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61화
“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3일이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신문에 잔혹한 화형식의 장면이 실림과 동시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쓰는 조지 왕자님의 노력이 실리는 동안 우리는 모두 저마다 레본에 일어난 큰 비극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3일’, 그리고 ‘비극’과 같은 단어를 듣는 순간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한 한 가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케이 하커가 완벽하게 귀족들의 억양을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아주 미묘하게나마 바뀌는 젊은 귀족들의 얼굴을 보며 케이 하커가 상황을 영악하게 이끌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2층에 있는 노동자들의 얼굴도 보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멀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순간이었기에 먼저 가장 큰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그날, 그 자리에서 직접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케이는 그 문장만큼은 힘을 주어 발음하며 앞줄의 귀족들과 청중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의 표정을 살피는 대신에 케이의 눈을 살폈다.
그 눈에 들어 있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기운 같은 것을.
“무도한 패거리들에게 묶여 광장 앞에 선 로버트 하커의 쓸쓸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저는 끝내 기절하기도 했습니다.”
케이의 말에 중간쯤에 서 있던 귀족 하나가 외쳤다.
“내가 봤습니다! 나도 테러 생존자예요!”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자본가 하나가 말했다.
“저도 봤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묘하게 ‘테러 생존자’라는 이름하에 서로 단합되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몇몇 부인들은 눈물을 훔치기 시작하기까지 했다.
“처음에 슬픔으로 시작된 감정은 점점 고통, 절망……. 그리고 그 끝에는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모든 분들이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갈 길이 없는 들끓는 분노로 여전히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케이의 억양은 여전히 완벽하게 리오든 귀족의 그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추모사를 조금은 위태롭게 조금은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케이의 말 하나하나가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종잡을 수가 없어 위태로웠고, 케이의 말 하나하나가 전부 엘리자베스를 흉내 낸 것이라는 사실에서는 뿌듯함을 느꼈다.
나도 어쩌면 너를 한 조각쯤은 변화시켰는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레본의 비극은 이제 우리의 위기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이라니.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에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그 말을 들으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가, 저 건방진 사내가 기어코 자신들의 말씨와 억양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이해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귀족들의 술렁거림을 느꼈다. 자본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케이 하커의 저 고귀한 억양은 자본가들은 언제나 흉내 내고 싶어 했던 표본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쓸데없는 교양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꾸만 하나가 되어갔다. 서로를 향하던 적의의 눈길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우리의 위기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을 저는 제 아버지, 우리의 친애하는 로버트 경의 삶에 방식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이라는 말을 할 때 케이는 단상 위에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케이의 눈에 스치는 오만한 미소를 느끼며 어떤 순간을 떠올렸다. 이 장례식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아버지가 죽었던 어떤 날의 순간 말이다.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애하는 재판장님. 그렇지 않습니까? 감히 나와 내 아버지가 주는 돈을 쓰면서 뒤로는 친정과 다른 짓을 꾸미다니.’
엘리자베스는 그날도 오늘처럼 수많은 청중 속에 있었고 케이는 단상 위에 있었다. 케이는 그날도 재판장의 질문에 답하며 오늘처럼 웃었다. 오만하고 건방지게. 숨길 수 없는 삐뚜름한 표정 사이사이로 혐오와 경멸을 담아서.
그러나 그날의 혐오와 경멸은 엘리자베스와 공작 부부를 향한 것이었다면 오늘의 혐오는 귀족과 자본가들을 향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자꾸만 그날의 혐오와 경멸 또한 엘리자베스와 공작 부부를 향한 것이 맞긴 했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케이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케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로버트 경은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방직공장에서 직접 실을 확인하고 결과물을 가지고 밤새 공장장과 토론을 즐겼으며 매일 같이 공장 바닥에서 스프와 빵으로 끼니를 때웠지요. 물론 가끔은 펍에서 시가와 맥주로 끼니도 하셨겠지만요.”
케이의 말은 자연스럽게 로버트 하커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케이의 농담에는 로킨트 노동자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노동자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족과 자본가들은 케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있다가도 노동자들의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이 교회당 밖에서는 공장 바닥에서 스프와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위스키 대신에 맥주를 마시는 것이 천박한 싸구려 행위로 여겨졌더라도 지금 이 교회당 안에는 로버트 하커를 존경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귀족과 자본가들은 그런 노동자들을 우습게 여겼지만 동시에 그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그들은 케이 하커의 추모사가 이어온 애국적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다음 날 출고되어야 하는 원단이 준비되지 않아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밤을 샌 날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를 모시러 갔습니다. 그때가 아마 제가 처음으로 공장에 가본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열두 살 때인가요.”
거짓말.
엘리자베스는 저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의 오만을 관조했다. 케이 하커는 열 살도 되기 전에 공장에서 일했다고 했으니 저건 전부 거짓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하커의 오만방자한 미소가 그가 거짓말할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임을 알았고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저는 그때의 그 활기, 열기를 잊지 못합니다. 방직 기계를 돌리는 사람, 원단을 나르는 사람, 염료 기계를 돌리는 사람.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할 때 나오는 그 엄청난 조화. 거기에서 나오는 힘. 그것은 그 자체로 레본의 미래였습니다. 제가 공장 사무실에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노동자가 아닌데 왜 이곳에서 밤을 새시나요?’ 그때 아버지가 저에게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케이. 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의 자리에 있듯 사장 역시 사장의 자리에 있을 때 공장이 살아나는 법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마음이 뿌듯함과 불안,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사이를 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그녀와 케이는 귀족과 자본가, 그리고 왕과 노동자들이 엄청난 판돈을 걸고 진행하는 도박판 위의 장기말에 불과했다. 엘리자베스는 노동자 몇이 박수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자본가들이 그것을 비웃듯 쿡쿡거리는 것도, 귀족들 중 몇몇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보았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버려야 하나.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저는 제 아버지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로버트 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작금의 레본의 위기에 대해서도 똑같이 얘기하실 것임을 압니다. ‘케이. 국민들이 국민들의 자리에 왕실은 왕실의 자리에 다시 서면 레본은 다시 위대해질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원래 일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희망의 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자리에서 출근을 하고 노동을 하며 퇴근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겠지요. 저도 아버지처럼 그들과 함께 공장에서 밥을 먹고 땀을 흘리며 일할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제 마음 속을 채우고 있는 그리움과 슬픔을 조금씩 비워낼 것입니다.”
왕실은 왕실의 자리에 다시 서라.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귀족들의 눈빛이 묘하게 빛나는 것을 느꼈다.
케이의 말은 레본에 비어 있는 국왕의 자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왕실이 왕실의 자리에 선다면 귀족들도 결국 다시 귀족들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말이기도 했다.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귀족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지금 케이 하커의 이 추모사가 내일 신문에 실릴 것을 장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교회당 정문을 지키고 있던 보비들과 그 뒤에 있던 기자들을 떠올렸다.
그때,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들고 말했다.
“케이가 조지 왕자와 대화를 마쳤단다. 조지는 이제 케이의 편이야. 자세한 건 앰버 모건, 그 영악한 빨간 머리의 여자가 잘 알려주겠지. 그 여자가 꾸미는 것이 무엇이든 당분간은 그 여자 옆에 있거라. 그 여자는 적어도 너와 케이를 배신하지는 않을 거야.”
프란시스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앰버를 단호하게 창부라고 칭하던 프란시스가 태도를 바꾸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 치고는 다소 과한 박수소리 속에서 케이 하커가 천천히 내려왔다. 케이는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가슴이 답답한 것처럼 앞섶을 풀어헤쳤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좇아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걷다가 안 되자 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건너편 옆문에 도착했을 때는 케이가 그곳에 있었다. 교회당 바깥, 벽면을 붙잡고 노란 신물을 뱉어내고 있는 케이 하커가.
케이는 인기척에 입을 거칠게 닦아내고 뒤를 돌았다.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까 단상 위에서 정갈한 모습으로 연설 같은 추모사를 마쳤던 남자는 이곳에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잔뜩 망가진 거짓말쟁이의 추한 뒷모습을 보는 기분으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가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안아도 돼?”
그러나 케이가 말을 이어가기 전에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케이의 말을 막았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담벼락에서 떨어지더니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헝클였다. 케이가 말했다.
“안 돼.”
케이의 오만한 얼굴을 본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는 케이를 알아채는 데에 실패하지 않았다.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케이와의 거리를 좁히고 발뒤꿈치를 들고 케이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뱉으며 말했다.
“젠장할. 이렇게 늘 네 맘대로 할 거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