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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62화 (16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62화

“그냥 물어보는 거야. 네 말을 들어주는 시늉을 하는 거야. 그런 척 하는 것뿐이야.”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케이의 목에 매달렸다.

케이의 뒷목은 땀으로 살짝 젖어 있었고 커다란 덩치의 몸은 구토의 여파인지 잘게 떨려왔다. 얄궂게도 케이는 발뒤꿈치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엘리자베스 쪽으로 조금도 몸을 숙여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고집스럽게 케이의 목을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너는 언제나 네 멋대로야.”

하지만 케이는 결국 짜증스럽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싸 안기 위해 몸을 숙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품으로 쏟아지는 케이의 무게감을 느끼며 살짝 울었다.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이상한 고통 속에 있는 케이를 위한 눈물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훌쩍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  안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쪽으로 그녀의 몸이 기댈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곧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목을 잡아당겼기 때문에 금방 무게 중심이 다시 엘리자베스에게로 돌아갔다.

몇 분 동안 그런 식이었다. 서로를 안고 안아주다가 안기다가 안김을 거절당하다가…….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어깨를 끌어안고 말했다.

“팔은, 괜찮아?”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케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케이의 얼굴에 너무 강렬한 햇빛이 비쳐 그의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거기에 엘리자베스가 쓴 모자에 달린 검은 망이 앞을 가리기까지 해 케이의 표정은 조금도 가늠할 수 없었다. 케이는 가려진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확인해보자.”

“여기서 어떻게 확인을 해.”

케이가 피식 웃으며 다시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껴안았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이 그늘 속에서 약간이나마 밝아졌으리라고 예상하고 안도했다.

“……케빈 퍼킨이 확인해줬어. 그 조그맣고 건방진 남자애 말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케이의 냄새가 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케이 하커가 살아 있다.

케이의 몸에서 썩은 내가 나고 피고름을 짜내던 시간이 마치 꿈처럼 엘리자베스를 관통해 지나간 것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속에서 절망만을 곱씹던 시간 역시 지나간 것이다. 그 수많은 죽음과 비극이 그녀를 지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그 시간이 지나간 것을 감사하게 여겼지만 동시에 씁쓸하게 여겼다.

절망이 이렇게 손쉽게 지나갔듯 희망 또한 손쉽게 지나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절망적인 한 시간을 지나 보낸 뒤에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생각일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그저 이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의 상처를 핥아줘야 하는 한때인지도 몰랐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지옥이 손쉽게 끝났듯이 천국 같은 순간 또한 손쉽게 우리를 지나가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가슴이 답답해져 바스락거리는 상복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진심도 아닌 이 애도의 시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에 케이가 말했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참 많아. 그건 놀라운 일이지.”

케이의 말은 평소답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더더욱 케이가 입에 올릴 법한 단어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그 사실에 의아해할 때 케이가 덧붙였다.

“특히나 남자들.”

“……케빈은 나를 동료로 사랑하는 거야. 그것보다 팔부터…….”

“그럴 리가. 그 또래의 소년들은 동료애 같은 건 몰라. 특히나 여자를 향해서는.”

케이는 짐짓 장난스럽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꽉 안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저 케이를 꽉 마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케이가 뒤이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어땠어. 내 천박한 거짓말이 좀 먹히는 것 같던가?”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의 추모사를 ‘천박한 거짓말’이라고 칭하는 것을 들으며 그의 목덜미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먹히는 것 같았어.”

“너한테도?”

“그래. 네가 대견스러웠어.”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쿡쿡 웃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귓바퀴에 입을 맞추며 거칠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것 참 다행이네. 다 너한테 배운 거니까 말이야. 네가 그런 걸 알고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야…….”

엘리자베스는 이 커다란 덩치를 가진 멍청한 사내가 자꾸만 자신에게 안겨오는 것을 느끼며 마음 한 구석이 구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케이가 절벽으로 내몰린 것만 같아서. 하지만 케이는 그 절벽에서 떨어지더라도 제 쪽으로는 손을 뻗지 않을 것만 같아서.

엘리자베스는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케이의 옷자락을 꽉 잡으며 말했다.

“난 네가 그 안에서 죽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거야.”

케이의 손을 제 쪽으로 뻗게 하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케이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견디지 못하면?”

“나도 죽었을 거야.”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대답하는 순간 케이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허리춤에 감겨 있던 케이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사라지는 케이의 무게감과 체취에 당황해서 케이의 옷을 더 세게 쥐었다. 하지만 케이가 곧 그녀를 밀어냈기 때문에 더 버틸 수 없었다.

“넌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 순간 케이의 목소리 들어 있는 서늘함은 엘리자베스가 수없이 케이의 분노한 모습을 보았어도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밀어내진 채로 케이에게 어깨를 잡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은 채로 고개를 숙여 엘리자베스와 눈을 마주쳤다. 밀어내진 반동으로 엘리자베스의 머리 위에 얹어진 앰버 모건의 실크 모자가 벗겨졌다. 그것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눈이 마주쳤다.

검은 상복을 입은 케이의 몸은 겁에 질린 짐승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고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눈은…… 새빨갛게 혈관이 터진 갈색 눈동자가 엘리자베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어떻게 감히 네가 그런 말을 하냐는 듯이.

케이는 이를 악물고 비틀린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해. 그러지 않았을 거잖아. 또 거짓말 하는 거잖아. 그냥 해보는 말이잖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빛에 서린 무시무시한 분노와 절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고 믿었는데.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랬을 거야. 네가 나 때문에 죽을 뻔했어.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잠시 엘리자베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검색 검문을 실시하는 근위병처럼 엄중한 얼굴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안에 폭탄이라도 숨기고 있다는 듯이 그녀의 안을 샅샅이 살피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죄책감이 들었을 거라는 거지?”

케이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뉘앙스에 문제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팔에 문제가 있는 거야? 잘라내야 한대? 솔직하게 말해. 그래. 솔직하게 말해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게. 약속해. 네가 내 마음까지 통제해야 속이 시원하겠다면 내가 그렇게 해줄게. 꼭.”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해 케이의 얼굴은 미처 살피지 못했다. 그 사이 케이는 다시 뒤로 물러나며 그늘 속으로 표정을 감추고 말했다.

“아니. 문제는 없어. 네 동료는 꽤나 실력 있는 의학도라던데.”

“케빈의 실력은 나도 알아…….”

엘리자베스가 자꾸만 말라오는 입 안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케이가 몸을 비틀어 엘리자베스의 손을 거부했다.

“여기서 이러는 건 적절하지 못해.”

케이는 거친 목소리로 교회당 안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문틈으로 보이는 교회당 안에 모여 있는 귀족과 자본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야 나는 앰버 모건의 약혼자고, 넌 내 현 약혼자가 아니라 전 약혼자니까.”

케이의 입에서 직접 스스로를 ‘앰버의 약혼자’라고 칭하는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저 교회당 안에 앰버도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포옹은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모자를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하지만 케이가 반발 빠르게 그것을 낚아채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 모건의 아름다운 실크 모자를 든 케이를 노려보았다.

“……난 네 전 약혼자가 아니라 의사야. 이제부터는 그래.”

“하지만 저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케이는 담담하게 말하며 앰버의 모자를 툭툭 털어주었다. 앰버의 모자를 털어주는 케이의 손에는 장례식 용 단정한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케이는 앰버의 모자를 엘리자베스에게 내밀며 엘리자베스를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몸의 각도가 바뀌자 그제야 케이의 얼굴을 확실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케이의 얼굴은 참으로 오만하고, 건방졌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귀족이나 자본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네 생각이 더 중요한 거야.”

“귀족이나 자본가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케이가 고개를 돌려 힐끔 교회당 한 쪽에 시선을 던졌다. 엘리자베스도 그쪽을 보았다. 노동자의 옷차림도, 자본가의 옷차림도 아닌 남자 몇이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의 옷은 전부 노동자의 옷이라고 하기엔 너무 새 것이고, 자본가의 옷이라고 하기엔 허세스럽지 못했다.

“보비들이야. 조지 왕자가 붙였지. 스스로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더군. 이제부터 나한테는 보비가 붙을 거야. 너한테도 그렇겠지. 우리가 가까워 보이는 건 별로 이득이 될 게 없어. 너한테.”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가려주던 교회당 벽면에서 떨어져서 옆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았다. 어두운 표정의 케이는 자본가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나한테?”

“그래. 너한테. 너를 위험에 빠뜨린 건 ‘우리’야. ‘우리’가 아니었으면 네가 그 의회 청사에 갈 일도 없었으니 죄책감 같은 건 느낄 필요가 없지.”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또다시 참신한 개소리로 자신을 ‘우리’가 아닌 쪽으로 격리시키는 것을 느끼며 분노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욕을 해주려고 할 때였다. 케이와 엘리자베스 쪽으로 케빈과 엘우드 밀이 걸어왔다. 케빈의 얼굴은 어두웠고 엘우드 밀은 여전히 엘리자베스 쪽으로 시선을 던지기 싫어했다. 그러나 엘우드 밀을 보는 순간 케이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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