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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67화 (16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67화

유언장을 열람하고 로버트 하커의 먼 친척인 노인이 그것을 확인하며 변호사가 로버트의 모든 신탁을 케이에게 승계하는 일련의 과정은 허무할 정도로 짧고 간단했다. 케이는 변호사가 가리키는 곳에 몇 번 서명을 했을 뿐이었는데 그는 어느새 레본에서 가장 거대한 공장들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켄드릭의 몫으로 남겨진 이 거대한 저택과 마차 2대는 나중에 켄드릭이 서명하고 인계 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가 서류만 꾸며놓고 돌아갔다. 대부분의 서류는 간단했지만 한 은행의 신탁 관련 건은 시간이 조금 걸리는 듯했다. 변호사는 사무실로 돌아가서 서류를 완성해 새벽녘에 돌아올 거라고 했다.

1층에서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벌어지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화로에서 약을 끓였다. 그녀는 변호사가 돌아갈 즈음이 되어서야 프란시스에게 약을 가지고 올라갔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에게 켄드릭이 오늘 안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멍청한 자식이 어디선가 화풀이를 하고 있겠지. 그리고 며칠 안에 돌아와서 케이에게 협박을 했다가 빌어봤다가 안 되면 깽판을 칠 거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예상이 적중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의상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답하며 그녀에게 잔에 든 진한 차 같은 약을 내밀었다. 프란시스는 그것을 받아들고 천천히 마시면서 말했다.

“……따뜻해.”

엘리자베스는 뜨거운 약을 흡입한 덕에 프란시스의 얼굴이 뽀얗게 달아오르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변호사와 로버트의 먼 친척은 이미 떠난 뒤였고 윌슨을 비롯한 케이의 오랜 친구들이 응접실에 모여 앉아 카드놀이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앰버는 층계를 내려오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밝은 얼굴로 말했다.

“같이 해요. 케이와 프란시스는 오늘 여기서 자야 할 거고, 우린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여기서 밤을 샐 예정이거든요.”

케이는 앰버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커피가 들어 있는 잔을 내려놓았다.

“헛소리. 그냥 카드놀이를 할 장소가 필요한 거겠지.”

“아니라니까요. 켄드릭이 돌아와서 또 깽판을 치면 어떡해요!”

에드워드가 항변하자 케이는 에드워드의 정강이를 장난스럽게 옆에 있던 부지깽이로 때렸다. 에드워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힘이면 안 지켜줘도 되긴 하겠네요.”

엘리자베스는 오래된 친구들 특유의 장난스럽고 실없는 대화에 끼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다시 현관 밖의 화로로 가서 물이 담은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3시간에 한 번씩 마셔야 하는 약이었기 때문에 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주전자를 빼두고 불씨가 죽은 화로에 불을 살리기 위해 부채질을 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현관 밖으로 나왔다. 윌슨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내일쯤에나 불이 붙겠군요.”

윌슨이 정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엘리자베스에게서 부채를 빼앗아갔다. 윌슨은 엘리자베스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부채질을 해서 불씨를 살리더니 그것을 꺼트리지 않고 손쉽게 화로 전체를 달구는 불로 만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윌슨의 솜씨에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잘 붙네요. 부엌일을 해보셨나 봐요?”

윌슨은 불씨로 눈을 가져가며 말했다.

“부엌일이라기보다는…… 추울 때 화로라도 피워서 빈민원에서 나눠주는 포리지에 물을 더 부어서 마시려다 보니까 능숙해진 거지요. 물론 이렇게 좋은 장작은 누가 다 주워가서 없고 보통 우리한테는 물에 젖고 썩기 직전의 나무만 있었습니다.”

윌슨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남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가난한 생활을 경험해보았지만 그것은 경험의 영역에 지나지 않았다.

엘 선생은 의사였고 의사는 굶어죽는 일까진 없었다. 그들이 더러운 빈민원이나 수도원 따위를 전전했던 것은 그저 엘 선생의 선택에 지나지 않았다. 가난은 엘리자베스에게는 먼 얘기인 셈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미소를 보던 윌슨이 짐짓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짚이 섞인 포리지 먹어봤어요? 더럽게 맛이 없다우.”

“짚이요?”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되묻자 윌슨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요. 솔치노 뒷골목에 있는 빈민원에는 짚 섞인 포리지를 줘요. 얼마나 맛이 없는지. 개놈들. 그 놈들이 빈민원으로 들어오는 물자를 빼돌린다는 말이 있었다우.”

“그걸 어떻게 먹어요?”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윌슨이 노동자들이 쓰는 특유의 라임이 살아 있는 말투로 말했다.

“공장에 남는 빵 쪼가리 조금 훔쳐다가 넣어서도 먹고, 썩기 직전의 우유를 넣어 먹기도 하고 안 되겠으면 케이 하커한테 줘버리기도 하죠. 하지만 어쨌든 절대 버리진 않아요.”

“케이 하커요?”

엘리자베스가 의외의 이름이 윌슨에게서 나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윌슨이 대답했다.

“저 답답한 자식은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우. 3일 배를 곯아도 안 먹는 솔치노 빈민원 포리지도 먹어치웠지만 어떤 고얀 놈들이 빵 사이에 종이를 끼워서 줘도 모르고 처먹었지요. 대체 뭐 하는 놈인지 원…….”

엘리자베스는 빵 사이에 낀 종이를 눈치도 채지 못하고 우적우적 씹는 케이를 상상해봤다. 그러곤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윌슨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흐뭇하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웃으니까 영락없이 천사 같구먼.”

엘리자베스는 윌슨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뺨을 만졌다.

“천사라니…….”

“부활절에 계란 받으러 가면 보는 교회당 벽화에 그려진 천사들 말이우. 그렇게 생겼어요. 케이의 말이 맞구먼.”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윌슨의 말에 살짝 굳어졌다. 윌슨은 그것마저 눈치채고 시선을 주전자 쪽으로 돌리고 화로에 부채질을 하며 얘기했다.

“케이가 공녀님 얘기를 딱 한번 했는데, 맥주에 잔뜩 찌들어서는 당신이 천사처럼 생겼다고. 그 말을 몇 번이나 했었지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활활 타오르는 화로를 보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상한 말을 했지요. 몇 번……. 정말 이상한 말이었는데, 그 이상한 말들을 몇 번 듣다보니까 언제부턴가 알게 됐어요. 그게 공녀님이 케이에게 보내는 편지였다는 걸 말이우.”

윌슨의 말은 이상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그 의미를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윌슨을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때 윌슨이 말했다.

“케이 하커가 막 공녀님하고 약혼했을 때 즈음이었는데 그 녀석이 술만 먹으면 그 말들을 했다우. 그 말은 이렇게 시작되곤 했지요. 케이에게. 내 편지가 너에게 갑작스러울까 봐 걱정이야.”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곧바로 자신이 썼던 과거의 편지를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그 편지 내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 편지를 편지지 위에서는 딱 세 번 고쳐 썼을 뿐이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삼백 번도 넘게 쓰고 또 써보았기 때문이다.

공장에 찾아가기만 하면 불퉁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던 케이 하커. 같이 산책을 하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걸어가 버리던 케이 하커. 사교 모임에서는 창가에 서서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수많은 케이 하커를 바라보며 수많은 편지를 쓰고 또 지워왔다. 2년 내내.

그랬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케이 하커가 읽지도 않고 불태웠다고 했던 그 편지 내용을.

그리고 그 편지를 인생 최고의 수치로 간직해왔다. 읽히지도 못하고 불태워진 마음. 심지어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엘리자베스는 그 편지를 불태웠다는 케이 하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은 늘 이렇게 끝났지요. 너의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엘리자베스는 윌슨의 말을 들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잔머리를 쓸어올리며 윌슨을 바라보았다. 윌슨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공녀님이 쓰신 편지가 맞나 보죠?”

윌슨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뭔가……. 잘못 들으셨겠죠.”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고 윌슨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알지 못하는 케이의 시간 속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엘리자베스는 수없이 공장에 놀러갔지만 그녀가 공장에 갔을 땐 케이가 밤새 노동을 하고 더러운 마구간에서 잤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는 언제나 괜찮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고 대체로 사무실에서 그녀를 맞이했고 직원들을 관리감독 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것도 깨달았다. 과거 공장에서 미리엄의 얼굴 정도는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에드워드나 윌슨은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케이 하커를 보고 있었는데 언제나 그곳에는 케이 하커가 없었다.

거짓말쟁이…… 케이 하커.

윌슨이 한숨을 내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공녀님. 두 사람이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로 어려움이라는 것은 두 남녀를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두 사람을 공포스러운 기억의 일부로 기억하게도 하지요.”

엘리자베스는 윌슨이 그녀의 부정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케이와의 과거를 부정하는 이유가 너무 나쁜 기억들만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지금 너무 좋은 것들을 기억해버리면 위험하다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케이를 자꾸만 더 원하게 되어버리면…… 죽고 싶지 않아질지도 모르니까.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윌슨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윌슨을 보자 윌슨이 먼저 말했다.

“하지만 케이에게는 지금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리오든에 케이를 붙잡아놓을 사람이요. 케이가 무역회사의 활로를 찾다가 죽을 뻔했다는 건 잘 알고 있겠죠? 아루쉬라는 자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케이는 꼼짝없이 이국땅에서 이국 부족들의 칼에 맞아 죽었을 겁니다. 거긴 전쟁터에 가까워요. 케이는 리오든에 자신을 붙잡아둘 사람이 없다면 또 전쟁터로 떠나겠지요. 제가 저에게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했던가요? 제 아들도 무역업의 끝물쯤에 겨우 12살의 나이로 배를 탔습니다. 돌아오지 못했지요. 그게 벌써 15년 전의 일이네요. 물론 퀴닌 덕분에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선원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건 사실이지만 내게 케이 같은 아들이 있다면 말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았을 겁니다, 케이를.”

윌슨은 어느새 촉촉해진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윌슨에게 더 이상 자신과 케이를 엮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그 표정을 보곤 말을 멈추고 말았다. 엘리자베스가 복잡한 머리로 뭔가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 앞에 한 남자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인네. 노망날 때가 돼서는 별 말을 다하는구먼.”

케이였다. 케이는 어느새 장난스러운 얼굴로 윌슨에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윌슨이 언제 울었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를 부지깽이로 때리려고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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