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68화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자 케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윌슨이 투덜거리며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노망이라니! 네놈보다 내가 더 빨리 숫자를 굴릴 수 있다는 데에 내기를 해도 좋다!”
“그럼 휘스트 하면서 우리 노인네 노망났는지 안 났는지 봅시다.”
케이의 말에 윌슨이 케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케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키득거리며 윌슨에게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윌슨을 따라 케이도 들어가길 기다렸지만 윌슨이 들어가고 나서도 케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문을 열고 있었다. 케이가 말했다.
“들어가자.”
“나, 난…… 프란시스 약을 만들어야 해.”
엘리자베스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았다.
“벽난로에서 만들어. 돌아가면서 보면 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더 활짝 열었다. 엘리자베스는 머뭇거리며 거기 서 있었다. 그러자 케이가 말했다.
“네가 거기 그러고 있으면 다들 너랑 나를 이어주고 싶어서 더 헛소리를 할 거고, 나는 그런 소리는 그만 듣고 싶어.”
케이는 짝다리로 서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입맛을 다시고 안으로 들어가며 웅얼거렸다.
“여름에 벽난로라니…….”
케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하인들을 불러왔다. 벽난로를 피우라는 말과 함께 하인들이 움직였다.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서서 앰버와 에드워드, 미리엄이 모여 앉아 있는 탁자를 보았다. 앰버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엘리자베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윌슨이 들어가서 쉬고 싶다고 고집 부려서 지금 사람이 하나 부족해요. 케이 하커는 한 번 크게 지더니 삐져서 빠져버렸구요.”
케이는 앰버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하인들과 함께 장작을 날랐다. 하인들은 케이가 손수 장작을 나르는 것을 보며 안절부절 못했지만 케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소심한 반항을 전부 치워버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앰버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앰버가 한층 밝은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위스키 잔을 내어주었다.
“마실래요?”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잔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윌슨이 한 말이 귓가에 윙윙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잔에 있는 위스키를 목구멍 안으로 털어 넣어버렸다.
엘리자베스가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자 미리엄이 킥킥거리며 좋아했다. 일행이 다 재밌어하자 벽난로를 지피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케이가 고개를 돌려 일행 쪽을 바라보며 맘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앰버가 말했다.
“한 대 피울래요?”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케이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앰버를 노려보았지만 앰버는 품 안에서 고풍스러운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케이를 향해 손가락을 저어 보였다. 꺼지라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손가락을 내젓는 앰버를 보며 살짝 웃었다. 여전히 머릿속이 웅웅거렸지만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켠 덕에 몸속이 따뜻해지기는 한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명령이라도 하듯 말했다.
“밖에 있는 주전자도 가지고 올 거지?”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술은 작작 마셔. 별로 세지도 않잖아.”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케이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닥뜨리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가면무도회를 떠올리며 하는 얘기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길을 걷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내가 또 너를 놓고 어떤 기대를 했다니. 엘리자베스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삐뚤빼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케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가 뭔가 말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사이 엘리자베스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엘리자베스는 카드들 사이에 대충 놓인 성냥을 집어들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니코틴이 엘리자베스의 숨을 타고 핏줄 속으로 맹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앰버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드 줘요.”
그러자 앰버가 재밌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앰버가 말했다.
“편을 어떻게 나눌까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오른쪽에 있었던 미리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나랑 미리엄이 같은 편을 할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어머. 나를 버리는 거예요? 아쉽네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붉은 눈처럼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하지만 자꾸만 윌슨의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케이에게는 지금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케이는 리오든에 자신을 붙잡아둘 사람이 없다면 또 전쟁터로 떠나겠지요.’
케이 옆에 누군가가 있어줘야 한다면 그건 어쨌든 3개월 후에 죽을지도 모를 엘리자베스는 아닐 것이다.
* * *
“마지막은 늘 이렇게 끝났지요. 너의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는 윌슨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어지는 목소리에 곧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공녀님이 쓰신 편지가 맞나 보죠?”
케이는 윌슨이 케이가 외우고 다녔던 그 편지를, 케이가 죽음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던 그의 기도문을 일컫는다는 걸 알았다. 현관문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케이가 조용히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뭔가……. 잘못 들으셨겠죠.”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는 순간 케이는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대로 몸이 굳어져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편지를…… 그런 거짓말투성이의 편지를 믿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너의 세상을 바꿨다는 둥, 영원히 나를 기다릴 거라는 둥, 나를…… 나를 좋아한다는 둥. 그런 헛소리 따위를 진심으로 믿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성의도 없는 거짓말을 평생 마음에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당연히 몰랐겠지만, 자신이 그 편지를 썼다는 사실조차 엘리자베스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케이의 뒤통수를 때리고 지나갔다. 케이는 그 자리에 서서 엘리자베스가 편지 내용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인지 가늠해보았다.
그 어느 쪽이더라도 끔찍할 것이었지만.
“……리오든에 케이를 붙잡아놓을 사람이요. 케이가 무역회사의 활로를 찾다가 죽을 뻔했다는 건 잘 알고 있겠죠?”
그 사이에 윌슨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케이는 그 모든 이야기를 마치 타인의 이야기처럼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마음속에 솟아나는 욕망을 느꼈다.
나를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동정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케이는 치졸한 기분에 시달리다가 현관문 중간에 달린 유리창 너머로 윌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더러운 것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을 듯한 신비로운 눈동자는 케이의 그런 더러운 욕망 따위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케이는 그 푸른 눈동자 위에 겹쳐지는 고귀한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라던 엘우드 밀.
케이는 엘우드 밀을 향해 두근거리던 엘리자베스의 심장 박동을 여전히 자신의 심장으로 느낄 수 있었다. 케이 하커에게 남은 시간이 겨우 6개월뿐이라면 그 6개월 동안 해야 할 일은 엘리자베스에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면서 동정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빌어먹을 그 의사 선생이 엘리자베스를 기억해내고 치료제를 토해내게 하는 일이었다. 케이가 문을 열고 나갔다.
“노인네. 노망 날 때가 돼서는 별 말을 다 하는구먼.”
케이가 나가자 윌슨이 민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케이를 바라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동정하는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건 그것대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동정을 빌미로 그녀를 묶어놓고 싶어서.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안으로 들어와서 벽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에만 집중했다. 문제는 그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또, 또 졌어요!”
케이는 이미 꼬부라지기 시작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드놀이를 하는 일행들을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하인의 옷까지 빌려 입고 펑퍼짐한 셔츠 차림이었다.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술에 취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꾸만 볼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카드를 노려보았다.
“왜! 왜 나한테만 선이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나두 잘할 수 있는데!”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볼멘소리를 하며 카드를 허공으로 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일행들은 전부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케이는 아까부터 자신들을 노려보는 케이를 의식해 얼굴은 아래로 떨궜지만 잔뜩 올라가 있는 그들의 입꼬리를 선명히 보았다. 케이는 참지 못하고 엘리자베스에게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소파에 목을 걸친 채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일어나. 올라가서 자게.”
“시이이이러.”
일행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어깨만 떨기 시작했다. 케이는 이를 바드득 갈면서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어깨 위에 얹었다.
“뭐하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케이가 말했다.
“널 짐짝처럼 집어들어서 위층에 갖다 놓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케이의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쳤다.
“싫어. 싫다잖아. 너 내가 끓여놓으라던 약은 제대로 끓인 거야? 이제 벌써…….”
엘리자베스는 1시간 반짜리 모래시계를 들고 휘청거리며 벽난로로 걸어갔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걸 몇 번째 뒤집는 거더라? ……지금 몇 시죠? 웃지 마요! 에드워드! 아까 나한테 3시간 지나면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웃지 말고 대답을 해야죠!”
엘리자베스의 호통에도 에드워드는 계속 키득거리다가 엘리자베스가 비틀거리자 얼른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앰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다가 맞을 것 같은데.”
앰버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에드워드의 손에서 낚아채 벽난로에서 가까운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에드워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맞지는 않았는데요……. 맞은 것 같기도 하고…… 얼얼하네…….”
에드워드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사람처럼 제 얼굴을 매만졌다. 그 사이 엘리자베스는 벽난로 근처에 앉아서는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고 국자로 약을 떠서 농도를 살폈다. 케이는 이를 악물고 엘리자베스에게 걸어갔다. 엘리자베스가 국자로 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약을 잘 끓였군. 칭찬할 만해. 그대의 공로를 치하하노라…….”
엘리자베스가 국자로 케이의 머리와 어깨를 콩콩 때렸다.
“닥쳐. 엘리자베스.”
케이는 꾹꾹 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왜. 나름 공신력 있는 거야. 나는 몰락했어도 왕가의 핏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