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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64화 (16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64화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를 발견한 곳은 교회 예배당에서 이어지는 기도실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앰버에게 물었다.

“케이는요?”

앰버가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구명정을 발견한 좌초된 선원 같은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밖에서 일을 해결하고 있어요. 대충 들었겠지만 켄드릭이 사고를 쳤거든요.”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대충도 듣지 못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기도실 한쪽에 앉아서 아루쉬에게 처치를 받던 프란시스가 앰버보다 먼저 대답했다.

“들을 필요도 없다. 켄드릭이 난동을 부린 거야. 로버트의 유언장에 케이에게 전 재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이 있었다지?”

담담한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켄드릭은 프란시스의 친아들이었다. 프란시스에게 어떤 짓을 했더라도.

프란시스는 켄드릭이 로킨트 저택에 찾아와 두 사람에게 마녀라고 윽박지를 땐 혼쭐을 내주고 내쫓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켄드릭은 그간 노름을 즐기며 꽤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로버트는 그 빚을 때때로 상환해주었다. 로버트가 죽고 로버트의 재산이 전부 케이에게 돌아간다면 켄드릭은 빈털터리가 될 뿐 아니라 빚쟁이가 되는 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옆으로 걸어가 프란시스 건너편에 앉아서 프란시스의 상처를 보았다. 생각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날카로운 파편 같은 것에 긁힌 듯 표면이 너덜너덜했다. 프란시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로버트가 죽자마자 당연히 로버트의 재산이 자신의 것인 줄로 알고 노름빚을 청산하겠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모양이야. 정신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심지어 더 빚을 내서 사치를 부린 모양이더구나. 변호사한테 미리 사정을 해서 유언장을 확인하더니 분노해서 눈이 돌았어.”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아루쉬에게 깨끗한 천을 잘라 내밀며 프란시스의 다른 쪽 손을 잡았다.

“그래서 프란시스한테 화풀이를 한 거예요?”

“……내가 로버트의 마음을 잡아놓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하더구나. 내가 로버트를…… 사로잡지 못해서 장남인 자신이 천대받는 거라고. 케이의 친모처럼 고분고분하지 않고, 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말하셔도 돼요.”

엘리자베스는 당장 켄드릭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프란시스에게 그 분노를 내색할 수가 없어 차마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엘리자베스는 그 따뜻한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그 상황에서 케이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레 장난스러워진 프란시스의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쿡쿡 웃기까지 하며 말했다.

“켄드릭이 미쳐버린 것 같다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치며 슬픈 눈으로 켄드릭에게 주먹을 맞아가면서 연기를 하더구나. 정신 차리라면서 말이야.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프란시스는 종래에는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했으므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앰버가 화들짝 놀라서 바깥쪽을 살폈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는 것을 차마 따라 웃지 못하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프란시스는 아직도 케이의 연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처럼 키득거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어찌나 명연기던지. 나는 그 아이가 왜 배우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그런 것 있잖니. 사기극 같은 작품. 그런데 보면 그 못돼 처먹은 금융원 직원이 가식을 떠는 그런 장면이 있지 않니? 그런 역할을 하면 케이 하커는 분명 엄청난 흥행을 했을 거야. 세상에. 어찌나 웃기던지. 케이가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으로 켄드릭을 바라보았을 때 켄드릭의 얼굴을 너도 봤어야 한단다, 아가. 정말이야…….”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두 여자는 잠시 기도실이 떠나가라 웃고 말았다. 앰버는 놀란 얼굴로 에드워드의 어깨를 두드렸고 곧 에드워드가 밖으로 나가 해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우시는 중이시라…….”

엘리자베스는 한참을 웃다가 이게 얼마나 로버트에게 큰 모욕일지를 생각해봤다. 로버트의 장례식장에서, 로버트의 유골함이 단 몇 걸음 밖에 있는 이 기도실에서 로버트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와 함께 한참을 웃다니.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이 통쾌해서 웃다가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얼굴로 프란시스에게 말했다.

“……괜찮은 거예요?”

프란시스 역시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말이니? 내 쓰레기 같은 전남편이 죽은 것? 아니면 내 쓰레기 같은 전남편을 똑 닮은 아들이 내 전남편이 늘 나를 협박하던 대로 정신병원에 갇히게 생긴 것?”

“둘 다요?”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프란시스가 결국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자베스 역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끔찍한 하루였는데…… 여전히 끔찍한 하루인데…….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케빈 퍼킨이 엘리자베스를 죽여주겠다고 했는데도 케이 하커가 켄드릭을 엿 먹인 장면을 생각하면 프란시스처럼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 같은 하루는 또 이렇게 조금씩 지나가는 걸까? 그 끝에 죽음뿐이라고 하더라도?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손을 잡고 웃음기가 끝난 뒤의 텁텁한 입으로 말했다.

“……쓰러졌다고 들었어요.”

“쓰러지는 시늉을 한 거야. 그렇게 안 하면 켄드릭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손에서 시선을 떼고 프란시스를 보았다. 옆에서 아루쉬가 헛기침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를 보았다. 아루쉬가 엘리자베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와 함께 일어나며 프란시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잠깐만요.”

엘리자베스가 기도실을 나가자 기도실 앞을 지키고 있던 에드워드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지막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겼어요?”

“……케이가 한바탕 연극을 벌였다면서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에드워드가 저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가 안으로 들어가고 아루쉬와 엘리자베스가 기도실 밖에 섰다. 켄드릭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케이 하커만 혼자 로버트 하커의 유골함 앞에 서서 조문객들의 인사를 받았다.

인사를 마친 조문객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침통한 표정의 케이를 보며 살짝 웃다가 다시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아루쉬에게 물었다.

“혹시 프란시스가 중독 증세 때문에 저러시는 건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고향 땅에서도 자주 봤어요. 고향에선 많은 사람들이 강한 마약에 중독되곤 했었죠. 이오페아 대륙의 선교사나 선원들이 가지고 온 마약 때문이었습니다. 그 탓으로 케이가 처음 우리 부족의 땅을 찾았을 때 저희 아버지…… 족장님의 공격을 받았던 거구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루쉬는 그럼 케이가 신시 무역회사를 하면서 유통활로로 찾게 된 이국 족장의 아들인 셈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고향 땅의 비극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아루쉬가 엘리자베스의 말을 막듯 먼저 말했다.

“중독 증세라는 게 단순히 의지의 문제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치료사이니 알고 있겠죠. 부인께서는 에테르의 흐름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요.”

엘리자베스는 에테르라는 말을 잘 몰랐지만 이어지는 아루쉬의 설명을 듣고 그것이 체력이나 면역력 같은 단어라는 것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요?”

아루쉬는 겁을 집어먹은 듯한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읽은 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강한 의지를 가졌고 무엇보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에테르의 기운이 좋은 편이에요. 주위 상황에 흔들리긴 했어도 이제 조금씩 회복할 겁니다. 회복의 기간은 몇 개월, 몇 년도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좀 걱정이 되는 것은 음…… 그걸 리오든에서는…… 혈압이라고 부르던가요?”

이제야 아는 단어가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말에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가 프란시스가 저혈압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혈압 자체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저혈압 때문에 기절을 반복하다보면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가 주는 약을 받아들었다. 아루쉬는 그 약을 먹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허브 차처럼 우리는 종류의 것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드시도록 하세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아루쉬가 싱긋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위로했다.

“부인께서 엘리자베스 양이 놀라실까 봐 걱정을 많이 하시던데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진 채로 기도실 안의 프란시스를 보았다. 거의 끝나가는 조문객 행렬을 보던 아루쉬가 엘리자베스에게 리오든의 예를 완벽하게 갖춰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저도 케이에게 인사를 하고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엘리자베스 양이 리오든의 치료술을 알려주면 좋겠군요. 리오든에 와서 배워보고 싶은 분야였는데 엘리자베스는 좋은 선생님이자 치료술사인 것 같아요. 아니, 내 말은…… 의사 말입니다.”

아루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좋은 의사가 아니에요.”

나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루쉬를 보았다. 그러자 아루쉬가 무슨 말이냐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리오든에서 좋은 의사는 사람을 잘 살리는 의사일지 몰라도 우리 고향에서 좋은 치료술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더 좋은 쪽으로 이끌어내는 사람입니다. 메심 마흐. 이제 정말 우리의 하루의 마지막이니 이 인사가 어울리겠네요.”

타인의 인생을 더 좋은 쪽으로 이끌어내는 사람.

엘리자베스는 더 혼란스러워진 기분으로 아루쉬의 인사를 받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메심 마흐.”

아루쉬가 줄의 끝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기도실 앞에 서서 모자이크 창문 너머로 비쳐오는 색색의 햇빛을 맞으며 서 있는 케이 하커를 보았다. 케이 하커 역시 시선을 눈치챈 듯 엘리자베스 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리고 금방 엇갈렸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케이 하커를 보며 생각했다.

케이 하커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이라면, 케이가 바꿔놓은 엘리자베스의 인생은 더 좋은 쪽으로 온 걸까, 더 나쁜 쪽으로 온 걸까.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를 만나지 못했던 날의 나를 상상할 수도 없다는 건 지금의 내가 좋은 쪽에 있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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