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71화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너한테는 앰버가 있잖아.”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자신이 치사하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케이의 방에서 훔쳐 나온 편지를 읽고 있던 주제에 앰버 이야기를 하다니.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앰버의 이름을 거론한 이유는 정말로 앰버와 케이의 사이를 질투해서가 아니라 케이가 앰버가 아니라 엘리자베스를 원한다고 말해주길 바라서라는 것을.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집어치워. 그건 핑계가 안 돼. 너도 나도 알고 있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차마 케이의 얼굴은 바라보지 못하고 말을 매어놓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가만히 서 있었다. 케이가 덧붙였다.
“……엘우드 밀이라면 모를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드는 순간 케이의 엉망이 된 눈과 마주쳐야 했다. 케이의 저런 표정이라니.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엘우드 밀? 엘 선생님?”
“그래. 엘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가 엘우드 밀을 자연스럽게 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서 엘우드 밀은 왜 나오고, 엘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케이는 왜 의구심조차 갖지 않는 것일까?
케이가 말했다.
“엘프처럼 생긴 훌륭한 과학자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소리에 담긴 기묘한 어감과 맥락만 가지고도 직감했다. 케이는 뭔가를 오해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물어봤다.
“그분을 언제 봤어?”
“교회당에서 봤어. 너와 무척이나 닮아 보이던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과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기회가 왔다고. 케이 하커를 나락으로 빠트릴 수 있는 기회가. 케이 하커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이때에 너무나도 완벽한 기회가. 엘리자베스는 입을 열었다.
“그분은…….”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다 듣기 전에 먼저 말했다.
“그 남자가 기억을 잃었다지?”
“……그래.”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떠올렸다.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냐던. 엘리자베스는 그때 뭐라고 답했던가.
케이가 말했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그냥 가만히 옆에만 둘 거야?”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돌아보았다. 케이의 표정에는 잔혹한 감정의 파편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감정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알았다.
질투.
케이 하커는 지금 엘우드 밀을 상대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체 왜? 엘리자베스는 수렁 같은 의문 속으로 빠져들었다. 왜 내 편지를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어. 왜 그 편지를 외우고 다녔어. 왜 내 옆에 있는 남자를 질투해. 왜…… 왜 나를 사랑한다는 거짓말 같은 걸 하는 거야. 왜 하필 이런 때를 골라서.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옆에만 두진 않을지도 모르지. 네가 약혼자를 두고 심심하면 나를 희롱하듯이 나도 가끔은 엘 선생님을 안고 싶은 날도 있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 선생과 포옹하는 자신을 떠올리며 구역질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 하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케이가 말했다.
“……내 말은, 그 남자와 약혼이나 결혼 같은 건 고려하지 않을 거냐는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꼈고 되돌아가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식의 거짓말은 쓸데가 없었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도무지 진실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킥킥거리며 얄미운 얼굴로 재빨리 대답했다.
“난 방금 너랑 키스한 남자니까 상관은 있지.”
“너, 너, 너, 너너! ……네가 먼저 했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비열함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케이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만약 엘리자베스의 눈에 막대기 같은 것이 들어왔다면 바로 그걸로 케이를 두들겨 패줬을 것이었다.
케이는 아프다는 듯한 시늉을 해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조금도 안 아프면서!
엘리자베스가 씩씩거리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아까까지 사랑한다는 둥,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둥, 헛소리를 해대더니 이제는 그 모든 고백은 잊었다는 듯이 굴다니.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지옥에 떨어지길 기도했다.
케이는 얄궂은 얼굴로 말했다.
“그와 약혼해. 가능하다면 결혼도 빨리 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얼얼한 표정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케이에게 물었다.
“너 방금까지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알아.”
케이가 담담하게 대답했을 때, 저택 현관 쪽에서 미리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에 있어?!”
미리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안 그래도 날아갔던 취기가 완전히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속삭였다.
“이제 가야겠어.”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케이를 지나치려고 할 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팔목을 잡았다. 케이는 그냥 팔목을 잡기만 한 게 아니었다. 케이는 그녀의 팔목 안쪽 여린 살을 매만졌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시선이 두 사람의 피부가 맞닿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그리고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곳으로 돌아왔다.
케이의 숨은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뭔가를 잔뜩 참는 얼굴로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조지 왕자가 너를 복권시킬 거야.”
“그 전에 레트니가 병석에서 일어나면 다 끝이야. 네놈이 레트니의 어깨에 칼을 꽂았잖아, 이 미친놈아. 넌 반역자로 시가지에 목이 걸릴 수도 있었어.”
엘리자베스가 당장이라도 케이의 멱살을 잡고 싶은 눈으로 케이에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케이를 죽을 때까지 패주고 싶은 기분 밖에 들지 않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여린 팔목을 쓰다듬다가 어느새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걸어와 엘리자베스의 턱을 매만지며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눈, 코, 입을 천천히 훑듯이.
“레트니가 병석에서 일어나는 건 불가능해. 일어났다고 해도 다시 왕좌에 앉는 건 절대 불가능하고. 이미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이미 일어났는지도 모른다고?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미리엄의 발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지 왕자가 왕실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야. 왕실 장악이 마무리되면 왕자는 레트니를 자연스럽게 정리하겠지.”
정리, 라는 단어의 의미는 어디까지일까. 엘리자베스는 섬뜩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왕자는 우리가 결혼하길 원해.”
“뭐?”
우리……?
엘리자베스는 그 ‘우리’가 어떤 이들을 말하는 것인지 몰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케이와 앰버를 말하는 건가? 엘리자베스의 혼란을 눈치챈 듯 케이가 말했다.
“너와 나. 우리말이야.”
엘리자베스와 케이?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이어질 거라고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에,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지금 국가의 원수를 대행하는 자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기 있어?”
그때 마구간 바로 앞에서 앰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아까 들린 발소리가 미리엄이 아니고 앰버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화들짝 케이로부터 떨어졌다.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싸안고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곧 앰버가 마구간 옆을 돌아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기 있었군요!”
앰버가 다행이라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로부터 떨어지고 싶었지만 케이는 손에서 조금도 힘을 풀지 않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안은 채로 앰버에게 말했다.
“내가 여우를 잡았어. 그러니까 이건 이제 내 거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당장 지금 하려는 짓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는 이미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들어버린 뒤였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가뿐히 안겨 소리나 꽥꽥 지를 수 있을 뿐이었다.
“야!”
엘리자베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케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를 포목을 옮기듯 가뿐히 들어 저택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저택 안에 들어가자 미리엄과 에드워드, 윌슨이 전부 엘리자베스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하지만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2층으로 바로 올라가버리는 바람에 엘리자베스는 그들과 대화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케이는 그녀를 2층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손님 침실로 데려갔다.
엘리자베스는 침대 위에 사뿐하게 내려놓아진 채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노려봐서 어떡할 건데? 날 사랑하기라도 할 건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목구멍 안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날 사랑한다는 건 뭐고, 빨리 결혼하라는 건 뭐야?”
“둘이 같은 말이야.”
“어떻게 같은 말일 수가 있어? 그냥 너는 날 책임지긴 싫고 한 번 가져보고 싶기는 한 그런 정도 마음인 거야. 그런 건 사랑이랑 다른 거잖아. 네 말대로 사춘기 소년들한테 있는 욕구불만 같은 거지.”
케이는 쪼르르 방으로 따라 들어온 하녀 한 명에게 깨끗한 침구를 가져오라고 말하고 따뜻한 물도 덤으로 주문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의 옆에 앉아서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사춘기 소년들의 욕구불만이 뭔지 몰라. 넌…… 넌 그냥 아무것도 몰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앰버와 결혼할 거야?”
엘리자베스는 하녀들은 물론이고 2층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케이에게 물었다. 따뜻한 실내에 들어오니 취기가 다시 몸 안에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케이는 방 안에 가득 찬 찐득한 공기에 둘러싸인 채 이상한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까와 비슷하지만 더 강한 갈증이었고 허기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대답이 없는 자신을 가만히 보다가 벌러덩 누워버리는 순간 셔츠 깃이 벌어지면서 보이는 새하얀 쇄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케이의 귓가에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이를 갖자.’
케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벼락 같이 움직여 누워 있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몸 위에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엘리자베스의 놀란 눈이 케이를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케이의 귓가에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부부를 이어주는 끈이라잖아. 우리 사이에 연결된 무언가가 있으면 지금보다 낫지 않을까?’
그 순간 케이는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자신은 이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