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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70화 (17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70화

케이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떨어진 종이를 보았다. 그가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엘리자베스.

케이는 마구간 쪽으로 걸어가며 몇 번이나 더 종이를 마주쳤다. 그는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것 같은 하얀 종이가 시선에 들어올 때마다 눈이 부셔 자주 멈췄고 눈을 비볐다.

이 이상하고 짜증나는 여자.

케이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케이는 에렌델에 있는 한 작은 장난감 가게를 떠올렸다. 어린 귀족 놈들과 자본가의 아들딸들이 유리창 앞에 코를 대고 서 있던 그 작은 가게. 그 어린 악마들은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다. 그 유리창 앞에 오랫동안 서 있으면 부모가 자신들을 데리고 그 가게에 들어갈 것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길거리의 구두닦이 소년들이나 급사 소년들, 동냥하는 어린 여자애들은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유리창 앞에 코를 대고 서 있으면 가게 주인이나 점원이 나와서 목덜미를 잡아채 내던지기 일쑤였고 아무도 그들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그런 것들을 사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자꾸만 바라보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솔치노에 있는 커다란 커피하우스에서 창부들에게 둘러싸인 작은 여자애가 들고 있는 예쁜 금발 인형을 보았다. 그건 사내아이가 가지고 싶어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절대 아니었지만 케이는 그것을 실제로 가지고 노는 어린 날의 앰버 플래스를 보는 순간부터 그걸 가지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시달렸다.

물론 그 욕망은 단순히 그 예쁜 인형을 향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케이는 사실 누군가가 선물해주는 작은 인형을 들고 노는 그런 어린 시절 자체를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케이는 그날 앰버에게는 자신의 돈으로 그런 인형을 살 거라고 호언장담을 해놓고, 여덟 살 생일 날 에렌델에 있는 장난감 가게에서 그것을 닮은 작고 예쁜 금발 인형을 훔쳤다.

처음으로 뭔가를 훔쳐본 날이었다. 케이는 그것을 들고 뛰었다. 원래 둘이 해야 하는 포목 배달을 혼자 하는 대신 공장장이 동전 몇 닢을 더 주기로 했는데 그것도 포기하고 하커 저택까지 뛰어왔다. 내일 공장장에게 따귀를 몇 대 맞을 것도 각오하고 뛰었다. 케이는 하커 저택이 보이기 시작하자 걸음을 멈추고 품 안에 숨겼던 인형을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푸른 눈동자,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인형을 가만히 보던 케이는 그것을 어디에 숨길까 고민하며 걷다가 저택 담장쯤에 이르렀을 때에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런 예쁘고 값비싼 인형은 마구간 같은 곳에 둘 수 없다. 이런 인형을 마구간에 숨겨두면 그건 치욕이 될 것이다. 그것을 들키면 케이도 치욕스러울 테지만 인형이 가진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도 모두 망쳐질 것이다.

케이는 가질 수도 없는 것을 훔쳐온 셈이었다.

케이는 그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그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 예쁜 인형을 손으로 만져보다가 그 인형을 꼭 안아보았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인형의 머리카락이 케이의 뺨을 간질였다. 케이의 여덟 살 인생에 처음으로 가져보는,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가져볼 아름답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케이는 인형을 꼭 안고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가지고 공장 근처에 가서 넝마를 버리는 곳에 버렸다.

케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장에 있는 어린 소년들을 몰래 불러서 데리고 나와 공장 일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더러운 공장지대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날 새벽에 공장장에게 붙잡혀 코뼈가 부러지도록 맞았고 코뼈가 부러졌는데도 일을 쉬지 못했다. 부러진 코뼈는 제대로 처치를 하지 못해 구부러진 콧대로 남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케이가 인형을 꼭 안아보았던 그때, 케이의 뺨에 닿았던 그 부드러운 감촉만큼 케이의 인생에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리고 지금 케이는 인형 가게 유리창 너머로 사랑스러운 미소를 갖추고 앉아 있던 인형을 건너다보던 예닐곱 살짜리 꼬맹이가 된 기분으로 마구간에 쭈그려 앉은 채 편지를 들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시뻘게진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더니 뺨으로 진주 알갱이처럼 빛나는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궁금해서.”

“뭐가.”

케이는 숨이 찼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찼다. 여덟 살의 소년이 한참을 뛰었던 그때처럼. 케이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뭐가!”

엘리자베스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이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서 잔 네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하도 오랫동안 방치해둬서인지, 아니면 방치하기 전에 하도 많이 읽어서인지, 손만 대도 부스러질 것처럼 낡은 편지. 2년이 아니라 20년이 된 것 같은 편지.

케이는 그것을 노려보며 엘리자베스가 이제는 케이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동정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동정은 지켜보는 자들의 특권이니까.

케이는 그런데도 그 동정이 너무도 기꺼웠다. 이 여자를, 이 아름다운 여자를 말똥 냄새로 가득한 불결하고 더러운 마구간에 가둬놓고 싶었다.

절대로 마구간에서 보고 싶지 않았던 아름답고 부드러운 여자. 훔친다고 해도 케이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여자.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잤어? 대체 이 더러운 곳에서…… 대체 어떻게 버텼어. 알려줘……. 알아야겠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대체 어떻게…….”

엘리자베스의 말이 잦아들 때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걸어가 단숨에 그녀를 껴안았다.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편지와 함께 수많은 종이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케이는 자신의 뺨에 와서 닿는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아, 젠장할. 젠장, 젠장할…….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케이는 더러운 마구간 냄새를 맡으며 엘리자베스의 쇄골에 입을 맞추다가 그녀의 턱과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엘리자베스는 바들바들 떨며 케이의 몸에 매달렸다. 엘리자베스의 입술에서는 독한 위스키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났다. 케이는 3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던 그것들의 냄새를 깊이 빨아들였다.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고 목구멍 저 안 쪽에서부터 허기와 갈증이 시작되었다. 케이는 이 주체할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괴물 같았던 자신의 내면이 폭발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돌아버릴 것 같아…….”

케이가 중얼거리며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춤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넉넉한 셔츠를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그것을 엘리자베스의 바지로부터 끌어올리지 않는 데에는 엄청난 인내심이 요구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뒷머리를 쓸어올리며 떨기만 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달콤한 체액을 들이마시면서, 때때로는 그녀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어대면서 엘리자베스의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는 것을 느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 안에서 점점 더 망가져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전부 다.

하지만 더 망가졌으면 좋겠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어깨를 밀어냈을 때는 케이의 눈은 엉망이었다. 케이는 엉망이 된 눈으로 말했다.

“사랑해.”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그 말 앞에 일그러졌다. 케이는 그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너를 밀어내는 것은 이토록 간단한 일이었다. 내 마음을 고백하기만 해도 너는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케이는 대답을 아는 질문을 자꾸만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사랑해.”

* * *

엘리자베스는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소매 끝으로 마구 비벼 체액을 닦아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소리쳤다.

“거짓말!”

엘리자베스가 외치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유감스럽게도 거짓말이 아니야.”

“아니. 거짓말이야. 너는 그냥…….”

엘리자베스는 적당한 말을 찾아 헤맸다.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케이의 목소리가 떠다녔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엘리자베스는 그 목소리 속에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3개월 후면 엘리자베스는 죽을지도 모르고, 케이 하커에게는 그를 붙잡아줄 여자가 필요하고, 두 사람은 리오든이 떠들썩하도록 파혼을 했는데— 그런 모든 이유들이 핑계로 느껴질 만큼 케이의 말은 강력했다.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그냥 소유욕과 사랑을 헷갈리는 거야. 아니면 동정과 사랑을 헷갈리든지. 네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거 들었어. 로킨트에 있는 네 독신자 저택에서 말이야. 프란시스에게 내가 몰락한 왕족이라 불쌍하고 그래서 챙겨주고 싶다고…….”

엘리자베스는 처음에는 단호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고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의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엘리자베스는 눈물을 닦아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주저앉았다. 그녀는 말똥과 흙 따위가 뒤엉킨 더러운 마구간 바닥에서 자신의 편지를 주워들었다.

“답장도 안 했잖아. 내 편지를…… 읽고도 불태웠다고 했잖아. 그만큼 답장하기 싫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랑할 리가 없어.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건…….”

엘리자베스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케이의 표정은 엘리자베스가 예상한 것처럼 오만하고 건방지기는커녕,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거울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얼굴을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편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어깨를 밀치기도 했다. 케이의 거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잖아! 거짓말이라고 말해! 왜 그런 말로 나를 놀리는 거야! 그러면 안 되잖아! 정말 안 되잖아……!”

엘리자베스는 술이 완전히 깨버린 맨 정신으로 케이를 마구 밀어댔다. 그러자 케이는 조금씩 밀려났다. 하지만 그건 엘리자베스의 힘 때문이 아니고 케이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이 서서히 밀려나는 것을 보며 케이를 더 때렸다.

“이 미친놈. 감히 나를 희롱하다니. 넌……. 넌……. 넌 진짜 나빠…….”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라도 케이 하커가 자신을 보며 거짓말이라고, 진짜 속았냐고 건방진 미소를 지어주길 기다리며.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엘리자베스의 주먹을 잠시 손으로 매만지다가 그것을 살짝 놓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나는 네가 미치도록 좋아.”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오만하고 건방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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