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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77화 (17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77화

시가지에 솔튼 빌리스의 목을 걸었다더니, 그게 바로 의회 청사 앞이었던 모양이었다.

구역질이 올라옴과 동시에 엘리자베스는 이상한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익숙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이미 시야는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기사 내용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귀족원 평민원 제도 폐지……. 상원 하원제로 개편…… 이름만 달라진다는 비판이 있지만……. 평민원이 개편되어 만들어지는 하원의 숫자가 늘고…….]

[솔튼 빌리스의 저택 수색 과정에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 판매 계약서를 발견…….]

[레트니 국왕 폐하께서 공식적으로 군수권을 조지 왕자에게 넘겨줬다는 소식…….]

[조지 왕자, 가장 먼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의 복권과 로버트 하커의 경 칭호에 대해 이야기해……]

엘리자베스는 신문 기사 위로 자꾸만 이상한 흰색 뭉치가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의회 청사 위를 기어오르는 거대한 괴물.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시선은 그것을 따라 진한 피 냄새를 폴폴 풍기는 의회 청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며칠간 그녀를 찾아오지 않던 끔찍한 허기와 갈증이 그녀의 속 안을 가득 채웠다. 엘리자베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신문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병중에 있는 국왕 폐하가 군수권을 조지 왕자에게 넘겼다니 이제 니콜슨 공작도 더 이상 어찌할 바가 없을 것 같군. 조지 왕자에게 밉보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엘리자베스. 이건 더 이상 연구비만의 문제가 아니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나?”

루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갈증이 신문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말인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케빈은 곧 임용이 될 거야. 다음 차례엔 케빈이 될 거라는 건 학술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리고 자네가 임용이 된 데에는 단순히 정치 논리만이 작용한 게 아니야. 자네는 퀴닌의 인공 합성을 세계 최초로 성공한 과학자야. 자네 때문에 지금도 병동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고 있다고.”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저는 퀴닌의 인공 합성을 성공시킨 최초의 과학자 따위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도둑이에요. 시간여행기라는 망할 놈의 기기를 타고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제 살 길을 뚫기 위해 케빈의 아이디어를 도둑질한 거란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혓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수많은 문장들을 억지로 삼켰다. 루이의 말대로 조지 왕자에게 밉보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특히나 케이와 케이의 친구들의 목숨이 담보로 걸린 상황에서는.

하지만 마음속에 차오르는 수치심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벌게진 얼굴로 루이 교수가 내미는 책을 바라보았다.

“기초 화학사 책일세. 자네가 수업을 맡기에 딱 적당해. 수업료는 부교수 수업료에 맡게 책정될 거야. 부교수인 만큼 이제 돈을 받고 아카데미에 출근하게 되는 거지. 조지 왕자님께 감사하게. 이건 엄청난 영광이야. 자네는 이제 여성 최초 과학자 정도가 아니라 여성 최초 학술원 교수가 될 거야. 레본의 자랑거리라고.”

루이 교수는 책을 내려놓고는 엘리자베스가 아까까지 읽던 신문 속 그녀의 사진을 가리켰다. 레본의 자랑거리? 엘리자베스는 도무지 지금의 자기 자신을 자랑거리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가 내민 책을 집어들었다.

<기초 화학사>.

엘리자베스는 슬픈 눈으로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네. 조지 왕자님의 은혜에 감사드려요.”

루이 교수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허공에서 손을 내저었다.

“그래. 이만 가보게.”

* * *

엘리자베스가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기초 화학사 책 하나를 강의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지만 막상 설명하려고 강의 계획안에 내용을 적다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엘리자베스는 기초 화학사 책을 공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방대한 양의 자료를 놓고 책을 파고들었다.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것이 더 많은 공부가 된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지친 발걸음으로 기숙사 층계를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기숙사에서 급사 노릇을 하는 맥컬린이라는 남자 하나가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학생! 아, 아니…… 엘리자베스 양…… 아니, 교수…… 님?”

맥컬린은 엘리자베스를 부르려다가 몇 번이나 호칭을 정정했다. 그러나 이도저도 신통치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아, 5층에 있는 방 말입니다. 방 배정이 바뀌었습니다. 부교수님들은 보통 기숙사가 아니라 댁에서 출퇴근하시기 때문에 기숙사에 방은 없습니다만 본관 바로 뒤쪽 첨탑에서 연구실 겸 생활공간으로 제공되는 곳이 있어서요. 루이 교수님께서 엘리자베스 양에게는 그곳이 필요할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맥컬린의 말에 5층까지 나있는 아찔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매일 같이 등산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던 계단이었다. 그런데 이제 부교수 생활관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으로 치밀어오르는 기쁜 마음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꼈다.

“그럼 제 짐은…….”

“아, 그건 저희가 도와드릴 겁니다. 짐이 생각보다 별로 없으시더라구요. 사실 책장 정도는 정리해뒀습니다, 이미.”

맥컬린이 그렇게 말하며 먼저 층계를 올라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따라 5층으로 향했다. 그러자 5층 끝 방에서 청소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이 4층까지 올라갔을 때였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케빈이 얼굴에 두건을 쓰고 5층에서 무슨 상자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케빈!”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케빈을 부르자 케빈이 우뚝 멈춰 섰다.

“엘리즈. 도서관에 있다고 들었는데…….”

케빈은 고장난 기계처럼 계단 난간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 사이에 맥컬린은 층계를 올라가 청소부들을 돕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들고 있던 상자를 받아들고 말했다.

“같이 내려가자.”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끄덕이고 같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라 복도에는 창 너머로 비쳐오는 월광이 네모나게 길을 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그냥 부교수 일 하기로 했어. 들었지?”

“네.”

케빈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목소리에 담긴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1층 회랑 앞에 우뚝 서서 케빈을 보았다.

“미안해.”

그러자 케빈은 회랑으로 걸어가다가 말고 뒤돌아서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빈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더니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걸어가 푹 숙인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따라 몸을 아래로 숙였다.

“우는 건 아니죠?”

케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안 울어. 요새 너무 울어서 더 나올 눈물도 없는 것 같아.”

“……그 말 방금 너무 비과학적이었어요.”

케빈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더니 케빈이 씨익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웃음의 의미를 몰라 케빈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케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즈 말을 듣고 아주 잠깐. 진짜 아주 잠깐 배가 좀 아팠거든요? 나 혼자만의 공일 수도 있는 걸 엘리자베스랑 나눠먹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게 사실이잖아.”

엘리자베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케빈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케빈이 그런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고는 얼른 엘리자베스가 든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같이 들어요. 번갈아 들면 덜 힘들잖아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 짐이잖아.”

“그래도요. 언젠가 내 짐을 엘리자베스가 들어줄 수도 있잖아요. 같이 하는 거죠. 누구 짐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케빈의 검은색 눈동자는 이제 막 애티를 벗고 청년의 모습을 갖춰가는 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고 잘생겼다며 침을 흘리던 귀족 영애들의 마음을 아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케빈 퍼킨은 이제 미소년에서 미남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말이다.

케빈이 말했다.

“엘리즈는 도둑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엘리즈한테는 이유가 있었고 엘리즈가 내 공을 빼앗아간 게 아니라 어차피 합성되었어야 할 퀴닌을 엘리즈가 훨씬 빨리 시중에 내놓을 수 있게 만든 거예요. 시간여행을 하기 전의 세계에서는 퀴닌이 늦게 나온 이유가 있을 거예요. 나든 다른 과학자든 퀴닌 같이 돈이 되지 않는 약을 만들기 싫어했을 거고, 토닉워터로 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시중에 풀었겠죠. 하지만 엘리즈는 그런 이유를 다 제치고 학질 환자들을 위해 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생각해봐요. 3개월 후에 퀴닌이 나왔다면 미리엄이 살아 있었을까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상자를 빼앗긴 손을 허공에 애매하게 들어올린 채로 중얼거렸다.

“그건 몰라…… 모르는 거잖아.”

“뭘 몰라요. 알고 있잖아요. 미리엄이 살아있었을 것 같냐구요.”

케빈의 종용에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케빈을 보았다.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아니.”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케빈이 씨익 웃더니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왔다. 그러곤 엘리자베스는 두 손으로 들어도 무겁다고 느꼈던 상자를 한 손으로 들고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리자베스는 건방진 케빈의 행동에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케빈은 입술을 삐죽거릴 뿐 엘리자베스의 반항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거봐요. 퀴닌 합성을 빨리 해내길 잘했죠? 미리엄이 살아있는 건 엘리즈 덕이에요. 내가 더 빨리 명성을 얻고 자리를 잡을 수 있던 것도, 레본에 평민들의 기회가 많아진 것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던 것도.”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전부 다 엘리즈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꾼 결과라구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내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었다니. 이 말은. 이 말은 정말이지 엘리자베스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축하해요. 부교수가 된 것. 모두 다 잘 될 거예요.”

모두 다 잘 될 거야. 모두 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든 마법 같은 힘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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