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166화 (16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66화

* * *

케이가 교회당 단상 위에서 했던 말처럼 그날 공장은 비상상태였다. 다들 밤을 새서 눈이 새빨갰고 케이 역시 밤새 일을 한 탓에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러니 공장장이 케이를 호출했을 때 케이는 미리엄 같은 친구들에게 미안하긴 했어도 라인에서 이탈하는 것이 반가웠다.

그리고 그 반가운 손님이 바로 로버트 하커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로버트가 그를 찾으러 일평생 처음 공장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케이는 ‘가족’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며 기대감에 차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족.

미리엄의 플랫에 가면 좁아터진 방마다 5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요를 덮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봐도 함께인 것이 따로인 것보다 불행한 사람들이었는데도 함께 했다.

미리엄은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누나를 위해 공장이 끝나고 새벽에 구두닦이 일을 했고 그의 아버지는 결핵에 걸려 죽기 전까지 유독가스가 넘쳐나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가족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서로를 도와야 하는 것은, 불행과 행복과는 상관없는 당연한 것이라고 미리엄은 말했다. 그리고 불행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만 행복은 이따금 찾아오는 것이며, 가족과 함께이면 그 행복이 찾아올 확률이 높아진다고도 했다.

케이는 로버트 하커의 얼굴을 보고, 로버트가 자전거를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손을 넓게 벌리며 ‘케이!’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자신에게도 저 남자를, 인생에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않은 남자를 그리워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여기게 되었다.

케이가 어색한 걸음으로 뒤에서 꽂히는 공장장과 공장의 소년들의 시선을 받으며 로버트에게 걸어가자 로버트가 케이에게 친근하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헝클었다. 케이는 한 번도 없던 일 앞에 얼어붙었고 로버트는 케이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로버트는 정문 쪽으로 자연스럽게 케이를 이끌고 정문 앞에서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벼룩 놈도 키워놨으니 하커 가의 자손 노릇을 해야지. 오늘 데뷔탕트를 노려 기차를 타고 리오든에 도착하는 공작 부부가 있어. 멍청하고 사치스러운 자들이지. 그 사람들에게 딸이 하나 있다. 공작 부부는 그 딸이 리오든에 처음 온 시골뜨기라고 손가락질 받는 게 두려운 모양이더구나. 네가 적당히 에스코트를 하고 말을 좀 터놔. 너무 설설 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너보다 어린 계집이고 촌뜨기에 부모를 닮았다면 철없고 사치스럽겠지. 무엇보다 하커 가문의 자손이 귀족 앞에서 너무 설설 기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다. 공작 부부에게 내가 저택을 마련해주며 빌려준 돈도 꽤 되니 그냥 평범하게 대해라.”

케이는 공작 부부의 딸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몸이 움찔거리는 스스로가 싫었다.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리오든을 구경시켜주는 겁니까?”

케이의 말에 로버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케이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하여, 또 얻어맞을 것에 대비해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곧 일그러진 얼굴을 일시에 터트리더니 껄껄 웃었다.

“뭐? 뭐라고? 네가 감히 공녀를 말이냐? 너 같은 놈이? 그럴 리가. 너는 하커가에서 보내는 종놈 노릇 정도를 하는 거란다. 내가 주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전거를 타고 노스 리오든에 가라. 이건 그냥 포목 배달을 하는 것 정도의 일일 뿐이야. 이 멍청한 녀석……! 네가 감히 공녀에게 리오든을 구경시킬 생각을 하다니! 크큭……. 넌 정말…… 머리에 든 거라곤 하나도 없구나.”

로버트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웃는 동안 케이 하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그때 케이는 인생 처음으로 치욕을 경험했다. 케이의 삶 내내 케이를 치욕스럽게 만들려는 자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실패했다. 케이는 자신의 인생에 기대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을 치욕스럽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케이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로버트 하커가 정문에서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는 내내 그 나락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미 떨어지고 있는데, 계속 떨어질 일만 남은 기분.

케이는 더러운 옷을 입고 얼굴에는 유제를 묻힌 채로 모자만 뒤집어쓰고 공장을 나섰다. 공장장은 순순히 그를 내보내주었고 미리엄은 케이를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아니, 공장의 모두가 케이를 부러워했다. 케이가 그냥 케이가 아니라 케이 하커라는 것을 모두가 방금에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굴었다.

케이는 이를 악물고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로킨트 거리를 걸어 옴니버스를 잡았다. 짐마차를 개조한 더러운 옴니버스에 몸을 싣고 노스 리오든에 내렸다. 포목을 나르던 옷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과 컬로든 궁 근처의 타운 하우스가 모여 있는 곳은 노스 리오든 안에서도 전혀 다른 동네였다.

포목을 나르던 옷가게들이 모여 있던 에렌델 스트리트에는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한 자본가의 부인들과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평민 옷가게 주인들과 심부름을 하러 다니는 급사 소년들이 있었지만 이곳에는 그런 이들이 없었다. 때때로 정원 앞에서 말갈기를 빗질하는 마부들조차 멋진 옷에 모자, 그리고 가발을 쓰고 있었다. 케이는 그 거리를 걸으며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케이는 자신 안에 있는 기대감을 발견해버린 상태였다. 케이는 자신이 살아남기만을 바라는 벼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인간이었다. 그의 몸속에는 수많은 욕망들이 꿈틀거렸고 그는 그것을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조화시키며 살아가야 했다. 그는 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값비싼 타운하우스들의 담장에 손 끝 하나조차 닿을까 봐 멀찌감치 걸었다.

또 다시 기대를 할까 봐. 그 기대감이 이미 깊디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인 그의 영혼을 아예 산산조각 내버릴까 봐.

케이는 지지해주는 바닥이 없는 수렁을 걷듯 거대한 타운하우스를 찾았다. 타운하우스 앞에는 멋진 옷을 입은 하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가 자신의 이름을 대자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행색을 살폈다. 케이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듯이 그들은 뒤로 물러났고 그를 쫓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마차가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이는 털에서 윤기가 나는 말 4마리가 이끄는 거대한 마차가 쭉 뻗은 신작로로 채워진 로킨트와는 달리 구불구불한 마차 길을 위엄 있게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인들은 마차에서 내리는 공작부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케이는 그 자리에 애매하게 서서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는 곧 저택 앞에 섰다. 새로 칠한 듯 반들거리는 마차 문에는 금박으로 클레몬트 가문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왕실 가문이었다. 케이는 왕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 문으로 사람이 걸어 나올 거라는 사실에 압도되었다.

케이가 생각할 때는 그 안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나 신 같은 것이 걸어 나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왕족이었다.

긴장되는 케이의 마음과 달리 속절없이 문이 열리고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채 벨벳으로 만들어진 꽃 모양 리본이 달린 보닛을 쓴 한 여자애가 그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동그랗게 뜬 푸른 눈을 보는 순간 케이는 그 안에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케이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저 눈.

저 눈이 케이가 지금까지 걸어온 수렁의 종착지라는 기분이 들었다.

내내 추락해온 케이의 몸이 산산조각 날 곳.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의 눈동자는 케이에게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 눈이 언젠가 어린 케이 하커가 훔쳤던 작고 귀여운 인형을 닮았다는 점에서 더더욱.

버젓이 서 있는 하인들을 제치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손을 뻗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마부쯤으로 여긴 것 같았다. 케이는 그 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케이는 그 순간 자신이 어떤 기대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다시.

기대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저 여자의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 속에서 쉬는 기대감.

케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케이에게 손을 뻗던 여자애가 휘청하며 균형을 잃었다. 케이는 본능적으로 여자애에게 손을 뻗었다. 케이는 여자애의 손을 잡았다. 그 부드럽고 하얀 손을 잡는 순간 케이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닿고 말았다. 담장 하나에도 닿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이 길을 내내 걸어왔는데, 결국은 닿고 말았다.

케이는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귀족 아가씨는 마차에서 내리는 것도 혼자 못 하는군.”

그런 말이 케이의 기분이 나아지게 해줬을 리가 없었다. 케이는 오히려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케이의 입에서 나간 말은 케이의 영혼을 부수는 망치가 되어 돌아왔다.

여자애는 푸른 눈동자를 깜빡거리면서 그 인형 같은 입술을 움직였다. 케이는 그 입술에서 사람의 말이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알아듣지 못했어. 다시 말해줄래?”

그리고 그게, 그 인형 같은 여자애가 케이에게 한 첫 마디였다.

그의 혐오에 젖은 목소리 같은 것은 조금도 듣지 못했다는 듯, 이 세상에 감히 클레몬트의 공녀를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듯, 케이의 멍청함을 비웃으며 그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그날부터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는 그의 지옥이 되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가 뭐라고 했던가.

“귀족 아가씨는 같은 나라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나?”

* * *

그때를 생각하던 케이는 하커 가문의 저택 앞에서 멈춰선 마차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케이보다 앞서서 도착한 앰버와 엘리자베스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케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리자베스가 무어라 말했다. 그 신비로운 푸른 눈이 케이를 보며 반짝거렸다. 케이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뻗을 뻔했다. 엘리자베스를 품 안에 가두고 다시는 내보내지 않기 위해.

하지만 케이는 가까스로 참고 마차에서 내렸다. 케이는 마차에서 내려 땅을 내딛고 프란시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엄숙한 표정으로 유골함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프란시스의 품에 안긴 뚱뚱한 옥색 도자기를 보며 케이는 가슴 깊이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망자에 대한 슬픔 같은 것은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자각이었다. 치료제는 하나밖에 없다고 케빈이 말했다. 그 말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케이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케이는 죽음을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다. 죽음 앞에 서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처음으로 케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죽음은 그저 뼛가루가 되어 저런 도자기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다시는 그의 지옥이 되어줄 푸른 눈동자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