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75화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기억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 그것도 너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난 너처럼 비열하지 않거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독기 어린 눈으로 케이를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어차피 엘우드 밀은 기억을 찾게 될 거야. 기억을 못 찾는다고 해도 너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사랑할 때 기억만큼 중요한 게 어딨어.”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케이의 오해를 종용한다는 점에서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겁해지지 않는 방법을 엘리자베스는 몰랐다.
“기억은 그냥 과거야. 아무 힘도 없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다가 자기가 놓은 덫에 자기가 걸린 사냥꾼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얼굴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케이의 말도.
기억은 과거지만 아무 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쁜 기억 때문에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 중독에 빠져들기도 하고—
’우리 엄마는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남자가 떠나버리자 결국은 자살했어. 목을 매달았지. 아직도 천장을 보면 엄마가 보여. 엄마가 그립다거나 한 건 아니야. 주정뱅이에 늘 소리만 지르는 괴물 같은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냥…… 그게 내 미래일까 싶어서…….’
어떤 사람들은 좋은 기억 하나 때문에 평생을 살기도 한다.
’왜긴요. 아까 통신국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둘째 여동생이 잠깐 사식을 넣어주러 왔다가 시골에서 전보를 받았다고 했거든요. 전보라니! 아버지가 그런 데에다가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요! 시골에까지 신문이 잔뜩 퍼졌다고 제가 자랑스럽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대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에 대한 기억으로 여기까지 왔다.
엘리자베스는 기억에 힘이 없다는 말에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에게 기억은 무엇보다도 강한 힘을 가진 인간의 뇌의 작용이었다. 그래서 몰록의 피가 후대의 개체에게 기억을 전달하는 것일 테고.
“기억은 사람을 발전하게 해. 적어도 과거보단 나은 사람이게 해. 과거의 잘못을 기억해야 미래의 더 나은 선택으로 나아갈 수 있어.”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으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아까 위층 복도에서 들었던 시간여행에 관한 생각 같은 것.
‘케빈 퍼킨. 난 사실 시간여행자야.’
케이는 케빈과 엘리자베스를 따라 올라갔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시간여행자라고.
케이는 그 사실과 지금까지 꾸었던 기묘한 꿈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고 있었다. 특히나 어젯밤 케이가 시달렸던 ‘아이’에 관한 환청 같은 것 말이다. 그게 정말 ‘기억’이라면 어떨까. 사실 그것이 정말 있었던 과거고, 엘리자베스의 기억인데 케이에게는 없는 과거와 기억이라면.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파혼하자고 했던 시점을 떠올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달라진 시점 말이다. 어쩌면 엘리자베스의 기괴한 행동이나 말투, 그 모든 것들이 그 작고 기묘한 퍼즐조각을 통해서 맞춰질 수 있는 단서들이었는지도 몰랐다. 케이는 정말 개 같은 가설에 빠져든 채로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거랑은 관계없어. 어쨌든 넌 그 남자를 사랑하잖아. 네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 사는 것보단 엘우드 밀과 사는 게 나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빨려들어 갈 듯이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왜냐고. 왜 그랬냐고. 케이는 어이가 없었다. 그건 전부 엘리자베스 때문이었다. 마구간에 숨어 있던 것도, 기억도 하지 못한다는 편지를 훔쳐 달아난 것도, 그리고 케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전부.
엘리자베스의 선택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원망하고 싶다가도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던 자신을 책망하는 쪽으로 말이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붙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동정심을 사기 위해 애원하고 매달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케이는 어젯밤 그 모든 것을 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케이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널 사랑하니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는 대신 도개교를 건너기 시작한 마차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고백이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고백 앞에 기뻐하기는커녕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엘리자베스가 케이 하커, 평민의 아들이자 마구간에서 자는 냄새 나는 소년을 사랑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짙은 안개 같은 침묵이 깔렸다.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에 마차가 도개교에서 끄트머리에서 잠시 섰다. 케이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마부석 문을 열었다. 마부가 보비 하나가 케이를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마차 창문을 열자 말을 타고 있던 보비 하나가 케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 기억하십니까? 나리.”
보비의 말투는 검문검색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엔 묘하게 굽실거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보비라는 이유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케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군. 로킨트 저택으로 오라고 했을 텐데. 다니엘의 꼬리로 붙었나보군.”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해서요.”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 창 너머를 살폈다. 케이가 대답했다.
“잭이라는 남자는 어떻게 됐지?”
“내일 오후 총살 예정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잭’이라는 이름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잭? 잭이라면 자신이 아는 잭을 말하는 건가? 엘리자베스가 창문 쪽으로 몸을 숙였다.
“방금 누구라고요?”
엘리자베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보비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잭이라는 놈을 아십니까? 탈옥범입니다.”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쥐었다. 탈옥범이라니. 그렇다면 정말로 엘리자베스가 아는 잭이 맞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물었다.
“네가 잭을 어떻게 알아?”
“안다기보다 봤어. 내가 궁에서 취조 받고 나올 때 궁 앞에서 붙잡히더군.”
엘리자베스는 잭이 왜 위험하게 궁 앞에서 서성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안전한지 궁금해서 온 것이리라. 그렇다면……. 엘리자베스가 목소리를 낮춰서 케이에게 물었다.
“스윈든도 봤어? 좀 더 뚱뚱한 남자 말이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잭뿐이었어.”
엘리자베스는 보비에게 시선을 돌려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탈옥 좀 했다고 사람을 총살 하나요? 제가 알기론 그저 좀도둑인데요.”
보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가씨께서 모르셔서 그렇지, 그 놈이 아주 악랄한 놈입니다. 경찰청에 불이 난 틈을 타서 수많은 끔찍한 범죄자들을 리오든에 풀어놨다구요. 그런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야 합니다.”
“경찰청에 불이 났다면 그때 경찰청에 있던 보비들은 수용자들을 어떻게 했죠?”
보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걸 갑자기 왜 묻느냐는 투였다.
“저희는 물론 불을 끄려고 노력했습니다.”
“경찰청 밖에서요. 경찰청 안이 연기로 가득 차는 동안.”
보비는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닌지 그제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담긴 날을 느낀 듯이 헛기침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보비를 노려보았다.
“연기로 수많은 수용자들이 죽었으면 그때는 뭐라고 변명하려고 했나요? 아, 변명 같은 건 필요 없나요? 수용자들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들은 범죄자입니다,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못 참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케이를 보았다. 그리고 케이의 재킷 깃을 잡아당겼다.
“너한테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라도 잭을 구해와. 넌 가진 게 돈 밖에 없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피식 웃고 말았다. 케이는 자신의 재킷 깃을 쥔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케이는 품 안에서 수표를 꺼내며 보비에게 약속했던 금액을 써서 내밀었다.
“남은 돈일세. 그 남자를 면회하게 해줘.”
“나리. 그 남자는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경감님께서……”
“알겠다고. 그러니 그냥 오늘 밤에 면회만 하게 해주면 되네.”
케이는 수표 한 장을 더 꺼내 보비의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보비의 깃을 잡아서 당겼다. 보비는 휘청거리며 케이 쪽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감히 자네 눈앞에 있는 이 여자한테 말대답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네놈 뱃구멍으로 들어가는 이 모든 돈은 보다시피 이 여자의 기분에 달려 있으니까. 감히 자네 따위가 충고할 재간이 되지 않지.”
보비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턱을 날려버릴 것 같은 이 무뢰한과 눈이 마주치자 부르르 떨며 모자를 다시 바로 썼다.
“예, 예……. 죄송했습니다, 아가씨.”
보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사과를 받는 시늉도 하지 않고 케이에게 말했다.
“가자. 당장.”
케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보비를 놓아주었다. 보비는 뒤로 밀려났다. 케이가 마차 창문을 닫고 마부에게 출발할 것을 종용했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창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거친 숨을 토해내며 케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잭이 내일 총살당한다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오만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데리고 나와야지. 저 오만방자한 보비 놈을 죽여버려서라도.”
케이는 엘리자베스 쪽으로 상체를 숙이더니 엘리자베스의 코끝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할 거니까 너는 제발 가만히 있어.”
엘리자베스는 씩씩거리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케이의 말이 맞았다. 이건 케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돈을 가진 혁명가 놈이 말이다. 힘없는 과학자 나부랭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마차가 아카데미 앞에 멈춰 섰다. 마부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케이가 마차 문을 열었다.
* * *
연구실에 도착할 때까지 수많은 아카데미 학생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신사 복장을 한 남자들이 엘리자베스가 테러에 휩싸인 것을 가지고 불쌍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심지어 몇몇 신사들은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하고 싶어 하기까지 했다.
남의 불행은 얼마나 재미있는 화젯거리인가.
엘리자베스는 경멸보다 더 끔찍한 동정을 받으며 연구실 문 앞에 도착했다. 이제 말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엘리자베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문을 열었다.
엘리자베스가 문을 열자마자 눈이 마주친 사람은 정말 의외의 인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아루쉬?”
그러자 남자가 반갑다는 얼굴로 말했다.
“의사 선생님! 자주 뵙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