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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59화 (15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59화

‘엘 선생님…….’

케이는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엘리자베스를 단숨에 찾아냈다.

언제나 그랬다. 두 사람의 약혼 기간 동안 이런저런 파티에 초대되어 갔을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솔치노 스트리트 같은 곳에서 마부 옷을 입고 똥칠을 하고 있을 때도 물론, 엘리자베스는 어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섞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엘리자베스의 옷이나 머리나 액세서리 때문이라고 여겼다. 저런 화려한 장식을 갖추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솔치노에서 엘리자베스를 본 뒤로 케이는 도무지 그런 식으로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마부 옷을 입고 있어도 캉캉 춤을 추기 위해 넓게 퍼지는 치마를 입은 무희들보다도, 값비싼 천으로 옷을 해 입은 신사들보다도 늘 눈에 띄었다.

그렇기 때문에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포함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는 엘리자베스 외에 다른 것에 눈을 둘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햇살이 들이비추는 옆문에 서 있는 한 사내를 향해 입모양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엘 선생님…….’

이라고.

케이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며 자신의 시선 끝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하지만 눈은 어느새 남자의 얼굴에 가 있었다.

햇빛 아래에 서서 얼굴을 잔뜩 찌푸린 남자는 아름다웠다. 청순한 얼굴에 진한 눈썹, 그리고 그 밑에 푹 꺼진 눈은 초록색으로 빛났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은발에 가까운 금발이었으나 햇빛 아래에서 보니 마치 햇빛 그 자체 같기도 했다. 남자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 엘리자베스를 마주보고 있었다.

케이는 저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다가, 또 남자에게 애원하고 싶어졌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는 순간 케이는 알 수 있었다. 저게 바로 꿈속에서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두근거리던 그 순간 엘리자베스가 짓던 표정이리라는 것을.

케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케이의 어깨를 쳤다. 케이가 시선을 살짝 돌려 상대를 보았다. 케빈이었다.

케빈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케이를 불러냈다. 자리에서 일어난 케이는 케빈과 함께 교회당 구석으로 물러났다. 교회당의 가장 어두운 곳에 서서도 케이는 빛이 들이비치는 엘리자베스와 엘우드의 모습을 보았다.

“케빈. 저 남자가 엘우드 밀인가?”

케이의 질문에 케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케이의 시선이 아까부터 고정되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네. 엘리즈랑 만났네? 아, 씨…… 뭐 어떻게 되겠죠.”

“무슨 말이야?”

“그건 나중에. 것보다……. 몸 좀 어때요? 내가 걱정이 돼서 왔어요.”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엘우드 밀이 교회당 벽면에 가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케이는 그 둘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 다행스럽다가도 지옥 같아진 기분으로 케빈에게 답했다.

“멀쩡해. 이상하리만큼.”

케이는 궁 앞에서 느꼈던 기괴한 충동을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그 정도 충동은 정상의 범주에 있는 것이리라 여겨졌다.

“멀쩡하겠죠. 그게 문제지. 그 이상한 꿈같은 건 안 꿔요?”

이상한 꿈?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가 미간을 찌푸리자 케빈이 얼른 낚아채며 말했다.

“꾸는구나. 역시…… 엘리즈의 말이 다 맞았어.”

케빈은 초조해 보였다. 케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 꿈이 뭔데? 예지몽 같은 건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두근거리던 심장을 아직도 자신의 심장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지몽은 무슨.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에요. 과거에 있던 일이라구요. 그건 엘리즈의 기억일 거예요. 확실하진 않지만. 엘리즈 말로 몰록이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그 체액에 남아서 다음 전달자에게 전해지는 것 같다고 했어요. 공상과학 같지만 여튼 그래요. 근데 그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거든요? 실제로 세포에는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고 그게 번식 과정에서 전달되어야 진화가 일어나는 건데……. 결국 몰록의 번식 방법이 이런 기괴한 전염 방식이라면……. 후대 몰록이 선대 몰록의 기억을 흡수하는 거죠. 이봐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어려운 얘기라는 건 알지만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하니까 해주는 거예요.”

기억이라고.

케이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케이는 교회당 벽면에 서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옆문으로 슬며시 비추는 것을 보았다. 케이는 꿈속에서, 아니,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심장 소리를 귀로 들었다.

쿵. 쿵. 쿵.

케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케빈이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엘 선생한테 치료제가 있긴 한데, 그게 하나 밖에 없다는 거예요.”

케이가 고개를 돌려 케빈을 보았다.

“뭐?”

“……치료 방법이 없다구요. 1명 분 치료제밖에는. 더 생산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저 삼촌이 그걸 아직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엘우드 밀이 기억을 잃어버렸거든요. 머리를 다쳐서.”

얼굴이 굳어진 케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을, 저 빌어먹을 남자를 사랑하는데 저 남자에게 치료제가 있다고.

케이는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인지 이제는 재밌기까지 했다.

이제 케이는 엘우드 밀을 죽여버릴 수도 없게 된 것이다.

* * *

“……엘 선생님…….”

아루쉬는 엘리자베스의 중얼거림을 듣고 엘리자베스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했죠?”

아루쉬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영혼이 나간 얼굴로 아루쉬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뇨. 아니에요.”

“아는 사람인가요?”

아루쉬가 엘리자베스가 보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뇨. 아니에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저기……. 먼저 가서 앞쪽에 자리 잡고 내가 보이면 손을 흔들어줄래요? 사람이 너무 많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가 아루쉬의 팔을 놓았다. 그러자 아루쉬가 곧 앞 열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군중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본 엘리자베스는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엘리자베스는 문가에 서서 햇빛을 받으며 바닥을 발로 살살 긁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엘우드 밀.’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대체 왜 엘우드 밀이 여기에 있는가? 그런 질문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마치 자신의 시선 끝에 머무는 나비가 자신의 손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운 어린아이처럼 숨을 죽이고 남자에게로 걸어갈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질린 채 엘우드 밀의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하얀 피부, 은발에 가까운 금발,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더욱 두려워졌다.

이곳이 꿈속인가 하여.

이렇게 또 다시 이 남자를 눈앞에서 놓치는 것인가 하여 말이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성급하게 이렇게 말해버렸다.

“엘 선생님!”

남자는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예민한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떴다. 그러고는 물었다.

“누구…… 십니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기억과는 달리 너무나 어눌한 레본어에, 의외로 딱딱하면서도 격식 있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 남자는 엘 선생님이 아니다. 이 남자는 내가 알던 엘 선생으로부터 6개월 전의 인물이야.’

엘리자베스는 엘프처럼 아름다운 생김새의 남자를 샅샅이 살폈다. 이 남자가 엘우드 밀이 아닐 가능성, 혹시라도 자신이 사람을 잘못 알아봤을 가능성, 이게 꿈일 가능성에 대해 쉼 없이 되짚으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엘리자베스입니다. 절…… 모르시겠지만 저는 케빈의 동료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돌연 교회당 한쪽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시선에서는 사람들의 어깨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남자의 시선에서는 케빈이 보이는 쪽인 모양이었다.

“케빈…… 아, 케빈 퍼킨 씨.”

“케빈 퍼킨…… 씨?”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호칭에 미간을 찌푸렸다. 케빈은 엘우드를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것 같았는데 엘우드는 왜 케빈을 ‘씨’라고 부르지?

이상한 사람.

엘리자베스는 역시 엘우드 밀은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처음 본 순간부터 끝까지 무례해놓고 시골에서 만난 촌뜨기 소년에게는 ‘씨’라는 호칭을 쓰다니.

그래. 이게 엘우드의 또 하나의 괴기함인 줄로만 알았다. 엘우드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저분의 동료면 역시 저도 알아야 하는 분이겠군요. 제가 기억을 상실했다는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아마도 뇌진탕 때문에 일어난 경미한 증상이겠지만 저는 지금 제 이름 외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기억하죠, 엘리자베스 양. 당신의 이름은 들었어요. 저와 같이 떨어지신 분이라고.”

엘우드 밀의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온몸이 굳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을 떠다니던 수많은 질문들이 갑자기 허공에서 흩어졌다.

조는 살았나요? 치료제는 어디에 있나요? 몰록은 물에도 들어갈 수 있던가요? 당신은 대체 왜 몰록 따위를 만든 건가요? 몰록의 피 속에 인간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3개월 후의 나의 영혼도 어딘가에 잠들어 있게 될 가능성은…… 정말 없나요?

그동안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이런 수많은 질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살짝 비틀거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기, 기억을 상실했다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립병원에서 경찰에게 끌려가셨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소식을 듣지 못하셨군요. ……그럼 제가 아는 분이 아닌 겁니까?”

엘우드 밀의 질문은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아는 척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엘리자베스가 아는 엘우드보다 훨씬 냉소적인 어조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대답하는 대신 혼란스러운 눈으로 교회당 벽을 짚었다. 엘리자베스가 아무 말 없이 벽에 기대어 헐떡거리자 엘우드 밀이 천천히 다가왔다.

“왜 그러죠? 괜찮나요?”

엘우드 밀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아니!”

엘리자베스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다가오는 엘우드 밀의 멱살을 쥐었다. 엘리자베스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엘우드 밀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정말 기억을 못한단 말이야? 아무것도? 당신이 인류에 저지른 만행은 물론이고 당신 동생에게 저지른 만행도?”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과 단숨에 자리를 바꿔 그를 벽으로 몰아붙인 탓에 아무도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에 더욱 더 핏기가 사라진 엘우드 밀이 말했다.

“내…… 동생……?”

“그래. 당신 동생. 디트리히 폰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와 함께 엘우드 밀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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