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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72화 (17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72화

‘아이는 부부를 이어주려고 태어나는 게 아니야.’

케이는 분명 자신의 목소리이지만 도무지 자신의 것이라곤 느낄 수 없는 차디찬 목소리를 들었다. 부부라고? 아이라고? 케이는 이 망상이 자신을 이끄는 종착지가 어디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케빈은 꿈속에서 엘리자베스의 기억을 볼 거라고 얘기했지, 망상에 시달릴 거라고 이야기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럼 케이는 지금 괴물이 되어가는 중이 아니라 그냥 미쳐가는 중인 걸까.

‘그리고 아이 때문에 부부가 연결되어 있다면 사생아들은? 사생아들은 왜 버려지겠어.’

케이는 자신의 아래에 깔려 있는 엘리자베스의 동그란 눈을 보며 가슴을 저미는 고통을 느꼈다. 이건 엘리자베스의 기억일 리가 없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두 사람의 아이라니.

케이는 그 말만 들어도 벌써 눈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케이는 아주 잠시지만 엘리자베스를 닮은 작은 꼬마애가 자신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것을 상상해봤다. 케이는 그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줄 수 없을 것이다. 좋은 부부는커녕 좋은 부모라니. 케이는 그런 건 가져본 적도, 목격한 적도 없었다.

“어지러워……?”

그때 화끈거리는 케이의 이마에 엘리자베스의 손바닥이 닿았다. 케이는 그제야 엘리자베스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를 알아보았다. 케이가 얼른 뒤로 몸을 뺐다. 엘리자베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일어나 앉았다.

“왜 그래?”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말없이 제 머리를 헝클였다. 잠시 한숨만 내쉬던 케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부부가 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지?”

케이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잠시 멍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그러다가 마른 입술을 손으로 쓱 비비며 침대에서 발을 빼서 바닥에 디뎠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나랑 똑같네. 그건……. 그러니까 그것만 말이야. 아버지는 언젠가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자신의 감정이 같을 수 없다고 여겼다. 엘리자베스는 전생에서 공작 부부의 최후를 보았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엘리자베스는 침대 모서리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케이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부모가 죽은 기분 같은 거 잘 모르겠어. 기억이 잘…… 안 나기도 하고. 글쎄. 난 잘 몰라.”

“그래도 넌 좋은 부모가 될 거야.”

케이는 자신의 얼굴을 자신의 손바닥에 묻고 웅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커다란 등이 자꾸만 굽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심장도 저렇게 구부정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좋은 부모가 될 기회 따윈 없을 것이다.

옛날에는…… 정말이지 아주 옛날에는 케이를 닮은 아이를 낳고 키우고 좋은 부모가 되어 좋은 부모를 가져본 적이 없었던 과거를 치유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건 정말 먼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그럴 수 있어.”

“나는 그럴 수 없어. 보고 배운 게 없잖아.”

“보고 배운 게 없어도 그럴 수 있어. 세상에는 경험론적 추론도 있지만 합리론적 추론도 있어. 가설을 세우고 실험 모형에…….”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던 아카데미의 남자들처럼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이마 위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케이의 눈은 새빨갰다. 엘리자베스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케이는 그보다 빠르게 움직여 엘리자베스의 뒷목을 감싸 쥐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넌 나랑 달라. 넌 좋은 부모도 할 수 있고, 좋은…… 부부도 할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뒤틀린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이미 죽은 로버트의 영혼을 저주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뒷목을 가볍게 쓸어내리려고 할 때 살짝 열려 있던 손님용 침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완전히 열렸다. 문 앞에는 앰버가 곤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그냥 소다수를 좀 가져다주려고……. 상쾌한 기분이 들게요. 술 많이 마셨잖아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든 케이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케이는 앰버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침실을 나갔다. 앰버는 곤란한 얼굴로 문가에 서서 쭈뼛거렸다.

“……난 두 사람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옅게 웃었다. 저런 여자를 연적으로 두었다는 것은 인생 최고의 불행이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손을 뻗었다. 앰버가 침대 근처로 가서 소다수를 내밀었다. 엘리자베스가 상쾌한 소다수를 마시며 잠시 환기하는 사이에 앰버가 그녀의 침대에 앉았다.

케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소리를 오랫동안 들으며 가만히 있다가 이제는 이런 감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케이는 어떤 남자예요?”

앰버는 엘리자베스가 내미는 소다수 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요. 걔를 남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앰버가 망설였지만 엘리자베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생각해본다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눈을 또르르 굴렸다. 앰버는 위스키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나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잘생겼죠. 본인이 잘생겼다는 건 모르고. 잘나진 않았지만 잘나질 거고. 사실 이미 충분히 잘났는데 본인은 모르고.”

앰버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말할수록 케이의 매력은 전부 순진함과 무지함에서 나오네요. 한 마디로 케이는…… 멍청해요.”

앰버가 웃기 시작하자 엘리자베스도 잠시 따라 웃었다.

맞아. 너는 참 멍청해. 이런 여자를 두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이런 여자를 두고…… 목숨을 걸고 또 항해를 할 생각을 하다니.

엘리자베스가 다시 앰버에게서 잔을 받아들고 소다수를 몇 모금 더 삼키는 사이에 앰버의 웃음소리는 잦아들었다. 앰버의 웃음소리가 완벽하게 잦아들었을 즈음에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케이와 결혼하는 건 어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앰버가 손가락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랑 케이요?”

“아뇨. 앰버랑 케이요.”

“……하.”

앰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표정을 보며 당장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도 케이와 함께 있었으면서, 그걸 심지어 앰버한테 들켰으면서, 여전히 케이를 사랑하면서, 케이의 소유욕을 전부 느끼고 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앰버의 행복쯤은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 앰버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턱을 잡아끌었다. 앰버는 이불귀로 엘리자베스의 눈물을 톡톡 닦아내며 말했다.

“왜 두 사람한텐 모든 게 다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이렇게까지 어려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나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맞아요. 우리는…… 우리는 둘 다 쉬운 길을 어렵게 온 거예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던 앰버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포기하고 엘리자베스에게서 소다수 잔을 빼앗아 들고 그것을 협탁에 올려놓았다. 앰버는 엘리자베스를 꽉 안았다.

* * *

케이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케이는, 아니, 엘리자베스는 황소 같은 덩치를 가진 흰색 털의 몰록을 쫓았다. 가녀린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리볼버를 들고 있었고 몰록을 뒤쫓다 결국 몰록과 마주쳤을 땐…….

탕!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다. 조명탄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엘리자베스가 신비롭기까지 한 초록색 물질이 궤를 그리는 탄환을 발사시켰을 땐 이미 그녀의 등에서 뜨끈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를 안고 상처에 약을 뿌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너 내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이 주머니 속에 뭐가 있는지 늘 궁금해했었지? 알려주마. 여기엔 나와 몰록을 이곳으로 오게 만들어준 교통수단이 들어있다. 팔찌처럼 차면…….’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정신이 혼미해 헛소리를 듣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엘우드 밀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설정한 시간으로 데려가주는 신통한 발명품이지. 이게 널 내가 그 멍청한 조수한테 치료제를 써버리기 전으로 보내줄 게다. 이걸 나는 시간여행기, 라고 부른다. 엘리자베스. 이걸 쓰면 미래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갈 수 있어. 나는 실수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몰록을 같이 데려왔었지.’

시간여행기.

케이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꿈에서 깨어나서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케빈 퍼킨의 커다란 눈이었다.

“으악!”

케빈은 케이가 눈을 뜨자 자지러지게 놀라며 뒤로 자빠졌다. 케이는 그런 케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 뭐 하는 거냐.”

케이는 자신이 누워 있던 응접실의 소파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 자식이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지. 케이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타는 듯한 목구멍을 느끼며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어젯밤 앰버와 케이, 그리고 미리엄은 응접실 소파에서 자면서 돌아가면서 프란시스에게 약을 가져다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때때로 일어나 약의 상태를 살폈다. 엘리자베스는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며 모두들 들어가 자라고 했지만 나이든 윌슨과 다리가 시큰거린다는 에드워드만 들어가서 잤고 나머지는 모두 응접실에 남았던 것이다.

케이는 두통이 가시길 바라며 관자놀이를 꽉 눌렀다. 하지만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술을 찾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케이는 복도 한가운데에 놓인 뚱뚱한 옥색 도자기를 바라보며 현실감각을 찾았다.

어제 새벽녘에서야 변호사가 와서 재산문제를 전부 해결했다. 이제 수일 내로 켄드릭이 찾아와 진상을 떨 것이다. 케이는 변호사에게 켄드릭에게 직접 돈을 주지 않고 부채만 상환하는 방법을 물었지만 변호사는 별로 권하지 않았다. 부채 상환 통로를 빚쟁이가 알게 되면 케이가 시달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결국 하커가의 자랑스러운 장남은 노름빚에 시달리며 평생을 지내게 될 것이다. 케이는 이 상황을 저 옥색 도자기 안에 들어있을지도 모를 로버트 하커의 영혼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케이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저쪽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앰버와 미리엄이 뒤척였다. 케빈은 생선을 훔치다 들킨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옹송그리고 케이에게 속삭였다.

“몸은 좀 괜찮아요?”

케이는 케빈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고 바로 앉았다. 케이는 케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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