 거라는 계획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놔주었다. 엘리자베스는 허전해지는 어깨를 느끼며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아까의 다급함이 사라진 예의 삐뚤어진 얼굴로 말했다.

“수용자들을 풀어준 게 정말 잭이야?”

“뭐?”

엘리자베스는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케이는 그 작은 반응하나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어제 잭을 만나고는 왔어. 이감 직전에 잠시.”

“뭐래? 어때 보여?”

“괜찮아 보였어. 두려움 같은 건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도……”

케이는 무릎에 팔을 기대고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타이가 없는 허전한 그의 목덜미와 대충 접어올린 소매 끝을 보았다. 케이는 여전히 노동자의 습관을 몸에서 떼어내지 못했지만 그의 몸에서 익숙하게 흘러나오던 위스키 냄새나 담배 냄새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건 엘리자베스에게서 났다. 그녀의 몸에서는 담배 냄새, 위스키 냄새가 풍겼고 아무렇게나 앉는 것도, 책상에 퍼질러 자는 것도, 때때로 문법을 지키지 않고 말하는 것도 이제는 엘리자베스의 습관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자신의 새로운 습관을 발견할 때마다 케이를 닮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에 흠칫했다. 엘리자베스는 자꾸만 자신의 몸 한 구석에 케이를 쌓아갔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덜어갔다. 그래놓고 왜.

왜 네가 사랑을 말한단 말인지.

케이가 말을 이었다.

“……네가 자길 돕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위험할 거라고. ‘공녀님’께서 위험에 빠지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다던데. 이감된 덕에 총살 집행은 하루 밀렸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가지고 오지도 않은 담배를 안주머니에서 찾아 헤맸다. 그때 케이가 안주머니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내어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끊었다며.”

“갖고만 다니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왜 그런 짓을 하는 건지 의아했지만 두말없이 케이의 손에서 담배와 성냥을 받아들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고 담배 연기 속에서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잭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어젯밤 케빈이 했던 말을 자꾸만 떠올렸다. 엘리자베스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꿨다는 말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어젯밤 달빛 속에서 갖췄던 무궁무진할 것만 같았던 힘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잭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케이가 말했다.

“수용자들을 풀어준 건 열쇠를 가진 누군가의 소행이야. 같은 수용자였던 잭이 무슨 수로 그 연기를 뚫고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 수용자들을 구해.”

케이는 코웃음을 쳤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말했다.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넌 빠져. 잭을 구하겠다고 헛짓거리 하지 마. 너는 잭의 목숨을 한 번 구했고, 그걸로 된 거야. 잭을 구하려다가 괜히 네가 모든 범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어. 왕좌가 비어 있어. 지금 레본은 거대한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어. 좆같이 지어진 크리스털 궁의 유리천장처럼 깨지기 직전의 상태란 말이야.”

케이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다그쳤다. 엘리자베스에게 어떻게든 이 일에서 빠지겠다는 확언을 얻겠다는 의지가 가득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같이 구했어. 수용자들의 목숨을 우리가 같이.”

엘리자베스가 타들어가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케이를 노려보았다.

“거기에 그냥 뒀으면 모두 다 죽는 거였어. 나 혼자는 절대 구할 수 없었어. 잭이 아니었으면 수십 명이 죽었어.”

“죽게 둬.”

케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을 비웃었다.

“너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잖아.”

“나랑 넌 달라.”

이 말을 대체 몇 번째 듣는 것이던가.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다르다고. 우리는 달라서 절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며 또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린 어떻게 다른데. 얼마나 왜 다른데.”

“완전히 다르지. 그걸 몰라서 물어? 넌 그런 더러운 감옥에서 썩어가는 남자들처럼 될 일이 없어!”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 내가 여자라서? 내가 왕족이었어서? 아니. 난 같아.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어. 그러니까 나도 그들의 목숨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되는 거야. 나도 수용자였어. 네가 나를 그 엿 같은 경찰청에 처넣었잖아! 나와 내 부모를 배신하고 나를 그곳에 처넣었다고!”

엘리자베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차 문을 찼다. 우직. 마차 문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힘이 전보다 더 강해졌음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넌 그냥 가만히…… 가만히 있어. 잭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우리’? 누구. 너네 참정권 운동가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그래.”

“나도 이제 너네 일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야. 몰라? 의회 청사에 너와 함께 들어가던 그 순간부터, 나도 이제 ‘우리’가 된 거라고.”

“그렇지 않아.”

케이는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이 멍청한 자식! 이 바보 같은 자식!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당장 마차 밖으로 차서 내쫓아버리고 싶었다. 엘리자베스가 주먹보다 강하고 폭력적인 마땅한 말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이에 케이가 말했다.

“넌 ‘우리’가 될 수 없어. 말이 돼? 넌 6살 때 공장에서 일해본 적도 없고, 화상을 일으키는 염료에 손을 담가본 적도 없고, 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클럽 앞에서 포목을 들고 4시간씩 서 있어본 적도 없어. 넌 그렇게 살지 않았고, 그러니까 넌 이런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어. 우리 같은 사람들을 구하려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럼 아동 노동에 시달리고 귀족인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산업 재해로 폐나 손이 썩어들어 가지 않는 사람은 너네가 될 수 없다는 거네. 그래. 그렇다는 거네? 그럼 너넨 평생 그렇게 고여서 썩겠네. 절대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없겠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케이의 얼굴은 강경했다. 엘리자베스 역시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난 잭을 구할 거야. 내가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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