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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73화 (17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73화

케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케이의 가슴팍을 마구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요, 왜. 무슨 큰일 있었어요? 막 사람 살 뜯어먹고 싶고? 엉?”

케빈이 다급하게 케이의 가슴을 주물럭거렸기 때문에 케이는 참지 못하고 케빈을 밀어냈다. 케이가 케빈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사이에 케빈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왜요. 나는 그냥 약 주려고……!”

케빈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약?”

케빈은 케이의 힘에 단숨에 나동그라진 경험을 살려 움찔거리며 케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에는 K. P. 라고 적혀 있었다. 케이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약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엘리즈한테도 준 적이 있어서 그럴 걸요?”

케빈은 담담하게 말했다. 케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놈의 엘리즈, 엘리즈. 케이는 당장 케빈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앰버가 자리에서 일어나 케빈과 케이가 속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네 애인이야?”

앰버가 케빈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케이가 케빈을 다시 밀쳐냈다. 케빈은 아까보다 더 멀리 떨어져서는 끙끙거렸다.

“……제 직장동료예요.”

대답은 엉뚱한 방향에서 나왔다. 케이와 앰버가 동시에 층계참을 보았다. 거기엔 엘리자베스가 난간을 잡고 서서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닥에 자빠진 케빈을 보고 있었다.

“엘리즈!”

케빈은 훌쩍거리며 케이를 노려보곤 얼른 엘리자베스에게 뛰어갔다. 케이는 케빈을 낚아채 주먹 한 대는 먹일 수 있다고 여겼지만 참았다.

“이 아침부터 여길 왜 왔어? 엘 선생님은?”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케이에게 들려왔다. 엘 선생님. 케이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어젯밤의 기괴했던 꿈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시간여행기라니. 그건 대체 무슨 꿈이었던 걸까. 케이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앰버가 케이를 놀렸다.

“내가 말했지? 우리 엘리자베스는 인기가 많아. 뺏기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케이는 앰버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저리 꺼져.”

* * *

엘리자베스는 다정하게 붙어서 속닥거리는 앰버와 케이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속이 타 가슴께를 쓰다듬는 사이에 케빈이 말했다.

“약 주려고 왔어요. 저번에 줬던 약. 잘 썼다면서요. 어제는 꿈 안 꿨어요?”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K. P. 라고 적힌 약병을 꺼내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받아들고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유리병 속 굴러다니는 약 알갱이들을 보고 있자니 엘리자베스는 그간 꿈을 꾸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안 꿨어.”

이상한 일이었다.

의회 테러에서 탈출했던 그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이지를 상실해버린 이후 몸은 이상하게 더 가뿐했다. 왜일까. 어쨌든 남은 시간이 3개월밖에 없는 지금 뭔가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전부 좋은 쪽일 리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기분으로 케빈이 내민 유리병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케빈이 말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아무래도 연구실로 출근해야겠어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3개월 시한부 신세라고 해도 시간은 자비 없이 흘러갔다. 이제 박람회가 열흘 밖에 남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카데미를 비운 지가 오래되었다. 자격이 없는 과학자라고 해도 엘리자베스는 과학자로 죽고 싶었다.

“그래.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지. 미안해. 대신 고생시켜서.”

“아뇨. 그런 거라기보단……. 내일부터 루이 교수님이 엘리즈한테 강의 하나 맡기실 생각이신 모양이던데요?”

강의?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한순간 그 말의 뜻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빈이 말했다.

“이제 부교수잖아요. 엘리즈!”

케빈이 씨익 웃었다. 그 말에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앰버가 말했다.

“와. 부교수요? 대단하네요,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으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게 얄궂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거…….”

“내일부터 출근해서 강의 준비해야 돼요. 시간이 빠듯하다구요.”

“아니. 난 그거 안 해.”

“뭘 안 해요?”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교수 말이야. 나 그거 안 할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케빈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걸 왜 안 해요? 연구실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안 할 이유가 뭐가……!”

케빈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침까지 튀기며 말하는 중에 엘리자베스가 그의 눈을 가만히 보며 말했다.

“……안 해. 안 할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잠시 황망한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 당겼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올라감과 동시에 케이가 소파를 거의 바닥에 내동댕이치다시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당당탕!

엄청난 굉음에 미리엄이 벌떡 일어났다.

“왜. 뭐. 무슨 일인데!”

미리엄이 침을 닦으며 하는 말에 앰버가 고개를 내저었다.

* * *

“왜요! 왜 안 해요! ……나 때문에?”

케빈은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케빈이 말했다.

“그때 내가 한 말은 잊어요. 그건……. 그냥 질투심에 사로잡혀서 한 말이에요.”

케빈이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질투심?”

케빈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지 엘리즈보다 오래됐잖아요. 그런데 엘리즈는 턱턱 부교수도 되고……. 나보다 성과도 많고……. 실험 아이디어도 좋고……. 아이디어도 아이디어인데 나 같으면 퀴닌 같은 거 절대 만들자고 말 못할 것 같거든요. 돈도 안 되고 또…… 아, 몰라요. 어쨌든 신의 가루를 만든 사람이 부교수가 되는 게 당연하죠. 내가 그냥 그때 약간 돌았었어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케빈을 바라보았다.

신의 가루를 만든 사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렸다.

“아니야.”

“네?”

“……내가 만든 게 아니야. 퀴닌.”

엘리자베스의 말에 잠시 벙쪄서 가만히 있던 케빈은 잠시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 뭐 우리 다 같이 만든 거다? 뭐, 저도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데요. 인공합성이 뭐 그렇게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듣도 보도 못한 합성 실험 방식도 엘리즈가 고안해냈고…….”

“그거 내가 고안한 거 아니야.”

“그럼요? 쉐필드에서 본 거예요? 또 농부들?”

케빈은 점점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여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을 가만히 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말해야 해. 지금이 아니면……. 어쩌면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했지?”

“……그랬죠?”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어. 아니, 너뿐 아니라 교수님께도, 어쩌면 모두에게.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나는 그냥…….”

엘리자베스는 이 거짓말의 시초를 떠올려보았다. 그건 엘우드 밀을 찾기 위함이었다. 엘우드 밀이 제 이름을 듣고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이젠 엘리자베스 앞에 엘우드 밀이 나타났다.

거짓말을 끝내야 하는 때라는 뜻이었다.

“……그냥 내 생각만 했던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퀴닌을 개발한 거. 너야, 케빈 퍼킨. 나는 그냥 케빈 퍼킨의 인공 합성법을 세계화학사 책에서 읽고 베꼈을 뿐이야.”

“케빈 퍼킨? 나, 나, 나요?”

케빈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원래대로라면 3개월 후에 퀴닌을 인공 합성하는 데에 성공하기로 되어 있었어. 퀴닌이 첨가된 토닉워터로 떼돈도 벌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엔 세계 화학사에 이름도 싣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무, 무슨 소리예요? 난 도무지…….”

“케빈 퍼킨. 난 사실 시간여행자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의 멍하던 얼굴이 서서히 팽창했다. 눈도 커다래졌고 입은 벌어졌으며 귀까지 꿈틀거렸다. 케빈이 소리쳤다.

“뭐라구요?!”

* * *

쿵쿵.

현관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에 하녀 하나가 저택 문을 열었다. 하녀는 현관 앞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더니 곧 곤란한 얼굴로 층계로 걸어왔다. 그리고 곧 층계를 내려오는 무서운 표정의 케이에게 걸어갔다.

“도련님.”

“누가 왔나?”

케이는 열려 있는 현관문을 보며 눈치 빠르게 물었다. 하녀들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이라는 신사분이 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실 거라던데요. 그런데 보비들과 같이 오셨어요.”

하녀들 역시 케이 하커가 궁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케이가 곤란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저택의 하녀들과 하인들은 로버트의 저택에서 마구간 소년 취급이나 받던 케이를 무시하는 편이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고, 또 이제 케이가 로버트의 상속자가 된 만큼 케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저택은 켄드릭의 소유가 될 예정이었지만 하녀들과 하인들은 곧 켄드릭이 노름빚을 상환하기 위해 이 저택을 케이에게 팔 거라고 여겼다. 그러니 케이가 잘못되면 괜히 고초를 겪고 고용이 불안정해지는 것은 그들이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아니, 내가 나가야 한다던가?”

케이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하녀가 아니었다. 불쑥 현관문 안으로 들어온 하얀 피부에 초록 눈동자를 가진 다니엘 빌리스였다.

“반갑습니다, 케이 하커 씨.”

다니엘이 들어오자 일순간 응접실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앰버와 벽난로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에드워드가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은 그들을 향해서 웃으며 톱햇을 벗어들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어제도 뵌 것 같군요.”

케이는 다니엘을 경계하는 눈으로 말했다. 그러자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만큼 제가 케이 씨를 뵙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아, 저분이 앰버 모건 양이로군요. 반갑습니다, 앰버 양.”

다니엘의 인사에 앰버가 어설프게 귀족의 인사법으로 인사했다. 다니엘은 그런 앰버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같이 계시는군요. 두 분이 약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앰버와 케이가 눈을 마주쳤다.

“그렇습니다.”

케이가 대답했을 때, 층계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가 뒤를 돌았다. 계단 위쪽에 엘리자베스가 서 있었다. 다니엘이 씨익 웃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엘리자베스는 굳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빌리스요.”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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