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76화
“여긴 어떻게……?”
엘리자베스가 의아한 눈으로 묻는 사이 아루쉬는 들고 있던 책 하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홀램브로 학술지. 케빈이 보고 있던 것 같았다. 아루쉬가 대답했다.
“아, 그때 그 파티에서 루이 교수님이 저에게 아카데미 도서관 출입증을 내어주시겠다고 해서요. 출입증도 받고 가능하다면 아카데미에서 청강도 할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그 파티, 라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레트니 애비뉴에서 총격 사건으로 피범벅이 되었던 파티를 떠올렸다. 파티에서의 총격 사건은 의회 테러 사건의 충격에 의해 먼 옛날처럼 잊히고 있던 차였다.
참정권 운동가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은근한 협박을 떠올렸다. 다니엘은 지금 의회 테러 사건이라는 레본을 뒤흔들어놓은 사건을 조사 중인 조지 왕자의 심복이었다. 그런 다니엘이 참정권 운동가들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필 총격사건이 있었던 레트니 애비뉴에서의 파티를 주최했다. 의회 테러 사건에도 함께였고.
그건 다니엘이 마음만 먹으면, 아니 다니엘을 조종하는 조지 왕자가 마음만 먹으면 참정권 운동가들과 인민해방회가 하나로 묶여서 단두대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라는 뜻이었다. 케이가 풀려나긴 했어도 여전히 살얼음판인 셈이다.
엘리자베스는 복잡한 생각들 속에서 아루쉬를 보았다. 이 남자는 케이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사람일까? 이 일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이 남자가 아카데미에 청강생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는 이 타이밍이 우연의 일치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럼 자주 뵙겠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대답했다.
“네. 그렇겠지요. 루이 교수님께서 전에 엘리자베스 양이 부교수가 되어서 강의를 맡을 거라고 하셨으니까요.”
아루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비어있는 교수님의 실험실 자리를 보며 대답했다.
“……아뇨. 저는 아무래도 그런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아, 네.”
아루쉬가 조금 놀랍다는 듯이 대답했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개인 연구실에 계신 건가요?”
“아뇨. 아마 출입증 문제로 해…… 행정실에 계실 겁니다. 오실 때가 다 됐어요.”
엘리자베스는 아루쉬가 어려운 단어를 말할 때는 약간 더듬는 것을 보며 아루쉬가 이국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루쉬는 너무 완벽한 레본어를 구사해서 그가 이국인이라는 것을 까먹을 때가 있었다.
아루쉬가 신시 무역회사에서의 인연으로 케이와 함께 레본 땅을 밟은 것이 레본에 첫 방문이라면 그래봤자 2~3주를 체류한 셈인데 어떻게 이렇게 레본어를 잘 구사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다소 의아했다.
“부인께서는 괜찮으신가요?”
그때 아루쉬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부인이요?”
“프란시스 부인 말입니다. 에테르가 많이 약해 보이셨는데요.”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요. 저택에서 나오기 직전에 뵀을 땐 어지러움이 많이 덜하다고 하셨어요. 약이 효험이 좋은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실 때 프란시스에게 좋은 약을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부탁드려요…….”
엘리자베스의 부탁에 아루쉬가 대답에 뜸을 들였다. 엘리자베스는 의외의 반응에 약간 애가 탔다. 그때 아루쉬가 아까 들고 있었던 홀램브로 학술지를 집어들며 말했다.
“만약 엘리자베스 양이 저에게 이것에 대해 알려주시면…… 저도 그렇게 하죠.”
아루쉬는 그렇게 말하며 학술지에 실린 방사선에 관련된 논문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사선이요?”
“방사선. 그렇게 읽는 거군요.”
“네. 관심이 있으세요?”
“너무 어려운 말이라 제대로 다 읽진 못했지만 이건 특히 흥미롭군요. 라듐이라는 광석 말입니다. 이건 제 고향 땅에도 있어요. 어두운 곳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특성이 있는 광석인데……”
엘리자베스는 아루쉬가 흥미로워 하는 라듐의 사진을 보았다. 저것에서 추출한 물질로 케빈이 몰록을 죽일 독약을 만들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비어 있는 케빈의 자리를 보았다. 대체 어쩌다가 저 어리고 유망한 과학자에게 자신이 이런 잔인한 짓거리를 하게 된 것일까.
엘리자베스가 아루쉬에게 말했다.
“자연 상태의 라듐이 있었나보군요. 이국에는요. 미안해요. 자꾸 이국이라고만 해서. 당신의 고향 땅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대답했다.
“바하. 우리말로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엘리자베스 양. 미안하지만 우리는 땅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요. 그냥 이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우린 왕은 없고 9부족의 회의체가 바하를 다스립니다.”
“그럼 아루쉬는 족장의 아들, 부족장이라고 했으니 왕족인 셈이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신들의 관점으로는.”
엘리자베스는 저 까만 피부의 남자가 인자하게 웃을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레본의 관점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조금도 이국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오페아는 언제나 엘리자베스의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래서 이오페아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것은 엘리자베스의 뇌리에 있어보지 않은 개념이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남자가 서서히 궁금해져갔다.
“……그럼 제가 라듐과 학술지의 내용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아루쉬도 저에게 에테르 의학에 대해 알려줘요. 어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가 싱긋 웃어보였다. 그때 연구실 문이 열렸다.
“오랜만이군. 자네.”
루이 교수님이었다. 루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서서는 지친 눈을 해보였다. 그의 콧수염에는 전에는 볼 수 없던 흰 털이 몇 가닥 달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루이를 보며 마지막으로 교수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릴 수 없었다. 오랜만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교수님에게로 가서 와락 안겨버렸다.
“오랜만에 봬요.”
엘리자베스는 목구멍으로 치미는 뜨거운 것을 느끼며 웅얼거렸다. 그러자 루이가 엘리자베스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래…… 잘 돌아왔군. 잘 돌아왔어.”
엘리자베스는 우습게도 루이 교수님을 보는 순간 정말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살아서 돌아왔다. 그 엉망진창이었던 지옥에서.
그런 감격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이 지저분한 연구실의 냄새마저 달큰하게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을 뼈저리게 느꼈다.
젠장할. 젠장……. 또 연구실에서 누가 토마토 스튜 끓여먹었어…… 황산이랑 토마토 스튜랑 만나면 정말 더러운 냄새가 나…….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훌쩍거렸다.
* * *
“저는 부교수는 못 해요.”
아루쉬가 가자마자 엘리자베스는 훌쩍이던 것을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그러자 루이 교수님 역시 붉어졌던 눈을 손수건으로 훔치는 것을 그만두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왜요? 이미 저를 이용해 연구비를 받아 챙기셨으니까요?”
엘리자베스의 건방진 말에 루이 교수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고 해두지.”
“무슨 뜻인가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루이가 대답했다.
“조지 왕자가 자네의 성과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다는 듯이 편지를 보냈더군. 박람회에서 직접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부교수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할 거라고 했어. 자네 이름을 팔아서 내가 혹은 이 아카데미가 챙겼을 꽤 많은 연구비는 아마도 이미 곳곳에서 케빈 퍼킨과 같은 집이 어려운 자제들의 식비, 생활비, 연구비로 쓰였을 거고.”
또 클레몬트.
엘리자베스는 사라졌던 클레몬트라는 성이 3개월 만에 다시 나타나 자신의 인생을 지겹도록 쫓아다니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전 이제 클레몬트가 아니에요.”
“글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세. 오늘 신문 읽었나?”
루이는 엘리자베스의 대답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품 안에서 돌돌 말린 신문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거기엔 또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이번에는 케이 하커도 있었다.
신문 1면에 실린 사진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의회 청사 앞에서 찍혔던 사진이었다. 전에 실린 것과는 조금 다른 각도의 사진으로 이번에는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와 있었고 엘리자베스가 의회 청사 외벽을 타고 걸어가다 케이의 품에 막 안기려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누가 봐도 전 약혼자들이 취하기엔 부적절해 보이는 포즈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크리스털 궁전의 사진이었다. 크리스털 궁전은 로열 박람회가 열릴 장소로 크리스털 궁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체 건물 외벽이 유리로 이루어져 있는 장소였다. 햇빛을 맞이할 때 크리스털 궁전은 정말이지 거대한 수정처럼 반짝거리곤 했다. 크리스털 궁전. 그곳은 레트니가 국제 박람회를 열기 위해 만들어낸 사치스럽고 거대한 전시장이었다.
그리고 두 사진 아래에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복권 되나?]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한 페이지에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재결합을 암시하는 듯한 사진, 박람회를 홍보하는 사진,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복권을 암시하는 제목이 모두 결합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모든 게 누구의 작품인지 알 것 같았다.
“조지 왕자는 레트니보다는 나은 국왕이 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엘리자베스가 신문을 받아들고 묻자 루이가 대답했다.
“적어도 실리를 챙길 줄 알지 않나. 조지 왕자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 자본가들의 힘을 빌려 왕좌에 앉고 싶어 해. 레본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아는 게야.”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말에 일부분은 동의했지만 완전히 조지 왕자를 믿지는 않았다. 그가 지금 취하는 모든 선택들은 단순히 왕좌에 오르기 위해 하는 일일 수도 있었고 만약 그게 아니라 진짜 루이가 국가의 실리에 관심이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조지 왕자는 너무 영악했다.
그는 케이와 앰버가 꾸민 혁명을 눈치채고도 입을 다물 정도로 영악한 자였다. 그는 효율적인 국왕이 될지는 몰라도 케이와 엘리자베스가 믿을 만한 이는 못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루이가 새로운 신문 하나를 더 꺼내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던 신문 아래에 내려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그 신문을 보았다. 거기엔 끔찍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제2의 찰스 아이드? 솔튼 빌리스! 귀족원 폐지의 길을 열다?!]
엘리자베스는 의회 청사 건물 앞에 있는 목이 잘린 찰스 아이드의 동상 앞에 꼬챙이 걸린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솔튼 빌리스의 사진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제 입을 가렸다. 그리 가깝게 찍힌 사진이 아니었는데도 솔튼 빌리스의 이마에 난 총구멍이 생생하게 보였다. 구역질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