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74화 (17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74화

“궁에서 봤던 분이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지만 동시에 솔튼 빌리스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엘리자베스의 표정만으로 엘리자베스가 하고 싶은 말을 읽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이 신사답고 정중한 사내가 생각보다 더 영악한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런데 여기에 계시는군요.”

다니엘은 노골적인 시선으로 앰버를 보았다가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엘리자베스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말했다.

“네. 프란시스 부인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의사로 왔습니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뒤에 있던 케빈을 보았다. 케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있다가 천천히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다니엘이 흥미로운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어쨌든 한 자리에 앰버 양과 엘리자베스 양이 전부 계시니 참 재미있군요. 게다가 다른 분들도 다 제가 아는 얼굴들이고 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언뜻 그 말이 케빈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케빈은 퀴닌 관련으로 신문에 실린 적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오히려 앰버와 에드워드를 보며 말했다.

“공교롭게도 테러가 있기 전 의회에 등록한 평민원 추천인 3명과 다들 안면이 있는 사이가 아닙니까.”

다니엘의 말에 응접실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반듯한 미소를 바라보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는 지금 뭔가 알고 있었다. 방금 다니엘이 한 말은 그걸 이용해 이들 중 누군가를 협박하려고 꺼낸 말이었다. 케이도 그걸 느낀 듯 표정이 험악해졌다. 하지만 다니엘만은 신사다운 말투로 다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다 같이 뵈니 어쨌거나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지 왕자님께서 초대한 것은 케이 하커 씨와 엘리자베스 양뿐이지 뭡니까.”

“초대요?”

엘리자베스가 되묻자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새 조지 왕자님께서 레본의 미래에 대한 근심이 깊으십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여전히 병중에 계시고 나라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끔 이렇게 차 모임을 가지면서 각계각층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신답니다. 각계. 각층.”

다니엘은, 각계, 각층, 이라는 단어마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바라보았다. 최초의 여성 과학자와 레본에서 제일가는 평민 사업가. 다니엘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심지어 다니엘이 하는 초대를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결코 거절할 수 없으리라, 다니엘이 그리 여기는 것도 알았다. 방금 한 말은 협박이었고 이 초대는 그 협박의 결과물이었다.

케이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엘리자베스 양과 함께 입궁하면 구설이 많이 오를 것입니다. 저보다도 숙녀분의 사정이 더 곤란할 테니 함께 가는 건…….”

케이의 말을 끊고 다니엘이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아, 곤란하십니까?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엘리자베스는 이 남자가 자꾸 일부러 ‘클레몬트’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이 남자의 말을 거절하면 케이와 앰버, 에드워드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따를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아뇨. 곤란하지 않습니다. 왕자님의 통치에 도움이 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가야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케이가 주먹을 꽉 쥐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보았다. 하지만 케이가 깽판을 치기 전에 다니엘이 먼저 이렇게 말하고 물러갔기 때문에 별 일은 없었다.

“그러시다면, 두 분이 초대에 감격하시며 받아들이셨다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내일, 오전입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고 현관문을 나서기 직전 막 생각났다는 듯이 케이를 보며 말했다.

“아. 오늘 솔튼 빌리스의 목이 시가지에 걸렸습니다. 궁금하시면 보러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니엘이 빙긋 웃으며 말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말에서 소리를 제거하면 시가지에 축제가 있다거나, 아니면 멋진 야경 위치를 소개해주는 말쯤 되는 줄로 착각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고 여겼다. 다니엘의 말에 케이는 현관까지 걸어가며 말했다.

“시가지에 들를 일이 생기면 꼭 구경하지요.”

케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이 나가려다말고 고개를 돌렸다.

“네?”

“다른…… 혁명가들이요. 인민해방회 회원이라던 이들.”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살아 있는 이들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이미 시체가 된 이들을 말하시는 겁니까.”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질문에 망설이다 물었다.

“살아 있는 쪽을 말하는 거예요.”

“그쪽은 공개 처형될 겁니다. 수일 내로요. 요즘 장례식 일정이 많고 거기에 시체를 걸어두는 것만으로도 꽤나 고된 작업이라 공개처형이 미뤄지고 있지만 이번 주를 넘기진 않을 겁니다. 기다리고 계신가봅니다?”

다니엘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실크로 된 톱햇을 쓰며 말했다.

“그래도 숙녀분이 보실 만한 구경거린 아닐 텐데요.”

다니엘은 말을 마치고 현관문으로 나갔다. 그러자 여덟 명은 되어 보이는 보비들이 다니엘을 따라 마차로 향했다. 보비들의 허리춤에서 쇠 소리가 났다. 다니엘 빌리스는 무장한 보비들을 여덟이나 데리고 저택에 온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섬뜩한 기분으로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케이가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다가 하녀에게 말했다.

“이십 분 쯤 후에 마차를 두 대 준비해. 엘리자베스 양은 아카데미로 보내드리고 앰버와 에드워드는 레트니 애비뉴로 가실 거야.”

케이의 말에 하녀들이 마차를 준비하기 위해 사라졌다. 응접실에 남은 사람들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소파에 앉아서 멀쩡한 쪽 허벅지를 주물거리며 말했다.

“……조지 왕자가 ‘우리’를 눈치채고 있어요.”

앰버는 에드워드의 말에 하녀들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큰일은 없을 거야. 추천인들 전부 입을 다물었고 지금은 전 국민이 인민해방회를 주시하느라 정신이 없어.”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앰버가 궁에서 자신이 취조를 받을 때 쪽지를 보낸 것이 단순히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취조를 받는 이가 뭔가를 발설할까 봐 감시하는 의미도 겸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앰버의 행동에 화가 나기는커녕 안심이 되었다. 이들이 허술한 자들이었다면 오히려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이제 어떡할 거예요? 조지 왕자가 의회를 축소시키기 위해 안달을 할 거예요. 기회가 좋으니까.”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얇은 여름용 재킷을 걸치고 케빈을 보았다.

“너도 갈 건가? 아카데미로.”

케이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프란시스랑 일단 있을 거예요.”

케빈의 눈빛이 흔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자신이 위층에서 한 말을 받아들이는 중이고 거대한 혼돈을 맞이해 흔들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며 말했다.

“……저녁때는 올 거지? 아카데미에 말이야.”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출근은 해야 되니까.”

엘리자베스가 케빈과 눈을 오래도록 마주치다가 곧 하녀들이 나타나자 그녀들에게 말했다.

“약은 한 번만 더 먹이면 돼요. 물 좀 끓여줄래요? 난 지금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해서.”

하녀들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 * *

20분 후 마차가 준비되었다.

엘리자베스가 탄 마차에 케이가 올라탔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놀란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초대에 응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거절할 방도가 없잖아. 다니엘은 우릴 협박하고 있었던 거야.”

“너는 아니야. ‘우리’를 협박한 거겠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야속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앰버와 케이, 에드워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자리엔 조지 왕자를 알현하러 온 귀족들이 잔뜩 모여 있을 거고 조지 왕자는 그들 앞에서 우리가 함께 입궁하는 것을 전시할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답답해져서는 마차 창문을 열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나도 알아.”

“조지는 우리가 다시 이어진 것처럼 보이길 바라는 거야.”

“나도 안다고.”

“그런데 그걸 수락하면 안 되지.”

케이는 분노한 듯 마차 문을 내려쳤다. 우직. 엘리자베스는 마차 벽이 부서질 듯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미친놈.

“왜 안 돼? 무슨 상관이야. 당장 너랑 앰버, 에드워드가 궁으로 줄줄이 끌려가는 걸 보는 것보단 낫잖아!”

“우린 끌려가지 않아. 끌려가도 네가 알 바가 아니란 말이야! 그 고생을 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성난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젯밤 마구간에서 엘리자베스를 껴안았던 남자는, 사랑을 고백하던 남자는, 이 남자와 다른 남자란 말인가?

“끌려가면 죽는 거야. 윌리엄 조쉬처럼 개죽음을 당하는 거야.”

“그건 윌리엄 조쉬의 선택이었어. 설마 윌리엄 조쉬를 걱정하는 건 아니겠지. 우릴 죽이려던 남자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건 윌리엄 조쉬의 선택이야. 그러니까 걱정은 안 해. 그냥…….”

그냥 윌리엄 조쉬가 너무 고통스럽게 죽진 않기를 바랐다. 그는 사람을 죽였고 그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비열한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겠지.”

“우릴 구해줬어. 넌 생각 안 나겠지만.”

“우릴 구해준 게 아니라 널 구해준 거야. 나도 생각나. 네가 그 자식에게 입을 맞춰준 것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람결에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에 붙어오는 머리카락을 정돈해 질끈 묶었다. 케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화난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어이가 없어져서 쏘아붙였다.

“넌 내 옆의 남자들을 질투할 자격이 없어. 네가 먼저 약혼을 깼잖아.”

“누가 뭐래?”

케이는 짜증날 정도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그냥 그런 변덕 중에 하나지?”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어.”

“날 골탕 먹이려고!”

엘리자베스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맞아. 골탕 먹이려는 건 맞았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케이의 표정이 흐려졌다. 케이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우드 밀과 결혼해. 가능하면 빨리. 3일 안에 약혼 발표를 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가 되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