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160화
그의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이었던 표정에 균열이 갔다. 그의 신비로운 초록 눈동자가 마치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듯 조금 풀어졌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기억이 3개월 안에 돌아올지도 몰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그럼 다음으로는 로버트 경의 차남, 케이 하커 씨의 추모사가 있겠습니다. 켄드릭 씨 역시 추모사를 준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깊은 슬픔에 빠진 나머지 생략하게 되었습니다.”
사제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엘우드의 멱살을 쥔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엘우드가 그녀의 손을 쳐내며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당신, 케빈 퍼킨과 같이 왔어요?”
“그래요. 그런데 방금 디트리히…… 폰이라는 사람…….”
엘우드가 머리가 아픈 듯 아직 얇은 거즈가 붙어 있는 이마를 매만졌다. 엘리자베스가 장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가는 케이 하커가 보였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지. 당신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인간’.”
엘리자베스는 걸음이 느리긴 해도 어디가 불편해 보이진 않는 케이 하커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일말의 감정을 읽어내고 싶어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케이 하커는 어떤 기분일까?
이럴 때야말로 엘리자베스는 강렬하게 깨달았다. 그녀가 평생 케이 하커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그녀가 그녀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그리고 그 세계에 받아들여지는 데에 완벽하게 실패했다는 뜻은 아닐까.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엘우드가 왜인지 모르게 절망적인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라니. 그런 건 당신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잖나.”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진리가 그렇듯 사랑 또한 때로는 남이 힌트를 줘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다음에 다시 만나요. 당신한테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고, 내가 그걸 생각나게 해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엘우드를 노려본 후, 다시 교회당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빌어먹을 엘 선생.
엘리자베스는 가슴 속에 묘한 희망과 절망이 함께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엘우드는 치료제와 독극물을 둘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 * *
“그래서 엘리자베스에겐 말하지 말라는 거였군.”
케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케빈에게 말했을 때였다. 사제가 케이와 눈을 마주쳤다. 옆에 있던 수도사가 케이에게 이제 당신의 추모사 차례가 되었다고 속삭였다.
케빈이 이를 악물고 케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댁보고 희생을 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걸 응급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엘리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더 응급한 환자인 셈이에요. 엘리즈한테는 시간이 3개월 남았어요. 당신한테는 6개월.”
“3개월……?”
케이는 이를 아드득 갈았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가 자신보다 3개월 더 일찍 물렸다는 뜻이리라.
“엘리즈는 당신이 물렸다는 사실을 알면 합리적으로 고민 같은 걸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거예요. 저 인간이 본인이 당신을 물었다고 생각하면 견디겠냐구요. 엘리즈는 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3개월 후엔 어떻게 되는데?”
“그 이후엔 이지를 잃고 괴물이 되는 것 같아요. 치료제가 들지 않을 가능성도 높구요.”
케빈의 말과 거의 동시에 사제의 목소리가 교회당 안에 울려퍼졌다.
“그럼 다음으로는 로버트 경의 차남, 케이 하커 씨의 추모사가 있겠습니다. 켄드릭 씨 역시 추모사를 준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깊은 슬픔에 빠진 나머지 생략하게 되었습니다.”
케빈이 케이의 팔을 잡았다. 케이와 케빈의 눈이 허공에서 만났다. 케빈이 말했다.
“적어도 엘우드 밀이 치료제 위치는 기억해냈을 때쯤에, 그쯤에 얘기하자구요. 엘리즈한테도. 네?”
케이는 자신의 팔을 잡은 케빈의 손을 쳐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케이 씨.”
“엘리자베스한테 내가 물렸다느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네 목을 당장 여기서 비틀어버릴 테니까.”
“……이봐요.”
케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케이를 불렀다. 그러나 케이는 단상 앞으로 걸어가며 케빈 쪽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잘 되었군. 어쨌거나 괴물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엘리자베스 쪽이 아니라 나일 테니까. 잘 보라구, 멍청한 친구. 이제부터 내가 괴물처럼 간사한 거짓말을 얼마나 잘 늘어놓는지.”
케이가 마지막에는 케빈 쪽을 돌아보고 오만하게 웃었으므로 케빈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가 웃는 모습이 얼마나 오싹한 기분을 들게 하는지, 케빈은 엘리즈에게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케빈은 이제야 엘리즈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케이가 단상 위로 올라갔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케빈의 어깨를 쳤다. 케빈이 뒤를 돌았다.
“엘리즈.”
엘리자베스였다.
* * *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케이를 가리켰다.
“좀…… 괜찮아 보여? 팔은?”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빈이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완전히요. 역시 거, 건강한 사람이 최고라니까요. 면역력! 백혈구! 적혈구!”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눈으로 단상 위의 케이를 보다가 과장되게 손짓을 하는 케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네?”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어? 케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 아뇨!”
케빈이 다급하게 말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가슴에 의심이 파도치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무척이나 초조한 상태였다.
엘우드 밀이 디트리히 폰에 대한 기억까지 잃어버렸다는 것은 치료제의 위치는커녕 제조 방법마저도 잊어버렸다는 뜻이었다. 물론 디트리히 폰이라는 이름에 반응하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그런 거면 나한테 말을 해줘야 해. 엘우드 밀이 기억을 잃어버린 상황이잖아.”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옆문에 서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고 있던 엘우드 밀과 엘리자베스의 눈이 마주쳤다. 엘우드 밀은 얼굴을 찡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멱살을 잡힌 기억이 선명하게 남은 모양이었다.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그렇죠…….”
“독극물 연구는? 제대로 하고 있어? 홀램브로 학술지에 글을 실은 그 여자 과학자가 발표한 물질로 해봤어?”
케빈은 그제야 엘리자베스가 자신이 초록색 궤적을 그리는 탄환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것조차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케빈 퍼킨이 엘리자베스에게 하고 있는 거짓말은 한두 개가 아닌 셈이었다. 케빈은 극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노력하고 있어요.”
“부탁해. 치료제든 독극물이든 둘 중 하나가 3개월 안에 만들어지지 못하면 난……. 난…….”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팔뚝에 소름이 돋아난 것이 느껴졌다.
정말 난 어떻게 해야 될까?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케빈이 뭔가 항변하려고 할 때였다.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한 여자가 엘리자베스의 등을 가볍게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초췌한 얼굴의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팔짱을 풀고 거기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엘리자베스.”
“……프란시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로킨트 저택에서 3개월 간 지내면서 내내 맡을 수 있었던 냄새 말이다.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궐련을 피우시는군요?”
“전부 뺏겼어.”
“……누구에게요?”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프란시스가 단상 위의 한 남자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거구의 한 남자가 단상 위에서 종이를 펼치는 것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프란시스의 손을 꽉 잡았다.
케이 하커는 어울리지 않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애통한 듯한 침울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서서 이런 글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 아버지는 이 로킨트 스트리트에서 위대한 노동자들과 함께 출퇴근을 하고 레본의 미래를 꿈꾸며 잠드는 사업가였습니다.”
케이 하커의 목소리에는 비통함이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당장 그 자리에서 끌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2층에 있는 노동자들은 케이의 목소리에 감동을 받은 듯 ‘편히 쉬소서’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몇몇은 케이 하커를 의회로 보내야 된다며 큰 소리를 냈다가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반면 케이 하커를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는 귀족들의 눈빛을 보았다. 케이 하커가 사면될 것이라는 것이 거의 분명해진 지금도 귀족들이 저런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것은 다소 의아했다. 엘리자베스가 그 점을 프란시스에게 묻자 프란시스가 대답했다.
“귀족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아. 가주들이 죽은 가문이 많고, 가주의 죽음이 ‘신도 주인도 없다’고 말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소행이었으니…….”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평민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는 거군요.”
알 만했다.
가주를 잃은 귀족 가문들은 당장 책임을 물을 곳이 필요할 것이고 무정부주의자들은 이제 거의 죽고 없고 그들의 혁명은 평민들 사이에 일어난 혁명의 바람을 이용한 것이었으니 귀족 가문들의 분노는 평민에게로 쏠린 것이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그렇지. 당장 로버트에게 내려진 경 칭호도 귀족들은 별로 달갑지 않은 모양이더구나. 귀족들은 이번 일로 자신들의 자리가 위험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 위기에 처하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인데, 한 때나마 레본에서 위대한 영광을 누렸던 귀족들은 오죽하겠니. 솔튼 빌리스, 윌리엄 조쉬, 이런 어린 귀족들이 혁명에 나섰다는 것도 귀족들을 자극하는 요소 중에 하나야. 윌리엄이 제 부모와 형을 죽였다니. 귀족들은 더 똘똘 뭉쳐야 한다고 믿는 눈치란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주변에 있는 귀족들을 보았다. 지금 리오든의 귀족 밀도는 그 어떤 시대보다 높았다. 농노들이 도시 노동자로 변해 영지를 이탈하고 전과 같은 사치를 유지할 수 없던 귀족들이 영지를 팔거나 축소시키고 리오든에서 이런저런 기회들을 노리게 되면서 리오든은 이제는 영지에는 이름만 남겨둔 귀족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아졌다. 그들의 몰락은 이미 정해진 궤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의회 테러 사건으로 인해 귀족들의 몰락이 세상에 까발려지고 공개적으로 그들의 명성이 바닥에 추락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엘리자베스는 저들끼리 똘똘 뭉쳐 적의를 발산하는 귀족들의 눈빛을, 그러나 그 적의 안에 담긴 불안을 읽었다. 그 사이에 케이는 계속해서 추모사를 읽어내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