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78화 (17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78화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다정하다고 여겼던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케빈은 그날 밤새도록 엘리자베스를 괴롭혔다. 엘리자베스가 기초 화학사에 대해 모르는 것 몇 가지를 묻자 케빈은 3시간이 넘도록 설명해댔고 엘리자베스가 조금만 이해를 못해도 윽박을 질렀다.

“아까는 축하한다며! 부교수가 된 걸 축하한다며!”

엘리자베스의 분노한 목소리에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아는 것 하나 없이 부교수가 된 줄 모르고 한 말이죠!”

이 사기꾼. 멍청이. 개똥같은 과학자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혼나면서 속으로 욕을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새벽 동안의 끔찍한 배움이 효과는 있었다.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어찌나 구박을 했던지 총살을 당할 예정이라는 잭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지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새벽녘에서야 억지로 잠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잭은 제대로 탈출했을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새로운 생활공간 책상에 엎드려서 숙면을 취하고 있는 케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케빈을 흔들어 깨웠다.

“케빈. 침대에서 자. 나는 다 잤어.”

“……예? 아 아니에요. 뭘 다 자요. 몇 시간 못 잤잖아요.”

“잠이 안 올 것 같아. 그리고 오늘 오전에는 약속이 있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퀭한 제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오늘 오전에 조지 왕자를 알현해야 했다. 아직 급사든 누구든 엘리자베스를 부르러 오지 않은 것을 보면 늦은 것 같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옷장 안을 열어보았다. 적당한 옷이 무엇이 있을까. 엘리자베스의 옷은 전부 헐렁거리는 신사복들뿐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좌절하기는커녕 단숨에 그 중에서 가장 깔끔한 신사복을 골라잡았다.

엘리자베스는 과학자였고, 과학자에게 치마는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했다. 조지 왕자가 실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때 케빈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약속이요! 화학사 제대로 공부 못했잖아요! 박람회 끝나고부터 당장 수업이에요! 정신차리라구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괴물 같은 얼굴을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 책상에 엎드려 자는 저 녀석을 보고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꼈던 것을 후회했다.

“일주일 동안 밤새서 공부할 거야! 혼자서! 꼭 반드시! 혼자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약 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흥. 하루도 못 가서 나를 찾게 될 걸요!”

“아니거든! 야, 너 나가! 너 내 침대에서 자지 말고 나가란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도 케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얼른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이불에 돌돌 말아서 창밖으로 던져버리려고 했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엘리자베스와 케빈의 눈이 마주쳤다. 케빈은 헛기침을 했다. 물론 두 사람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지만 혼숙이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는 좋지 않았다. 케빈은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얼굴을 포함한 온 몸을 이불 안으로 감췄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보다가 이불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너…… 나중에 보자……”

엘리자베스는 이불 상태를 일별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거기엔 엘우드 밀이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얼어붙었다.

* * *

하얀 피부, 초록색의 신비로운 궤를 그리며 나아가던 탄환을 떠올리게 하는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부슬거리는 금발. 정말이지 고대 설화에나 나오는 엘프를 떠올리게 하는 엘우드 밀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엘리자베스 앞에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 양.”

엘우드 밀의 경칭에 엘리자베스는 굳은 채로 저도 모르게 바지를 붙잡고 드레스를 입은 영애처럼 인사했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며 케빈이 일어났다. 엘우드 밀은 그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이 같이 있었군.”

엘우드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얼른 대답했다.

“같이 연구하다가 잠들었어요. 케빈은 책상에서 저는 침대에서요.”

엘우드 밀은 그 말을 별로 믿는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자꾸만 내려오는 옆머리를 쓸어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신경질적인 미남의 모습이 도무지 자신이 아는 엘 선생과는 다른 것 같아서 혼란스러웠다. 그는 오히려 디트리히 폰의 꿈속에서 어릴 적부터 국가적 천재로 우대받아 버릇이 나빠진 소년을 닮아 있었다.

하긴. 기억을 잃었다면 그의 자아가 그쯤에 더 닿아 있는 게 맞았다.

“……것보단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뒤에서 케빈이 대답했다.

“아, 맞다. 루이 교수님이 삼촌을 아카데미 사서로 취직시켜 주셨어요. 마침 해리 씨가 그만둔 차여서…….”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을 보았다. 저 자존심 센 과학자가 아카데미 학생도 아니고 사서라고……? 엘리자베스의 눈빛을 알아챈 듯 엘우드 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감사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오갈 곳도 없고 통행증도 없어서……”

엘우드 밀은 그렇게 말하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초록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약간이나 엘우드 밀이 느끼는 혼돈을 눈치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상황에만 매몰되어 잊고 있었지만 엘우드 밀은 자신의 인생 전체의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린 상태였다. 혼자 외딴 섬에 떨어진 것처럼 외로운 것도 당연할 것이다. 게다가 무의식에 배어 있는 엘우드 밀의 행동양식 따위도 전부 미래의 갸흐통에서 기원했을 테니 더더욱.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야속하게 여겼던 자신의 감정은 뒤로 미뤄두고 엘우드에게 말했다.

“저한테는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선생님. 아, 사서님. 아카데미에서는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렇게 부를게요.”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훨씬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망각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것 같았다.

“그러지. 그런데 일전에 말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거…….”

엘우드 밀은 아까보다 훨씬 안정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일전의 대화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다. 누군가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기까지는 말이다.

“여기서 시시덕거릴 시간이 없는 걸로 아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별관 복도를 보았다. 그러자 굳은 표정으로 신사복을 빼어 입은 한 남자가 복도 중앙에 서 있었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자 엘우드 밀도 그 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이 난다는 얼굴이었다.

케이는 왜인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에게 팔을 내밀었다.

“시간이 빠듯해.”

시간이 빠듯해서 화가 난 걸까? 엘리자베스는 머뭇거리며 케이의 차림을 보았다. 남색 재킷 안에는 검은 조끼를, 흰 셔츠에는 타이를 매지 않았다. 거기에 옅은 갈색의 바지와 구두를 입었다. 가면무도회 때 보았던 멜니아 식의 신사용 차림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느낌의 옷이었다.

“입궁에 맞는 복장은 아닌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복장을 가리켜 말하다가 자신이 지나친 참견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물었다. 이제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아내도 아니었고 약혼자도 아니었다. 짧은 신사용 재킷을 차려입으라는 둥, 판탈롱을 입지 말라는 둥, 스카프 대신에 타이를 매라는 둥, 그런 잔소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럼 가는 길에 새로 옷을 사서 입지.”

“뭐?”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자신의 말을 깔아뭉갤 줄 알았던 케이가 순순하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의아하게 되물었다. 케이가 대답했다.

“네가 골라. 나한테 어울리는 걸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반응에 잠시 굳어 있다가 뒤에서 비척비척 일어나는 케빈의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케이는 케빈을 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케빈이 다급하게 해명했다.

“저 책상에서 잤어요. 아까까지는……. 진짜로요. 같이 밤새 공부하느라 그런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케이 쪽을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케이가 케빈을 반쯤 죽여버리려고 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케이는 어쩐지 오히려 만족스러운 얼굴로 케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꼬맹이.”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옷 갈아입어야 돼?”

엘리자베스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케이는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기다리지. 이리 나와, 꼬맹이.”

케이는 안 그래도 막 걸어나오려던 케빈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질질 끌고 복도로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엘우드 밀을 보았다. 엘우드 밀은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미안하지만 설명은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에게 인사했다.

“그럼 나중에 봬요. 전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요, 선생님. 아, 아니. 사서님.”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헛기침을 하곤 인사했다. 엘리자베스는 문을 닫았다. 그러자 문 밖에서 케이의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녀의 방에 이 아침부터 방문하는 건 별로 신사답지 못한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의아해졌다.

저럴 거면서 대체 왜 엘우드 밀과 결혼을 하라는 둥 헛소리를 해대는 건지. ……그리고 왜 갑자기 저렇게 고분고분해진 건지.

엘리자베스는 다시 옷장을 열어 신사용 정장을 살펴보았다.

* * *

케이는 정말로 엘리자베스와 마차에 타자마자 에렌델로 가자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옷을 다 보느니 타이만 두 개를 사자고 말했다.

“나도 타이가 없고, 너도 없으니까 타이를 두 개 사자.”

“신사용 재킷은? 판탈롱이 아닌 딱 붙는 바지는?”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흠칫했다. 엘리자베스가 결혼해서 매일 같이 케이에게 했던 잔소리를 케이가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신사용 정장에 대해서 공부했나?

“그런 건 필요 없어. 너는 평민 자본가를 대표해서 가는 거고, 나는 과학자를 대표해서 가는 거야. 궁 앞에 또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을 거 아니야. 아까는 내가 그냥 궁에 간다는 생각만 해서 그랬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잠시 말없이 그녀의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갈색 눈동자를 보다가 얼굴을 살짝 붉히고 말았다.

케이 하커가 저렇게 자신을 내려다볼 때면 케이가 자신의 것이고 엘리자베스가 그의 것이라고 믿었던 짧고 강렬했던 밤들이 생각났다.

왜 이제 와서.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케이에게 말했다.

“그렇게 빤히 보지 마.”

“왜. 나를 사랑하게 될까 봐 겁이 나나 보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얄밉도록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