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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69화 (16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69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분노한 얼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케이에게 말했다.

“나쁜 기억 같은 건 잊어버리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셔츠 자락이 펄럭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없어져라, 없어져라, 이런 소리를 중얼거리며 케이의 정수리를 때렸다.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서 국자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무슨 나쁜 기억.”

“그냥 뭐든지. 넌 나랑 있는 동안 나쁜 일만 생겼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고 있는 사이에 주전자의 물이 확 끓어 넘쳤다. 케이가 얼른 엘리자베스를 잡아당겼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주전자를 꺼냈다.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안 뜨거워?”

“별로.”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당황해서는 자신의 장갑을 벗기려고 하자 케이가 그녀를 밀어냈다. 케이는 주전자를 쟁반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힘의 반동으로 소파에 주저앉아버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 하는 짓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술기운 탓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돼서 그런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걱정 같은 건 할 필요 없지. 지금 널 봐. 몰락한 공녀와 아버지의 재산을 강탈한 레본의 제일가는 도둑 중에 누가 더 나은 삶이겠어.”

앰버가 케이의 말에 에드워드의 팔을 꼬집었다. 에드워드가 케이를 말리려고 할 때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나?”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흐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며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당연히 내 쪽이지. 난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졌어. 넌…… 넌 늘 네가 원하는 것을 몰라 도망만 다니지만.”

아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내가 원하는 건 너야.

동그란 눈에 빠져버릴 것 같이 푸른 눈동자를 가진 주제에 늘 얼굴 어딘가에는 바보 같은 순진함을 가지고 있고 그런 주제에 눈빛에는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아름다움을 갖춘 새하얗고 조그마한…… 이상한 여자.

내 인생에서 너만큼 가지고 싶었던 것은 없어.

케이는 하마터면, 에드워드가 그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외치고 말았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대고. 하지만 에드워드가 케이를 말렸다. 에드워드는 케이의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좋은 날이잖아요?”

에드워드의 장난스러운 말에 케이는 끓어오르던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에드워드를 보았다. 케이는 에드워드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응접실에서 졸다가 막 깨어난 윌슨도 웃고 앰버도 웃었다. 심지어는 엘리자베스마저 킥킥거렸다.

그래. 케이는 오늘 레본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 참이었다. 비록 6개월 후에는 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케이는 철 주전자에 담겨 있던 약을 도자기로 만든 작은 주전자에 옮겨 따른 후 철 주전자를 하인에게 내밀었다. 하인은 낄낄거리며 웃는 케이의 일행을 보며 쭈뼛거렸다. 케이는 그런 하인을 무시하고, 도자기 주전자를 올린 쟁반을 들고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며 케이는 화려한 벽지와 번들거리는 바닥재 따위를 일별했다. 클레몬트 공작 부부의 저택에서 보았던 고풍스럽고 사연이 있는 아름다운 그림, 조각, 샹들리에 따위는 로버트의 저택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귀족들의 물건을 감히 평민에게 파는 상인들은 없었다. 그건 귀족 고객을 손에서 놔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중고조차도 로버트에게는 허락되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돈이 없어 물건을 내다파는 처지라도 자신의 물건이 평민의 저택을 꾸미는 것은 눈 뜨고 못 보겠다는 귀족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비싼 값을 주고 그림을 베끼거나 그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돈으로 처 바른 황금 장식을 둔 저택 내부를 바라보았다.

케이가 볼 때 이 저택은 거대한 장식물에 불과했다. 이것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었다. 그저 로버트의 계급적 열패감을 그나마 아름답게 치장해 가려줄 포장지 같은 것이었다.

케이는 침실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든 프란시스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프란시스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프란시스 옆을 지키던 하녀가 쪼르르 와서 그에게서 쟁반을 가져갔다.

“제가 할게요.”

케이는 잠에 든 프란시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하녀가 자신의 손에서 쟁반을 가져가도록 두었다. 저 늙은 여자도 로버트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그의 삶을 꾸미는 하나의 살아 있는 장식물. 케이는 하녀가 프란시스를 흔들어 깨우는 것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케이는 눈을 감아도 선명한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을 떠올려보았다. 그녀가 썼던 편지를 내밀며 로버트가 하던 말도.

‘크큭, 벼룩도 키워놓으니 쓸모가 있단 말이야. 엘리자베스에게 환심을 사놓으라고 했더니 그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려놓았구나. 여자들이란 원래 자존심을 다치는 게 무서워 인생을 망치는 작자들이야. 그 공녀 년은 지금 네가 갖고 싶어서 눈이 시뻘건 게야.’

케이는 그때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불태웠다고 거짓말한 것을 후회했지만 프란시스의 퀭한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더라면 엘리자베스는 이 저택의 일부가 되어 로버트의 인생을 꾸미는 장식물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남아 있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편지를 쓰고, 두 사람이 약혼을 하고, 수도원에서 엘우드 밀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그 사이에……. 그 사이 대체 언제 너는 나에 대한 동정심을 눈에 갖추게 된 것인지.

언제부턴가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그를 보는 눈동자에 담긴 슬픔과 고통을 보았다. 절망과 아픔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케이를 지키고 싶어 했고 자주 케이를 위로하려고 들었다. 동정은 사랑보다 나을 수는 없었지만 사랑을 흉내 낼 수는 있었다. 케이는 치졸한 욕망이 자꾸만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프란시스가 약을 다 마시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내가 약을 안 먹고 버릴까 봐 지키고 서 있는 거니?”

프란시스의 질문에 케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

“그래…… 그렇겠지. 이 고얀 녀석.”

프란시스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약을 먹었다. 프란시스는 어지러운 지 몇 번 쉬었다가 마시고 쉬었다가 마시기를 반복했다. 케이는 그 사이에 쟁반에 올려 두었던 퍼지를 프란시스에게 내밀기도 했다. 프란시스는 퍼지를 집어들고 우물거리다가 침대 헤드에 기대서 쉬고 다시 약을 마셨다.

“……다 먹었어. 그러니 이제 그만 나가라.”

프란시스는 속이 울렁거린다며 케이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케이는 직접 주전자를 가지고 내려가고 싶어 하는 하녀에게서 쟁반을 빼앗아 들었다. 빈 주전자를 엘리자베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엘리자베스는 술에 잔뜩 취한 주제에 이 미끌미끌한 계단을 기어올라 프란시스를 보겠다고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케이는 쟁반을 들고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자 미끈거리는 바닥재 위에 깔린 카펫에 작은 종이 쪼가리가 떨어진 게 보였다. 케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로버트 저택에 있는 하인들은 전부 숙련자들이었다. 로버트가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이런 종이를 내버려뒀을 리도 없거니와 아까 케이가 방에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종이였다.

케이는 종이 쪼가리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바닥을 살폈다. 그러자 종이가 몇 개 더 떨어져 있었다. 케이는 그 종이를 따라 걸었다. 그러자 21살의 케이 하커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던 이 저택에서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케이는 21살에 엘리자베스와의 약혼과 로킨트의 방직공장을 아버지와 교환했다. 졸렬한 짓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좋아한다고 한 것이 아버지의 말처럼 그저 소유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케이는 그렇게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아버지는 케이가 약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장 그를 내쫓을 기세였다. 그리고 그가 공장 소유주가 되면 로킨트의 노동 운동가들의 지붕이 되어 줄 수도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로버트 앞에서 케이를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하면 엘리자베스의 혼삿길이 막힐 우려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들이 전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시절의 케이도 알고 있었다. 케이는 그저 편지 속에 담긴 잘 포장된 거짓말에 속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금발의 새하얀 피부를 가진 인형 같은 여자를 훔쳐서라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케이가 약혼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로킨트의 독신자 저택과 공장이 케이 앞으로 떨어졌고 케이는 더 이상 로버트의 저택에서 지내는 시간이 없어졌지만 로버트의 저택에는 케이의 방이 생겼다. 케이는 이 방에 놓고 갈 물건이 거의 없었다.

몇 가지를 빼놓고는.

케이는 아까와는 달리 살짝 열린 방문을 열어보았다. 허름한 침대와 침구, 그리고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방 안에도 작은 종이 쪼가리가 하나 있었다. 케이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서 쟁반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고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겨우 십분 남짓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아래에 내려가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앰버는 응접실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고 에드워드는 층계참에서 내려오는 케이를 주시했다. 윌슨과 미리엄은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앰버가 곤란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나지막이 말했다.

“말해.”

“……엘리자베스가 사라졌어.”

앰버의 말에 케이가 이를 아드득 갈았다. 케이의 분노를 예상한 에드워드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산지놀이를 알려줬는데요. 엘리자베스가 무척 해보고 싶어 해서 시간을 10분 주고 이 저택 안에 숨으라고 했거든요. 술에 취하기도 했고, 솔직히 이 저택 안에서만 숨기로 했으니까 멀리 못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산지놀이란 여우라고 불리는 술래가 남들이 눈을 가리고 있는 동안 숨는 놀이였다. 3걸음마다 종이를 찢어서 떨어뜨려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케이는 자신의 주먹을 펴서 아까 보았던 종이를 보았다. 케이가 분노한 얼굴로 앰버를 보았다. 앰버가 말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이 안에 있을 거야. 현관문을 나갔다고 해도 정원이나 온실에 있겠지. 우리 다 취했고 그래서 못 찾는 걸 거라고. 하인들을 불러올게.”

앰버는 살짝 풀어진 혀로 말했다. 에드워드는 앰버의 옆에 서서 그녀가 쓰러질까 두려운 듯 그녀를 지켜보았다. 케이는 앰버에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미리엄과 윌슨에게 소리쳤다.

“윌슨! 미리엄! 내가 엘리자베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만 찾고 응접실에 가만히 있어.”

케이는 자신의 방 책상의 아래 서랍 문이 열려 있던 것을 떠올렸다. 케이는 현관문을 열었다. 케이의 걸음은 마구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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