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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157화 (15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157화

남자가 싱긋 웃었다.

“케이 하커 씨가 그간 레본에 보여준 충정을 봤을 때, 케이 하커 씨께서 부친이신 로버트 하커 경의 장례식만큼은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지 왕자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케이 씨의 부친에 대한 애정이 강한 분이시고, 케이 하커 씨가 얼마나 슬프실지를 감안해 지금 당신을 이곳에 붙잡아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케이는 남자의 교묘한 화법에 담긴 수많은 함의들을 가늠해보았다. 그 중에서 한 가지가 특히 걸렸다. 케이가 물었다.

“로버트 하커 경이요?”

“네. 조지 왕자님께서 로버트 하커 씨에게 ‘경’ 칭호를 하사하시기로 하였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인 도자기를 힐끔 보았다. 케이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저 도자기가 참으로 고마워하겠군.’

케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칭호 문제는 의회의 재가 없이도 가능한 것이니 조지 왕자님께서 결정하신 것입니다. 로버트 하커 경은 그 누구보다도 국왕 폐하의 안위와 그 자리의 귀족과 자본가들을 위하여 애쓰셨고 그 위대한 분의 죽음은 레본의 비극이니까요. 조지 왕자님께선 그런 분의 죽음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편이오. 방금도 보지 않았소. 이 더러운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의식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지! 신도 주인도 없다! 정말 만족스러운 어구야!’

케이는 의회 청사에서 로버트 하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을까.

케이는 남자의 다정하다 못해 속이 울렁거리는 미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군요. 왕자님께 아주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그럼 오늘의 조사는…….”

“이로써 마무리가 되겠지요. 다시 뵐 일이 없길 바랍니다, 케이 하커 씨.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보비들하고 마찰을 일으키지 마세요. 보비들은 당신을 무척이나 싫어하거든요.”

케이는 남자의 말이 어제 오후 케이가 발로 정강이를 차버린 경사 놈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케이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보비가 나를 싫어하고 나도 보비를 싫어하니 서로 얼굴을 볼 일은 없겠지요. 조지 왕자께서 저에게 전할 다른 말씀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말이오.”

케이가 우회적으로 남자를 떠보는 통에 남자는 곤란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남자는 케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살짝 내쉬곤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참 닮으셨네요.”

“누가 누구를 말이오.”

“서로 말입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과 케이 하커 씨. 두 분.”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나오자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리자베스가 이곳에 여전히 잡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순간 케이는 끔찍한 공포에 질렸다.

조지 왕자와의 거래가 어찌되든 엘리자베스의 신변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여겼던 것은 자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남자는 이미 엘리자베스를 인질로 삼고 케이를 협박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케이는 조사에서 내내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무의식중에라도 언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조지 왕자가 두 사람의 파혼 사실을 모를 일은 만무했던 것이다.

케이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순식간에 여유를 되찾은 표정으로 말했다.

“서로 이름만 들으면 눈빛이 짐승처럼 변하는 것도 닮았네요. 참 재미있는 관계 아닙니까? 두 분이 함께라면 참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케이는 남자의 말에 성대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조지 왕자님의 전언이오?”

“……아닙니다. 사견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케이는 남자를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군. 그 여자는…….”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꺼낸 것만으로도 이성이 날아간 기분으로 남자의 목이라도 조를 수 있을 것처럼 말했다.

“그 여자는 나를 죽이려고 했던 여자야. 내가 마지막 결투를 그 여자와 했다고, 귀족들이 증언하지 않던가? 내 허벅지에 칼을 쑤셔 넣은 것도 그 여자라고…….”

“……당신의 목숨을 살린 것도 엘리자베스 양이라고 들었습니다.”

남자는 케이의 말을 가볍게 끊어내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케이는 남자의 그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자신이 함정에 잡힌 쥐처럼 굴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물려고 아가리를 벌린 함정 아래 스스로 들어가 기어코 발버둥을 쳐 그 함정에 온몸이 짓눌려 압사당하는 쥐처럼. 케이는 엘리자베스라는 함정에 걸리고 그 함정 안에서 발버둥을 쳐 압사당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케이는 발버둥을 포기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남자를 삐딱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여기에 있나.”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셨지요? 아닙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무고한 시민을 붙잡고 있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은 조지 왕자님의 친척 동생뻘이 아닙니까. 레본을 위해 큰일도 하셨구요.”

케이는 남자의 말에서 또 다른 함의를 느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라는 호칭의 변화.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조지 왕자의 친척 동생이라고 말하는 것.

케이는 그것이 조지 왕자의 의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남자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그것을 저지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또한 그저 예의를 갖추며 일어났을 뿐이었다. 케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내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해드린 것에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시오. 나, 케이 하커는 어떤 일이 있어도 조지 왕자님을 도와 레본을 바른 길로 이끌 것임 또한 전해주시오.”

케이의 말에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당연합니다. 레본은 계속해서 강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이트 레본. 그것이 언제나 국왕 폐하의 꿈이 아니셨습니까.”

케이는 남자가 무의식중인지 의식적인지 모르겠지만 국왕에 대한 일에 과거형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왠지 다시 볼 일이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케이의 말에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 이름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빌리스. 다니엘 경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케이는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 케이의 손에 닿았다.

다니엘 빌리스.

이 남자는 솔튼 빌리스의 동생이었다. 케이가 옥색 도자기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형님의 시신은 잘 수습했소? 다니엘 경.”

케이의 질문에 다니엘이 대답했다.

“수습했습니다. 내일 장례식이 끝난 후에 달리 하실 일이 있으신가요?”

“……?”

“솔튼 빌리스의 목이 시가지에 걸릴 예정이거든요. 원하시면 구경하러 오세요. 당신을, 그리고 엘리자베스 양과 수많은 귀족과 자본가들을 위험에 빠뜨린 반역자의 머리를 보고 싶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케이는 다니엘의 미소를 눈에 담고 ‘시간이 없다’고 짧게 대답하며 조사실을 나섰다.

케이는 조지 왕자가 다니엘 빌리스를 이 일을 해결할 적임자로 여긴 것이 얼마나 영악한지 알 수 있었다. 다니엘 빌리스는, 저 아름답고 다정한 사내는, 절대로 이 일을 허투루 다룰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케이는 다니엘 빌리스의 냉혹함보다는 조지 왕자의 영악함에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그렇게 케이가 다니엘의 안내를 받아 궁 뒷문에 도착했을 때였다. 다니엘이 케이에게 마차를 불러주겠다고 말했다.

“프란시스 부인께서 장례식을 주관할 사제를 알아보느라 바빠 이쪽에 들를 수가 없다고 전하셨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지금 리오든에 열리는 장례식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케이는 다니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말을 믿을 수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어떤 방식으로든 앞으로 케이에게 ‘꼬리’를 붙일 것이다. 그 일환으로 마차를 불러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차피 감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니엘이 마차를 부르러 간 사이 케이는 그런 생각 속에서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재킷 안주머니를 뒤졌다. 담배가 간절하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벌써 끊은 지 3개월이 넘은 담배가 안주머니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건너편을 보았다. 그러자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잭.”

케이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그 남자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말함과 동시에 케이는 하얀 괴물의 형상을 다시 떠올렸다. 남자를 덮치려던 거대한 괴물. 케이는 그것이 엘리자베스라는 사실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너! 너 거기 서!”

남자의 얼굴을 본 것이 케이뿐이 아니었던 듯 건너편을 지키고 있던 보비 둘이 잭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비는 무작정 몽둥이를 꺼내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망가지 못하고 서 있는 잭의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케이는 그것을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으악!”

잭의 비명을 듣는 순간 케이의 근육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케이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누구를?

케이는 그 순간 살면서 느꼈던 충동 중 가장 강한 충동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케이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케이를 낚아챘다.

“……케이 씨.”

케이가 뒤를 돌았다.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경사 하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다니엘은 여전히 잭에게 시선을 고정한 케이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말씀 드렸지요? 보비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마시라구요. 경찰청 지하 감옥에서 탈옥한 전력이 있는 범죄자라고 하네요. 제 발로 여기까지 오다니. 멍청했죠. 관심 끄시고 마차로 가시죠. 저깁니다.”

다니엘이 마차 하나를 가리켰다. 케이는 마차와 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비들이 잭을 둘러싸고 있었다. 잭은 축 늘어진 채 천천히 보비들에게 들어올려졌다. 케이는 잭이 끌려가는 것을 보며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

케이는 지금 다니엘이나 다를 바가 없는 신세였다. 살얼음판을 걷듯, 한 발만 잘못 내딛는 순간 추락할 수 있는 신세 말이다. 케이는 다니엘을 따라 순순히 마차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차 앞에 서서 다니엘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케이는 마차에 발을 내딛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내렸다. 그리고 다니엘과 대화를 나누던 경사를 붙잡았다.

“내가 저 남자의 몸값을 지불하지.”

케이의 말에 경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몸값…… 이라뇨?”

“저 남자를 풀어주란 말이지. 대단한 죄목도 아닐 거 아닌가.”

케이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수표를 꺼내자 경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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