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63화
“우린 가봐야 될 것 같아서요.”
케빈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엘우드 밀이 통행증이 없어 길거리에서 무료 의료행위를 하다가 보비들한테 붙잡힌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려 케이를 보았다. 그녀는 케이의 눈빛이 묘하게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채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이곳에 보비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마차로 왔어? 내가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게.”
엘리자베스가 어색하게 묻자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 교수님이 삼촌의 사정을 듣고 마차를 내어주셨어요. 왕립병원에서 직접 신원보증도 서 주셨구요.”
케빈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힐끔 보며 말했다.
“케빈과 엘 선생님을 데려다주고 올게.”
“다시 올 필요 없어.”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 자식은 왜 이러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올 거야.”
“어차피 곧 있으면 저택으로 가서 변호사와 함께 아버지의 따분한 유언에 관한 이야기나 할 거야.”
케이는 주변에는 들리지 않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유언이라는 말에 케이처럼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유언장 얘기, 앰버한테 들었어?”
“들었어.”
엘리자베스는 눈으로 교회당 안의 빨간 머리 여자를 찾았다. 케이는 깨어나자마자 궁에 잡혀 있었는데, 이번에도 앰버 모건이 귀신같은 솜씨로 쪽지를 전달해준 걸까? 엘리자베스는 궁금했지만 더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수상한 남자들이 자꾸만 엘리자베스와 케이 쪽을 힐끔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재촉해서 케빈과 엘우드 밀을 데리고 교회당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저쪽이에요.”
케빈은 마차들의 행렬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그 쪽으로 다급하게 걸어가면서 케빈에게 말했다.
“케이의 팔은 정말 괜찮은 거야?”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어깨를 움츠렸다.
“네.”
“너 나한테 거짓말 하면 안 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 거짓말 아니거든요?”
말을 더듬었어.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얼굴로 케빈의 눈빛을 살폈다.
“넌 나를 한 번 속인 적이 있잖아. 그러니까 정말 거짓말하면 안 돼. 우린 동료고, 난 너한테…….”
엘리자베스는 그들보다 뒤처져서 걸으며 애써 엘리자베스의 눈을 피하는 엘우드 밀을 힐끔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 목숨도 맡겼잖아. 나 지금 정말 급해.”
엘리자베스의 간절한 눈을 보던 케빈이 입맛을 다시며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 그래요. 알아요. 급한 거.”
“아니. 넌 몰라.”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교회당 옆문에 서 있는 케이 하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엘 선생님이 저 상태라면……. 나한테는 시간이 3개월보다 안 남았는지도 몰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엘리자베스가 한숨처럼 숨을 크게 내뱉고 케빈의 눈을 보았다.
“무슨 소리긴. 적어도 내가 괴물이 되어서 손쓰기 힘들어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는 소리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스스로를 죽이겠다구요?”
엘리자베스는 대답 없이 케빈이 가리켰던 루이 교수님의 마차로 앞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 케빈, 엘우드 밀, 이 순서로 세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햇빛이 쨍한 여름이었다. 이제 초여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나가고 있었다. 리오든의 습기가 세 사람의 피부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엘리자베스는 끈덕진 습기를 수영하듯 헤치고 나아가 마차 앞에 섰다. 케빈이 우뚝 자리에 섰다. 엘우드 밀이 그런 케빈을 추월해 엘리자베스 앞에 섰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앞에 서서 머뭇거리는 엘우드 밀을 보며 물었다.
“설마 제가 에스코트해서 마차에 올려드려야 하나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엘우드 밀이 불쾌하다는 듯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곧 표정을 약간 풀곤 엘리자베스를 보며 어색하게 물었다.
“혹시…….”
“혹시?”
“……당신이 디트리히 폰입니까?”
엘리자베스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멍한 얼굴로 엘우드 밀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엘우드 밀이 그 하얗고 신비로운 엘프 같은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했냐는 질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아니에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것도 같은데 모르고 싶네요.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같이 가겠어요.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겁도 없이 엘 선생과 동행하기로 했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의 용기와 희망은 전부 어디로 숨어버렸을까? 쫓기는 신세에서 쫓는 신세로 인생을 바꿔보겠다는 결심은?
마음을 바꿔야 한다. 엘 선생님에게 치료제가 없더라도 이 땅에서 괴물을 몰아내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이……
그것이 나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엘리자베스는 굳은 결심을 다잡으며 말했다.
“선생님의 조수였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알려주셨잖아요. 수많은 과학적 지식과 논증법, 논리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논증과 논리, 과학을 떠나 행동할 줄 아는 용기를요.”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엘우드 밀의 눈은 혼란에 가득 찼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외침을 떠올렸다.
’씨발! 다 나가란 말이야!’
당신의 바닥이 어디든 간에, 그래, 나는 당신의 천장을 봤어. 당신은 거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포로를 잡아놓고 생체 실험에 동참했더라도, 당신은 그래도 마지막까지 도망치는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당신은 거기까지는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엘리자베스는 눈앞의 기억을 잃은 남자를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남자의 바닥을 보았음에도.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보았던 엘 선생을 믿기로 했다.
엘리자베스가 담장을 넘어 수도원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날이었나.
’그래. 그런 거다. 오늘 내가 개 같은 상태라고 해서 내일 볼 수 있을 환자를 놓칠 순 없지. 그럼 또 개 같아지는 거잖아. 끊임없이 개 같기만 한 상태로 살아가는 거잖냐.’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가만히 있으면 개 같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날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보며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엘우드 밀.
이 남자와 같은 의사가, 과학자가 되고 싶어서.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당신이 바로 그런 분이셨잖아요. 행동하는 과학자.”
엘우드 밀이 입을 뻐끔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곧 엘우드 밀은 뭔가 말을 덧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마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바라보다가 케빈에게 걸어갔다.
“왜 그래?”
케빈은 뭔가에 골몰하는 표정으로 땅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케빈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질문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것을 느끼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마음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건 전부 거짓말이야. 남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으면 전부 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케빈이 엘리자베스에게 말하지 않은 중요한 것, 케이의 상태가 걱정되어서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내 자신이 케빈에게 숨겨왔던 비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퀴닌은 케빈이 최초로 인공 합성에 성공한 것이라는 것. 루이 교수님의 실험을 완성시키는 것도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루이 교수님 자신이었다는 것. 엘리자베스는 그저 미래에서 알아낸 조잡한 지식 몇 조각으로 아는 체를 했을 뿐이라는 것. 엘리자베스는 케빈과 루이 교수님의 논문에 이름을 실을 자격이 없는 과학자라는 것.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자신은 의학적 지식을 갖춘 의사일지는 몰라도 과학자는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또한 케빈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당장 그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하지만 진실을 털어놓은 것은 케빈이 먼저였다.
“저 독극물을 탄환에 바를 수 있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루이 교수님이 도와주셔서 손쉽게 해냈어요. 겨우 며칠 만에요. 의회 청사 앞에서 엘리즈에게 써보기도 했어요. 효과가…… 있었어요.”
케빈이 단호한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효과가…… 있었다고?
엘리자베스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암흑 속을 떠올려보았다. 케빈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의심해서 뭐하나. 의심이라는 건 결국 회피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케빈이 독극물을 발명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케빈이 말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을 죽이지 않아도 돼요. 내가…… 흐흑……. 내가 할 거니까. 내가 해줄게요. 그러니 3개월 동안은 내 곁에 있어요. 내 곁에.”
케빈은 울먹거리다가 결국은 울음을 터트렸다. 엘리자베스가 케빈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케빈의 뺨을 만지려고 하자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지나쳐 마차로 뛰어가 버렸다.
엘리자베스는 멍하니 그곳에 서서 교회당 쪽을 바라보았다.
교회당 앞마당에서 한 남자가 엘리자베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루쉬였다. 엘리자베스는 손을 들어 화답하다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머릿속에 케빈의 말이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자신을 죽여주겠다는 저 어린 소년의 결심을 엘리자베스는 반갑게 받아들여줘야만 했다. 대견하다 여겨줘야 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졌다.
“젠장……. 젠장할…….”
죽고 싶지 않다.
엘리자베스는 화창하게 맑은 날, 그녀가 인생 내내 경멸해 마지않았던 남자의 장례식장 앞에서 그 사실을 단순하고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죽고 싶지 않다.
괴물로라도 살아보고 싶다.
엘리자베스는 울음을 삼키며 교회당 쪽으로 걸어갔다. 아루쉬가 끊임없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루쉬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살려줘요.
그런 마음을 담아.
그리고 그녀가 교회당 앞에 도착했을 때 아루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프란시스 부인께서 상태가 조금 안 좋으세요.”
“……네?”
엘리자베스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하자 뒤에 서 있던 에드워드가 말을 이어받듯 말했다.
“켄드릭이 사고를 쳤어요. 부인께서 손을 살짝 베이셨는데 피를 보시더니 잠깐 기절하셨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교회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삶은…….
삶은 그녀를 괴롭히는 데에는 참으로 부지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