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65화
엘리자베스는 앰버와 에드워드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아루쉬는 할 일이 있다고 먼저 사라졌고 켄드릭은 자신은 유언장이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절대로 유언장을 공개하는 곳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케이는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로 그러라고 했다.
조문객들은 케이가 이미 하커 사의 주인이 된 것처럼 여겼고 케이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프란시스보다 먼저 마차에 타서 케이가 프란시스를 부축해 하커 사 인장이 박힌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창문을 닫고 건너편에 앉은 앰버에게 물었다.
“같이…… 안 가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누구랑요?”
“케이랑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요. 케이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걸요. 프란시스 부인도요. 부인은 절 싫어해요. 제가 불결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프란시스를 대신해서 항변했다.
“예전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은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죠. 그리고 예전엔 프란시스가 정말로 날 불결하다고 생각했나 보죠?”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허를 찔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 역시 프란시스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엘리자베스의 생각을 읽은 듯이 앰버가 부드럽게 말했다.
“남의 인생을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특히나 가까이서 보지 않은 사람들을요. 나한테도 그래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앰버는 화제를 전환하듯 말했다.
“같이 하커 저택으로 갈 거죠? 우린 모두 케이와 함께 있을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아루쉬가 주었던 약초를 보여주었다.
“오늘 하루는 꼬박 프란시스에게 먹여야 해요. 3시간 간격으로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앰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드워드를 보았다. 에드워드와 앰버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
엘리자베스가 의아하게 보자 앰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밤새 실컷 놀아야겠네요. 어쩔 수 없이요. 휘스트1)를 하는 것도 좋고요?”
엘리자베스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건 도박 아니에요?”
앰버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돈은 좀 가져왔겠죠?”
“저, 저는…….”
그때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앰버가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으로 보이는 대머리의 노년과 중년의 중간쯤 되는 듯 보이는 남성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윌슨!”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마차 문을 보고 있었다. 윌슨이라 불린 남자는 앰버의 손을 잡더니 그녀의 손등에 인사하며 웃었다.
“오랜만이군! 이젠 케이의 약혼녀가 되어 돌아왔다지? 난 둘은 반대야. 그렇더라도…….”
윌슨은 에드워드와 앰버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다가 엘리자베스를 보곤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 이분은…….”
엘리자베스는 윌슨이 생각보다 더 놀라는 것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때 윌슨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윌슨의 등을 툭 쳤다.
“엘리자베스 공녀님이지 않습니까. 오랜만이에요, 영감탱.”
엘리자베스는 그 누군가가 미리엄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활짝 웃었다.
“미리엄! 역시 왔었군요.”
“그럼요. 로킨트 남부에 있는 사람들은 어쨌든 모두들 로버트 하커 씨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지요.”
미리엄이 그렇게 말하며 계절과 맞지 않는 모직 모자를 벗었다. 낡고 해졌지만 미리엄의 옷장에 있는 것 중 제일 좋은 모자였을 것이다. 미리엄은 윌슨에게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마차 안에 있는 에드워드에게 손짓했다.
“뭐 해. 내려. 숙녀 분들은 두고 우린 걸어가야지.”
에드워드는 그 말에 입맛을 다셨다.
“전 이미 한 자리 차지했는데요.”
“시끄럽다! 이 노친네도 걸어가는데!”
윌슨이 꽥꽥거리자 에드워드가 시끄럽다는 듯이 귀를 막고 마차에서 내렸다.
다들 하커 저택에 가서 카드놀이를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장례식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그 순간 윌슨이 엘리자베스의 미소를 보더니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공녀님.”
엘리자베스는 윌슨의 말에 여전히 자신을 공녀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분이 약간 묘해졌다. 엘리자베스는 윌슨에게 대답했다.
“저도 영광이에요. 윌슨이군요. 생각해보니 미리엄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케이와 미리엄에게는 삼촌 같은 분이라구요.”
정확히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까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순화된 그녀의 말에도 윌슨이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삼촌은 무슨……. 그래봤자 이 녀석들은 윌슨, 윌슨 부르면서 내 머리 벗겨진 거나 놀리기 정신이 없다우. 나이 든 사람들한테 존경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고약한 놈들 같으니!”
윌슨의 말에 에드워드와 미리엄의 눈이 마주치더니 그들이 마차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머리 윌슨, 대머리 윌슨, 대머리 윌슨은 대머리라네!”
엘리자베스는 남을 놀릴 때 어린 아이들이 부를 법한 멜로디를 들으며 쿡쿡 웃었다. 미리엄과 에드워드가 노래를 마치자 얼굴이 시뻘게진 윌슨이 두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 저, 저!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그러자 미리엄과 에드워드는 저 멀리 달아났다. 마차의 마부가 그 사이에 앞의 마차들이 다 빠져서 이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윌슨은 그 말에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살짝 당황했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윌슨이 앰버에게 했던 것처럼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따가 저택에서 봅시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공녀님이라는 말보다 간단한 호칭이 맘에 들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출발했다.
* * *
케이가 마차에 올라타 마차 문을 닫자마자 프란시스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케이는 프란시스가 헐떡거리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병원으로 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이 정도는 괜찮아. 가끔 이렇게 어지러울 때가 있어.”
“가끔 이럴 때가 있다는 게 문제인 것 같은데……. 토비! 마차를 돌려서…….”
케이가 마부석 창문을 열자 프란시스가 다급하게 케이의 팔을 잡았다.
“괜찮다니까! 엘리자베스 걱정시키지 말고 저택으로 가자.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지 않니.”
케이는 프란시스의 파들거리는 팔을 보고 그제야 그녀가 엘리자베스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아까까지는 괜찮은 척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케이는 프란시스의 건너편으로 가서 그녀를 살폈다. 프란시스는 뒤통수를 마차 벽에 대고 어지러운 듯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켄드릭은 어디로 간 것 같니?”
케이는 켄드릭이라는 단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걸 모성애라고 부르는군요. 제 친모의 손을 이렇게 갈아놨는데도 결국 찾으시는 걸 보면.”
프란시스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를 보았다.
“그렇게 말하면 네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거니?”
마음이 나아지냐고?
아니,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열등감을 열등감으로 채우고 혐오에는 경멸로 답하며 남에게 상처가 될 만한 지점을 골라 찌르고 들어가는 이런 입버릇은 케이가 언제나 전쟁터 같은 삶의 한가운데에 내몰려야 했던 어린 시절에 생겨난 것이었다.
‘벼룩새끼. 죽어버려. 불결하고 더럽고 천박한 새끼.’
툭하면 마구간에 들어와 케이를 벼룩이라고 칭하며 매질을 일삼던 켄드릭이나.
‘에드워드의 발이 으깨졌다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톱니 안에 살점 떨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기름칠이나 해.’
케이를 비롯한 어린 소년들을 사람이 아니라 기계 부속품쯤으로 여겼던 공장장들이나, 무엇보다도 언제나 자신이 같은 저택에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갈망하던 공허한 프란시스의 눈 같은 것들—
케이 하커는 언제나 조금 더 나아질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지옥 같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살았다. 눈을 돌리면 당장 이 개 같은 일자리도 빼앗길까 봐 벌벌 떠는 소년들이 있었다. 켄드릭과 로버트는 안에서는 그를 ‘벼룩’이라고 부를지라도 밖에서는 그를 ‘케이 하커’라고 불렀으며 그가 가진 것들이 그에게 얼마나 과분한지를 늘 주지시켜주었다. 그래서 슬픔이나 절망 같은 것은 조금도 그의 마음의 방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저 살아야겠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떨구지 못해 안달이 난 이 절벽 같은 삶에서 매달려 살아야겠다.
롤러에 발이 끼지 않도록, 톱니에 손가락이 아작 나지 않도록, 케이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절망이나 슬픔 같은 감상에 젖어 잠시라도 쉬어가지 않도록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 늘 기름칠을 했다.
‘너는 그저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더러운 벼룩이야. 케이 하커.’
매일 매일 그렇게 되뇌면서 말이다.
그때는 불행 같은 건 조금도 알지 못했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작은 인형 같이 생겨서는 더럽게 고집이 세고 더럽게 아름다웠던 여자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케이 하커는 프란시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죠. 조금도. 하커 가문까지 금방이에요. 저택에선…… 제 팔을 잡으세요.”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가 조금 놀란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프란시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재킷 안주머니를 찾았다. 그러다가 담배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금방이었다. 하커 저택까지 도착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케이는 벌써 저 앞에 보이기 시작한 하커 저택을 바라보며 그날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자전거라는 것을 타보았던 날.
‘사장님께서 너를 보고 싶다고 하시는구나.’
그날 공장장은 사무실로 케이를 불러냈다. 공장장은 케이가 하커 가의 차남이라는 것은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만 케이가 하커 가에서 어떤 입지를 가졌는지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커 가의 차남을 짓밟는다는 쾌감에 중독된 그는 케이를 괴롭히는 것을 거의 취미로 여기고 있었고 그 탓에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케이 하커를 직접 찾은 적이 없던 사장이 그를 찾아왔다는 것에 좀 불안한 눈치였다.
추도사에서 말했던 것과는 달리 케이는 그때 19살짜리 소년이었다. 그러나 몸은 이미 거구의 청년에 가까웠다. 그의 영혼은 사춘기 시절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해 늘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의 몸집과 행동이나 말투는 괴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19살의 케이는…….
그토록 수없이 벼룩이라는 말을 들으며 컸던 케이는, 로버트 하커가 공장 정문 앞에서 자전거를 쥐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철없이 기대감에 벅차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